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밑줄 02 -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
하마터면 덮을 뻔한 책이었다. 책의 첫 부분들이 저자의 생각보다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기까지 생겼던 일들을 나열하는 형식으로 써져 있었고, 그런 부분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페이지 안에 등장인물들이 쉴 새 없이 나오는 것도 몰입도를 방해했다.
그래도 평점이 너무 좋아서 휙휙 몇 장 넘기자 나를 멈추게 하는 구간이 있었다. '말하고 듣는 인간'과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해 써진 부분이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평소에도 조금 생각해 보고, 예전에 이것에 대해 지적을 들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관심 가지고 읽었고, 실제로 책의 몰입도를 위해서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주의 깊게 한 글자 정성 들여 다시 읽었다. (실제로 이 책은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그 일 자체로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기록들이 많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놓인 작가의 생각들이 흥미로웠고, 가끔 작가가 진지하게 추천하는 책들이 있어서 좋았다. 추천받은 책들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어도 읽어 볼 예정이다.)
매일 아침 조금씩 읽으며 총 3일 걸쳐 끝냈다.
"말하고 듣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에는 언어 외에도 다양한 '소음'이 섞인다. 말하고 듣기에서는 때로 상대가 입으로 내뱉은 언어 정보보다 그런 소음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목소리, 말투, 표정, 시선, 몸짓, 자세, 외모, 거리와 같은 것들이다. 메신저와 소셜미디어를 이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읽고 쓰기보다는 말하고 듣기에 가깝다고 여기고, 그런 비언어적 정보가 없으면 어색해한다. 그래서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두 가지 영역에 대해 소개를 할 즈음 써져 있는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특히,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왜 문자나 카톡을 어려워하나 생각했을 때 이게 사실은 말하는 영역과 더 가까워서라고 정리를 하니, 여태 나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시간을 견디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질문이 어쩌면 쓰는 인간과 말하는 인간을 가르는 중요한 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화와 녹음기가 생기기 전까지 말하기와 듣는 그 행위가 이뤄지는 시간에 집중하는 의사소통 기술이었다. 실시간 메신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쓰기와 읽기는 보통 마주하지 않은, 다른 시간에 있는 사람을 향했다.
더구나 글은 기록으로 남는다. 그래서 쓰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보다 일관성을 중시하게 된다. 말은 상황에 좌우된다. 그래서 말하는 인간은 쓰는 인간보다 맥락과 교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예의와 윤리는 다르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된다.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나에게 옳은 것이 너에게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그때 옳았던 것은 지금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괜찮은 것이 너에게는 무례할 수도 있고, 한 장소에서는 문제없는 일이 다른 시공간에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나 그 가족 앞에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무신경하거나, 무례하다. 그러나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여겨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컨대 인터넷 공간의 모든 사람에게, 앞에 없고 그가 모르는 암환자 가족이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돌겠네, 미치겠네, 죽겠네'라는 표현은 어째서 허용하는가? 신경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그 가족, 최근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족들의 상처는 왜 살피지 않는가?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전자도 쉽지 않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다."
사실 어느 정도 모멘텀이 붙으며 이 책을 읽게 된 순간은, 내가 이 작가와 꽤 나 닮았다고 느낀 이후였다.
장강명이라는 이 사람은 사람들의 질문이나 말을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 분 와이프가 그러셨다고 한다. 저자는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뭐라고 말하면 그걸 진짜로 '들으려'" 한다고.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하는 뻔한 말을 해도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들으려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답답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반대로 가끔 와이프 분이 "자기는 정말 센스가 좋아, 내 말을 참 잘 이해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녀가 친구나 회사 동료에게 아무리 설명해줘도 상대가 오해하거나 못 알아들은 이야기를 재깍 알아듣고 이해하기 때문에.
나도 비슷한 말들을 들은 적이 많다. 그리고 장강명이라는 사람이 이 밑에 얘기를 했을 때 지난날의 내가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읽고 쓰듯이 말하고 들으려 하는 인간이었다. 텍스트라고 부르는 언어 기호에는 남들보다 훨씬 더 집중하면서, 비언어적 신호와 맥락으로 소통하는 법에는 무지했다."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은원씨가 하는 말은 좀 주의 깊게 들어야 해요. 하지만 알맹이가 있어서 그 말을 쭉 머리에 펼쳐보면 이게 정말 재밌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분은 나에게 내가 하는 말은 책처럼 어느 정도 머리에 펼쳐봐야 내 말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분은 분명 칭찬으로 얘기를 했었고 나도 기분 좋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개선할 부분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실제로 쓰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반전이 들어가 있는 문법들이 내가 말하는 한 문장에도 많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니")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이 내 말에 온 신경을 곤두서고 있어야 내가 하는 말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나의 문장들을 머릿속에 쭉 나열해야 이해가 된다는 말이었다. 나도 텍스트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할 때도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초집중을 하며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다른 사람들도 나의 말을 그렇게 들어주고, 그렇게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남의 말을 그렇게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부분도 크게 공감을 했다:
"신문기자가 된 다음에는 호감이 가는 사람과 단 둘이 있을 때면 인터뷰하듯이 대화를 했다. 상대가 한 말에서 빠진 정보를 재빨리 파악하고 끝없이 물었다. 그래서요? 그게 언제였던 거예요? 그 이유가 이게 아니라 저거였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식으로 언어 기호에는 실을 수 없는 내 진심,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좋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대개의 상대는 내가 자기 얘기를 경청한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며 열심히 대답했다. 그러나 간혹 "지금 무슨 취재하세요"라며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고등학교 내내 신문부에 있었고, 대학교 1학년때도 신문부에 있으면서 학교 내 교수님들과 스태프를 취재하러 다니며 이 질문형태의 대화가 몸에 베이게 되었고,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질문으로 대화를 이끄는 게 익숙해졌다.
이 외에 전자책과 종이책에 대한 차이를 다룬 점도 흥미로웠다 (적어놓지는 않겠다). 이미 나도 전자책으로 많이 넘어간 상황이지만, 저자의 생각들을 읽고 전자책을 좋아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술을 마시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로망도 있었는데, 이 부분도 인상 깊게 읽었다:
"술을 마시고 글을 쓰는 건 가능한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취한 상태에서 정신없이 원고 몇 장을 쓴 적도 있다. 다음 날에 보면 하나같이 장황한 감성 과잉의 배설물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나 한때의 레이먼드 카버, 한때의 스티븐 킹처럼 알코올에 전 상태로도 멋진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버와 킹은 술을 끊은 다음에 글을 더 잘 썼다. 알코올은 그들의 발목에 묶은 모래주머니였지 지팡이가 아니었다."
"앞서 말하기와 듣기에서는 사람의 외모나 차림새가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고 썼는데, 말의 달인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김미경 원장이 출연했을 때 스튜디오는 열광의 도가니였고 심지어 몇몇 팀원은 김 원장의 이야기에 감명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김 원장의 외모가 젊은 연예인처럼 예쁘장하다거나 목소리가 성우 같아서는 아니었다."
"글의 매력이 하나의 결이 아니고 세상에 다양한 개성의 작가들이 있듯, 말의 매력도 여러 결이 있고 말의 달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팟캐스트를 하면서 알게 됐다."
"글의 달인과 말의 달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사람들은 글은 일종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글은 잘 쓰는데 인품은 형편없다"는 말은 위화감 없이 들린다. 반대로 글은 못쓰지만 인품이 뛰어난 사람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말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것이 그 사람 자체라고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이 그윽하게 말의 매력을 풍긴다면 그것이 곧 그의 인품이라고 생각한다. 카리스마 있는 말투나 대화에서의 협연 능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말은 따뜻하게 하지만 성격이 냉혹한 인물, 반대로 말은 까칫하지만 속으로 다정한 인간형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여긴다.
읽고 쓰는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는 다소 고립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나는 둘 중에 고르라면 어떤 사람을 그가 쓰는 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찾아 읽어도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어둡고 날카로운 글을 좋아하는데, 그런 글을 쓰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성격도 그렇게 어둡고 날카로웠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랬고 조지 오웰이 그랬고 제임스 엘로이가 그랬다. 말하는 인간으로서 그들은 기껏해야 수줍음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고, 독선적이라거나 괴팍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저자는 글 쓰는 것이 더 나은 인간을 만든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들은 예시에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다고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을 합리화하는 데 아름다운 문장들을 동원하는 추악한 체제가 얼마나 많은가. 책벌레였던 인간 백정도 수두룩하다. 히틀러는 매일 500쪽씩 책을 읽었고 보유한 책이 1만 6,000권이나 됐던 장서가였다. 죽는 순간까지 다양한 책을 엄청나게 읽은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마오의 독서생활>이라는 분석서까지 나왔을 정도다. 스탈린은 독서광이자 시인이었다."
"그렇다면 왜 읽는가? 왜 쓰는가? 개인적인 답변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자는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수면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깨어 있으면 졸려서 버틸 수가 없다. 아무리 즐거운 나날이 이어져도 글을 읽거나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나는 허무해진다. 그런 허무함은 짧은 몇 문장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내가 읽고 쓰는 글은 단행본 한 권 길이는 되어야 한다."
"요즘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내가 아닌 남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타인과 세계를 체험하지 않고 이해하는 방법은 언어뿐이고, 그들은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주 긴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긴 언어를 순서대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는 책이라고. 다른 사람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다 보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을 테고. 헌데 가끔은 그 질문에 대해 "그야 물론 재미있으니까"라거나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대답하고픈 충동도 인다."
비평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럽고, 어느 정도의 '리뷰'를 하는 것을 선천적으로 좋아하는 성격인 내가 위로를 받은 부분이다. 실제로 내가 가끔 간단한 리뷰를 뛰어넘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주 아주 간단한 리뷰 수준이다) 분석적으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해서 그것에 대한 생각을 표현했을 때 그것은 분명 '창작'을 하고 있는 기분과 비슷했다.
물론, 나의 글들이 절대로 비평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위로를 받는 건 위험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창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비평을 한다'는 식의, 작가들이 몰래 품는 은근한 우월감에도 나는 반대한다. 나는 비평 역시 창작이며, 다만 그 재료가 다른 사람의 작품인 것으로 여긴다. 내가 주변 세계를 재료로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평론가들에게 묘한 동료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내 작품을 재료로 누군가 글을 쓴다면 기쁘다. 내 글이 의미의 세계에 포함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한 허영은 아니다."
"<보바리 부인>과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발표 당시에 판매 금지되었다. 톨스토이도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동물농장> 원고는 출판사 네 곳에서 거부당했다...<위대한 개츠비>는 피츠제럴드가 사망할 때까지 2쇄가 다 팔리지 않았다. <폭풍의 언덕>도 <모비 딕>도 작가가 죽고 난 다음에 겨우 평가받았다. 이런 얘기는 몇 페이지고 더 쓸 수 있다.
플로베르는 분명히 자기 책이 나오면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거다. 나보코프도 그랬을 거다. 그들은 엠마나 험버트를 덜 부담스러운 인물로 묘사하거나 이 캐릭터들이 막판에 회개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로 타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왜? 글쓰기의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페르난두 페소아나 헨리 다거처럼 그냥 원고를 써서 자기 책상 서랍에 넣어둘 수도 있었다. 카프카처럼 몇 편만 발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고 편집 작업을 거쳐 작품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했다. 몇몇 작가에게는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작가들이 미래의 독자를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것이 진지하게 읽고 쓰는 사람들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쓰는 우리도 소통을 원한다. 그런데 말하고 듣는 세계의 거주자들과 달리 우리의 소통 대상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우리는 읽으며 과거와 대화를 한다. 우리는 쓰면서 미래로 메시지를 보낸다. 그 때 우리는 현재와 싸울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상식 대부분을 고작 50년 전 사람들이 듣는다면 격분할 것이다. 같은 원리로 50년 뒤의 독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할 테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식사나 뜨거운 물줄기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하려는 게 있다. 그걸 품위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고, 의미? 글쎄....... 나는 내가 좇는 그 '의미'가 객관적인 것인지 주관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보다 크고 나의 바깥에 있으면서 내 안에도 있는 무엇.
김정운 작가는 나쁜 것들을 지워나가면서 좋은 것들을 발견한다고 했는데, 나는 내키지 않는 선택에 몰려 내가 추구하는 그 '무엇'의 형태를 겨우 파악한다. 별로 팔리지 않을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쓴 책 원고가 있다. 그걸 쓰면서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재미있어서 회사에 나간다는 사람도 있고 글 쓰는 게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니다. 소설 쓰는 일을 사랑하지만 즐겁고 재미있지는 않다. 예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치거나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내 글쓰기 실력보다 더 빠르게 커져서다. 내 필력은 더 나은 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을 때 아주 더디게 나아질 것이다. 나는 그 괴로움을 택하고 받아들인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실은 분명 개탄스러운데, 일본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는 생각이 꽤 바뀌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850년 러시아에서는 아예 글을 읽지 못하는 완전 문맹 비율이 90퍼센트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가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책은 끝났다, 문학은 죽었다고 엄살떨지 말라는 게 사사키 씨의 주장이다."
"사실 내게 진짜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문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부터 시작해볼까. 마크 트웨인은 제인 오스틴의 글이 너무 싫다며 무덤에서 파내서 뼈를 걷어차고 싶다고 말했다. 마크 트웨인에 대해서는 윌리엄 포크너가 저질 글쟁이라고 욕했다. 포크너에 대해서는 헤밍웨이가, 헤밍웨이에 대해서는 나보코프가 독설을 날렸다."
"2018년 즈음부터 '뭔가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거 같다, 이거 좀 바꿔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살아야 할 일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내 글 솜씨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함께 느꼈다. 집중력과 체력은 아직까지만 괜찮지만 머지않아 흐트러질 것이다. 그런 요소들이 다 더해져 언젠가는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될 거다. 그게 언제일까?"
"나는 지금 만 44세다. 60대 중반에 내가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쓰게 된다면, 20년가량 남은 셈이다. 장편소설은 아무리 빨리 써도 1년에 한 편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소설가로서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쓰면 쓸수록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최대 스무 편쯤 훈련할 기회가 있는 셈이다."
장강명 작가가 추천하는 소설들:
<악령> 도스토예브스키
<블랙달리아 1, 2> 제임스 엘로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문장을 본받기 위해)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끝없는 이야기 1, 2> 미하엘 엔데
책을 읽으면서 끝없이, "와, 나랑 정말 닮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장강명 작가가 팟캐스트를 그만두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이 안 써져서 우울증에 걸리고, 약도 복용하면서 그는 소설이 안 써지는 자신을 대면한다.
그는 "말하는 장강명(TM)"과 대화를 하면서 마지막을 마무리한다. 말하는 장강명은, 장강명이라는 전체적인 사람을 위해서 돈을 벌고, 희생을 하며, 글 쓰는 장강명을 위해 바깥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얘기한다. 쓰는 장강명은 그동안 고마웠지만, 이젠 "읽는 사람 마음에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글들"을 쓰면서 일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평생 가도 그런 소설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한다고" 고백한다.
말하는 장강명은 웃으며 "그게 저 때문이라고요?" 하며 묻는다.
이 부분에서 중학교 때 읽었던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가 생각났다.
예술만을 하기엔 돈이 없어 예술가들은 다른 노동을 하며 입에 풀칠한다. 다른 노동을 하며 시간을 잃는다. 감각을 잃는다. 돈을 겨우 벌어 예술로 돌아오지만 더 이상 거울의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다.
난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 작곡가도, 음악가도 아니지만 언젠가 "나"라는 사람이 느껴지는 작곡이나 편곡을 하고 싶다. 안무가도 아니지만, 언젠가 마음에 드는 안무를 하나 정도는 만들고 싶다. 어렸을 때는 여행작가가 되고 싶었고, 그러다 시인이, 그러다 작사가가, 그러다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
수많은 꿈을 뒤로하고 정착한 직업은, 변호사다.
사실 나쁘지 않은 타협이다.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리정돈을 잘하고, 결정을 빨리하고 실행력과 추진력이 높은 성향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후천적인 교육으로 얻은 스킬이 더해져 이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과연 내가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살아야 할 일'이 변호사인 것 같진 않다.
물론 나는 아직 마흔네 살이 아니다. 나도 마흔네 살 즈음엔 저자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 문학은 살아있더라도 책은 과연 살아 있을지. 세상은 얼마나 바뀌어있을지. 뒤로 미루기로 한 지금의 결정에 또 어떤 결말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시간만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