대여섯 살 무렵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꼬맹이가 빈소의 아빠 사진을 보며 "아빠가 저 뒤에 숨어 있어?" 묻는 바람에 엄마를 울렸던 기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다. 엄마는 나를 40대 중반에야 낳으셨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 같은 엄마 손에 곱게 곱게 길러졌다.
그랬던 탓에 엄마도 갑자기 죽을까 봐, 친척도 없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될까 봐, 어린 나는 거의 공포 수준의 걱정을 품고 자랐다. 엄마가 조용히 자고 있으면 숨을 안 쉬는 게 아닐까 두려워 쳐다보기도 무서웠고, 엄마가 아프면 괜히 내가 더 아픈 척 꾀병을 부리며 기어이 아픈 엄마를 일으켰다. 언젠가 돌아가셔야만 한다면, 내가 서른 살 아니 마흔 살은 넘어서이기를, 그리고 너무나 죄송스럽지만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내 안에는 그렇게, 도무지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딱히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의 아이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의 바람대로 네 엄마는 네가 마흔이 훌쩍 넘고, 엄마 나이 아흔이 넘어서야 돌아가신단다. 며느리도 손주도 보고 요양병원에 5년도 넘게 계시다가 돌아가신단다. 그 사이 엄마는 몸도 정신도 상해, 너는 가끔 이럴 바엔 엄마가 가셨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엄마의 마지막에 너는 곁을 지키지 못한단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가르치는 아이들 시험을 앞둔 주말 수업, 다행히 병원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나는 월요일에 산소 마스크와 콧줄을 낀 채 의식 없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간호사도 아마 오늘이 마지막으로 보시는 걸 거라 했다. 의식이 없어도 귀로는 들을 수 있다는 말도 있고 해서, 엄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 나랑 애기랑 애기 엄마랑 열심히 잘 살게. 걱정 마."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엄마, 하루만 더 버텨보셔." 수요일이 아이들 시험이라 화요일엔 모든 아이들 최종 수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돈 때문에.
화요일 수업을 마치고 새벽 두 시까지 아이들의 질문을 다 받을 때까지 병원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역시 우리 엄마네. 끝까지 아들 걱정해서 버티시나보다 하며 잠이 들었다. .. 그러다.. 일곱 시가 한참 넘어 깼는데, 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중환자실로 내려가신 몇 주 동안 늘 벨소리만 들어도 흠칫 놀라는 날들이었는데, 어제 수업한답시고 무음으로 돌려놓고는 다시 벨로 바꿔 놓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셨어요. 할머니 다섯 시 사십 분에 돌아가셨어요."
처음 전화가 온 시간이 다섯 시 이십 분이고 병원까지의 거리가 한 시간이 넘으니.. 아마 첫 전화를 받고 바로 움직였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아, 어차피 못 오니 피곤한데 잠이나 더 자고 오너라.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아들 놀라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라고.
친척도 없는 늦둥이 아들과 며느리와 손녀가 지킨 빈소는 그래도 많은 지인들이 다녀가 주셨고, 화장을 하고 아버지와 합장을 하던 날까지 날씨마저 너무 좋았다. "겨울에 가면 자식들 고생시키는데.. 날 좋을 때 가야 되는데.."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의 작은 소원도 끝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 겁먹은 채 내 안에서 자라지 않던 아이가, 문득, 나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