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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12. 2023

취미로 발견하는 '나'라는 사람

오늘의 밑줄 03 - 김상민의 <아무튼, 달리기>

"취미가 뭐예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형식적으로 받는 질문이다. "ㅇㅇ씨가 생각하는 취미의 정의가 뭐예요?"라고 묻고 싶지만 말을 삼킨다. 우리가 흔하게 취미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얼마나 자주 해야, 혹은 얼마나 오래 해야 취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일"이 취미를 정의하는 시작일수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거나, 넷플릭스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며 쉰다. 하지만 흔하게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정말 평범한 질문인데도 사실상 무게가 있는 질문이다. "꽤나 지속적으로 하는, 당신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가 있나요"라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무튼, 달리기>는 달리기라는 세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쓴 기록이다. 나는 달리는 사람이 아닌데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쓴 평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달리는 사람이 아닌데도, 느끼시는 모든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써진 책이어서 정말 순식간에 읽었네요. 중간중간 재치 있고 재밌는 부분도 많아요. 어느 활동이든 처음 접한 뒤, 그저 해보는 것이 아니라 진득하게 달라붙어 정말 "나의 취미"로 만드는 과정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은 <아무튼, 달리기>였지만 일상에 새로운 활동을 소개하고, 그것을 나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꾸준히 만드는 데에는 역시 많은 생각과 노력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바뀜을 통해 삶도 바뀌고, "나"라는 사람이 바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가님도 뛰기 전에는 "뛰는 사람"이라는 자아가 없었지만, 이제는 "뛰는 사람"이라는 게 자신의 자아의 큰 부분이 된 것처럼요."


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은 계속되는 것 같다. (대학교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을 읽은 뒤 시달리는 현상이다.  한때는 누가 달린다고 하면 내 눈에서 떨어지는 하트를 주워 담아야 할 정도였으니...) 달리기는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는 행동이지만 체력적으로 고통스럽고 내면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는 일이다. 나의 취미인 춤, 피아노와 다르게 외부적이게 내가 만들어내는 것도 없다. 즉각적인 "재미"가 부재한 행동이다. 헬스가 취미인 사람들은 남에게 몸을 보여주려 하는 경우가 크다. 달리기는 살이 빠질 수는 있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 몸이 예뻐지는 운동 또한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경한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뛰는 걸까.


책에서 밑줄 친 부분들이 많다. 대부분 공감한 부분들이다. 브런치에 리뷰하며 이렇게 옮겨 적다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책에서 이 내용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어본다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고).


취미의 시작, 일상의 루틴에 그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우리의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날들의 연속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이 지난한 하루하루 속에 삶의 변곡점이 되어줄 놀라운 순간들이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곡점이 늘 거창하거나 대단한 사건만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너무 보편적인 일상의 한 장면일 수도, 심지어 어디 가서 말하기도 민망한 계기일 수도 있다."


"하루는 99퍼센트의 루틴과 1퍼센트의 이벤트로 구성된다. 루틴은 지구의 공전처럼 일정 주기로 반복되는 일상이다. 출근길 지하철 풍경부터 맥도날드의 피클 뺀 더블치즈버거, 노동요로 틀어놓은 검정치마의 노래와 침대맡 스탠드 조명 아래 읽는 한 권의 책까지, 불가피한 현실과 좋아하는 취향들이 뒤섞여 빚어내는 삶의 단면이다. 그렇게 루틴은 내일도, 그다음 날도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반복된다. 반대로 이벤트는 일상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일렁이는 크고 작은 물결이다. 소소하게 반짝였다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는가 하면,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며 루틴의 풍경을 산산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아찔했던 첫 경험으로부터 한 달이 지날 무렵, 달리기는 루틴과 이벤트의 갈림길에 놓였다. 물론 시작은 이벤트였다. 한밤의 달리기는 내가 알던 일상에선 존재하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처음 달린 그날 이후로도 뜀박질은 계속됐다. 이러다 말겠지 했던 일이 하루하루 이어졌고, 심지어 한 달이 지나도 멈출 기미가 없자 일상심의위원회가 긴급히 소집됐다. 달리기를 일상으로 편입시킬지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달리기는 내가 던진 한 표, 즉 몰표를 받으며 당당히 루틴의 영역에 입성했다. 다만 결정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달리기를 하루 중 언제의 루틴으로 삼을지였다.


루틴은 TV 편성표와 같아서 시간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일요일의 밤 산책을 다른 요일, 다른 시간대에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특정 시간의 루틴은 그때가 아니면 의미를 잃고 만다. 달리기는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이라는 선택지를 제시받았다. 하루 대부분을 먹고사는 일로 채워야 하는 우리에게 공통으로 제시되는 옵션이다."


밑에 나오는 "아침 달리기"와 "밤의 뜀박질"에 대한 설명은 달리지 않는 나에게 신선한 설명이었고, 작가의 필력덕에 뛰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 구분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침 달리기는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다.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일어나고 나면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일상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이불을 박차고 게으름의 늪을 빠져나온 이에게 아침 달리기는 삶의 주도권을 손에 쥐여준다. 이들에게 아침이란 더 이상 쫓기듯 시작되는 풍경이 아니다. 자기 의지로 활기차게 떼는 하루의 첫걸음이다. 그래서일까? 이른 아침 마주치는 러너들은 한 명 한 명이 건강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성실함과 에너지를 재료로 인간들의 형상을 빚는다면 바로 이 사람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반대로 한밤의 달리기는 하루를 매듭짓는 일이다. 아침 달리기가 막 깨어난 생기와의 조우라면 한밤의 달리기는 숨죽인 듯 고요한 레이스다. 아침 러너가 다가올 하루를 낙관의 물감으로 물들일 때, 밤의 러너는 이미 과거가 된 하루를 차분이 쓸어 담고 정리한다. 일상에 차여 기진맥진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이 남긴 근심과 아쉬움을 날숨으로 내뱉는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다. 하루 종일 괴롭히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동시에 내일의 희망을 뺴꼼히 엿본다... 음의 기운을 드리우며 차분히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고 위로하는 영혼들. 그래서인지 한밤의 러닝은 조금 더 처절한 모습을 띤다. '달리기'보단 '뜀박질'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다."


"야행성 러너야말로 내게 잘 어울리는 옷임을 이내 깨달았다. 밤의 뜀박질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위안을 품에 안겼다. 달리는 이유라면 수십 가지도 댈 수 있지만 그중 가장 뾰족한 건 내 안의 자존감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일상에서 숱한 파도를 겪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 순간 무척 작고 초라해진 내 모습과 조우한다. 스트레스야 어떻게든 잊거나 풀면 그만이지만 내가 무너지고 소멸하는 기분마저 들 때면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굴렀다.


심야의 뜀박질은 그때마다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렸다. 뛰는 순간만큼은 근육부터 호흡가지 몸의 변화에만 집중하며 생각을 비워냈다. 멘탈에 놓는 모르핀 주사처럼, 도무지 떨치지 못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릴 때는 잠시나마 자취를 감췄다. 더불어 목표했던 거리를 어렵사리 완주해 내면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를 얻었다. 자존감의 회복은 위대한 성과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성취가 금 간 마음의 빈틈을 메우고, 그런 성취들이 모여 단단한 삶의 방파제가 되어준다.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혹은 빠른 속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세운 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애를 손에 쥐었다. 일상의 끄트머리에서 움켜쥔 그 성취를 이불 삼아 불안에 떠는 몸을 녹이고 유독 길었던 하루에 마침표를 찍곤 했다."


"이벤트로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 막 일상으로 뿌리내렸다면, 머지않아 나와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것이다.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서로 다른 두 달리기를 비교하며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의하면 그만이다. 아침 달리기가 상쾌한 시작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처연한 마무리다. 아침 달리기가 생기로운 계절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내 발자국 숨소리로 공간을 채우는 경험이다. 아침 달리기가 활기 넘치는 바깥세상과의 만남이라면 밤의 뜀박질은 텅 빈 길 위에서 스스로와 나누는 깊은 대화다."


작가의 필력


피식피식 웃게 되는 재밌는 부분들:


"실력도 요령도 없는데 의욕만 앞선 러너에게는 매일 밤 웃픈 결말만이 기다렸다."


그 웃음을 미소로 바꾸는 부분들:


"한동안 달리기는 나의 허술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허술함이 좋았다. 모든 노력을 쏟아내고도 '나 진짜 못 뛴다'며 한탄했지만 그런 내가 밉지 않았다."


그러면서 작가가 친구 같다고 느껴지는 부분들:


"가령 샤워 후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마주할 때면 종종 자기애가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설마 나만 그런 건가. 만약 그렇다면 4주간 샤워기 압수). 어쨌거나 자기애는 샤워 후 촉촉히 젖은 내 모습을 볼 때만 생기지 않는다. 지독히 서툴지만 열심히 발버둥 치며 1cm씩 전진하는 내 자신과 마주할 때도 피어난다."


그리고 작가가 나와 함께 이 험한 세상에 나와있는 동지같이 느껴진 부분들:


"스스로의 허술함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가 발 담그며 살아가는 곳이 실패에 그리 관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추락과 동의어로 느껴질 만큼 우리는 실패라는 단어에 막연한 공포를 갖고 산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보다 한없이 휩쓸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진정한 행복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닌, 더 나은 내 모습을 꿈꿀 수 있을 때 피어난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매일 밤 미숙함에 발목 잡혔지만 바닥을 뒹굴면서도 시선은 더 나아질 내일을 향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달리는 명분은 충분했다. 허술하지만 행복했다."


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웃긴 사람이 아닌데, 아주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만 나오는 개그가 있다. 이것도 내가 정말 많이 경계를 풀었을 때 나오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따스함을 넘어서는 즐겁거나 재밌는 글을 쓰는 게 어려운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만약 재밌게 쓴다면 이런 식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작가가 러닝화를 사러 가는 부분을 쓴 부분에서 나오는 이런 문장이다:


"어쨌거나 돈 쓰러 갈 때만 나오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백화점에 입성했다."


이 대목부터 웃겨서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휘어지는 미소를 장착하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건 그 가벼운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육중한 무지의 벽이었다. 쿠션화, 레이싱화, 단거리용, 장거리용, 안정화, 트레일화까지. '러닝화' 한 단어로 퉁치기엔 너무도 복잡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러너에게는 취향은 말할 것도 없고, 뭐가 필요한지조차 모호했다.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새로 나온 게 뭐예요?"


<아무튼 달리기>를 읽다 보면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는 현상인데, 카페에서 피식피식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읽다 보면 그 상황에 놓여있던 작가의 내면과 공감하다, 그 공감의 끝에 있는 어느 정도 세상에 관한 깨달음이나 통찰력을 보게 된다. 이 전개가 너무나 매끄러워 읽고 있을 때는 이런 식의 진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책의 내용에 빨려 들어간다. 물론 이게 가능한 이유는 작가의 필력이 정말 좋기 때문이다. 드는 예시도 거의 대부분, 딱 적절하다.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나머지 절반은 직접 경험하며 나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이제 막 런닝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수리영역 주관식 29번 같은, 막연하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달리기 초심자들에게는 몸에 대한 지식도, 무엇이 필요한지의 정보도 없다. 하지만 돈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돈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다. 취미생활의 출발선에서는 평소보다 소비의 끓는점이 대폭 낮아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아무것도 모르기에 소비가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를 더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 그렇게 무지한 스스로를 인정하고 돈으로 혼쭐 내겠단 마음을 품는 순간, 우리는 자본주의형 러너로 거듭난다."


"그렇게 타노스가 전 우주를 돌며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듯 내 몸의 정보들을 수집해 갔다. 비록 카드 스냅 한 번에 월급 절반이 날아가는 경이로움을 목격했지만 발견의 기쁨이 이내 빈자리를 채웠다."


쓰면서 느끼는 점이, 작가의 글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내가 평소에 쓰는 표현들이랑 비슷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라던가, "경이로움을 목격했지만"과 비슷한 표현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한 표현들을 써서 내가 이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던 것일까?


이건 잊고 싶지 않아서 밑줄 친 부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마케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할까 말까 할 땐 하고, 살까 말까 할 땐 사세요. 그 돈과 시간만큼 자산을 남기면 됩니다." 비록 마케터들에게 건넨 조언이지만 막 달리기를 시작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달리는 일 자체가 내 몸에 축적하는 자산임을 잊지 말자. 그래도 아직 주저하게 된다면 마음에 거대한 꽃밭을 조성해 보자. 그 꽃의 이름은 합리화다. 합리화를 머리에 꽂고 지금 당장 최애 브랜드의 매장으로 달려가보자."


합리"화"라서 꽃밭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책 속에 잠깐잠깐 숨어있는 언어유희를 발견하는 것도 재밌었다.


재밌는 부분들이 워낙 많지만 한 부분만 더 소개하려고 한다:


"달리기에 대해 가장 만연한 편견은 '지루함'이다. 썩 내키진 않지만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달리기는 축구의 '골'처럼 극적인 순간이 있다거나 농구처럼 화려한 개인기를 뽐내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승패를 가르는 운동이 아니기에 경쟁이 주는 긴장도 덜하다. 나 홀로 시작하고 끝맺는 일이다 보니 팀플레이의 끈끈한 맛도 없다.


혼자 하는 운동들, 가령 요가나 수영과 비교해 봐도 뭔가 머쓱해진다. 요가처럼 수많은 자세들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드는 재미도, 수영의 다양한 영법을 마스터해 가는 과정도 달리기와는 조금 먼 얘기다. 러닝의 꽃이라 하면 마라톤인데 그조차도 언뜻 보기엔 몇 시간 동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할 뿐이다.


괜한 비교에 죄 없는 달리기의 어깨만 축 늘어져버렸다. 병 주고 약 주는 느낌이라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달리기를 위한 변호를 시작하려 한다. 달리기 씨 고개 드세요.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실제로 달리기 씨 고개 드세요 - 이 부분 읽을 때 함박미소를 지으며 읽게 된다. 이런 장난스러운 말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워낙 재밌는 책이라 쉴 틈 없이 밑줄을 쳤고, 아직 나누고 싶은 밑줄이 정말 많지만 이 정도로 해야겠다. 북리뷰가 길어져서 문제다.


작가는 "적어도 어제보다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달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책을 끝낸다. 내가 시간을 쓰는 취미들도 비슷한 이유로 유지를 하고 있다. 내일 조금 더 나아질 내가 있기 때문에 오늘 한번 더 피아노 앞에 앉고, 거울 앞에서 안무를 맞춰본다. 책을 읽고, 이렇게 잠시나마 독후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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