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밑줄 01 -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많은 사람들이 <어린왕자>를 알지만, 내 주위에 <어린왕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아주 초반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에 대한 이야기 말고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심지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부분은 어린왕자가 등장하기도 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왕자>는 어린아이들에게 쉽게 읽어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생각보다 꽤 길고 감정선이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줄곧 "어른다운" 생각들을 질타하는 책이지만 그 "어른다운" 생각이 어떻게 "어린아이 같은" 생각과 다른지는 어른이 되어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해 대충 읽다 말아버리는 책이 되고, 나이가 든 이후에는 "어린이들이 읽는 책" 혹은 "그림책"이라 쉽게 평이되어 어른들에게 읽히지 않는 책이 된다.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이 시점, 나는 다시 <어린왕자>를 찾는다. 나이가 들수록, 이 천진난만하고 구슬픈, 마음이 슬퍼질 때는 노을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매사에 진지한 어린왕자야 말로 가끔 온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북리뷰" (독후감) 시리즈를 연재한다면 <어린왕자>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책은 인간관계의 기본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낭만을 품고 있다.
<어린왕자>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책은 우연히 어린왕자를 만난 비행사의 시점에서 써져 있다 (생텍쥐베리 본인의 시점일 수도 있다).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며, 외톨이처럼 비행을 하며 이곳저곳을 돌 던 비행사가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가 난 상황에서 "결코 범상치 않게 생긴 한 작은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 작은 친구가 어린왕자이다. 첫 만남부터 어린왕자는 다짜고짜 일단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비행사는 양을 여러 번 그려주지만, 어린왕자는 양이 "병들어 보여서" 혹은 "염소 같아서" 혹은 "너무 늙어 보여서" 다시 그려달라고 한다. 지친 마음에 비행사는 양 대신 상자를 그려준다. 그 상자 속에 양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어린왕자는 표정이 환해지며 "그래! 이거야!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라며 "이 양에게는 풀이 많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상자를 보며 "양이 잠들었다!"라고 말하는 이 천진난만하고 상상력 풍부한 친구가 바로 어린왕자이다.
비행사는 어린왕자와의 대화로 책을 이어간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사는 곳은 "아주 작다"라고 여러 번 말하며 살짝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몇 번씩 보인다. 어린왕자와의 대화로 비행사는 어린왕자의 별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한다: 1) B-612라는 행성일 가능성이 큰 별이며 2) 그 별에는 양이 있고 3) 장미도 있고 4) 한때는 바오밥씨앗이 엄청 많았다. 바오밥나무는 굉장히 커서 그냥 자라게 놔두면 별 전체를 뒤덮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린왕자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장미나무와 바오밥나무는 어릴 때 아주 닮아있어서, 두 나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즉시 바오밥나무를 전부 다 뽑아주려는 노력을 줄곧 해야 했던 어린왕자이다.
어린왕자가 사하라 사막으로 오게 된 첫 계기는, 그렇게 아끼던 장미와 관계가 틀어지고 행성을 떠날 준비를 한 이후부터 이다. 어린왕자는 슬픈 마음을 삼키며, 마지막 남은 바오밥나무의 어린싹을 뽑아내고 장미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 이후에 소행성 325, 326, 327, 328, 329, 330을 돌며 이상한 경험들을 한다. 이런저런 행성들은 우리 사회에서 낭만을 잃어버린 어른들의 일부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지구는 어린왕자가 일곱 번째로 방문한 별이었다. 어린왕자는 한동안 길을 잃은 채 방황한다. 여기서부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구간이 나오는데, 이렇게 길을 잃다 어린왕자는 5천 송이가 넘는 장미꽃이 만발해 있는 정원에 도착한다. 그 꽃들을 발견하고 대화를 나누던 어린왕자는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의 행성에 있던 그 꽃이 항상 말해왔기 때문이다. 자기는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이라고. 이 상황에서 어린왕자에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만일 이 광경을 본다면, 내 꽃이 매우 난처해할 텐데... 어쩌면 심하게 기침을 해대며 비웃음을 사지 않으려고 아예 죽는시늉을 할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꽃을 정성껏 돌봐주는 척을 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꽃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을 가졌으니 내가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꽃이 그저 평범한 꽃에 불과하다니! 내 별에는 평범한 장미 한 송이와 무릎 높이밖에 안 되는 화산 세 개가 전부야. 게다가 그중 하나는 영원히 꺼져 있을지도 모르고... 이래서야 내가 위대한 왕자라고 할 수 없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민망해할 꽃에 대한 마음이 보이는 한편, 그 꽃이 자신에게 "왜" 중요했는지 알게 되며 자괴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 꽃이 말한 대로 믿던 어린왕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을 가졌으니 그 꽃 덕분에 자신이 "그나마" 위대한 왕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꽃과 나눈 교감도 중요했지만,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그 꽃의 역할도 중요했던 것이다. 이제 그 꽃은 어린 왕자에게 "평범한 장미 한 송이"가 되어버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린 왕자는 잔디 위에 엎드려 슬피 울기 시작한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우가 나온다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 책을 수십 번 넘게 읽은 나에게 여우는 그 어떤 책의 위인보다 더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너무 슬프니 여우에게 같이 놀자고 한다. 이때 여우가 기가 막힌 말을 한다.
"난 너와 함께 놀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고민에 잠긴 어린왕자는 자신은 친구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길들인다'는 건 무슨 뜻인지 물어본다.
여우는 그것이 바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어린왕자가 나에게 오랫동안 까먹고 있던 인간관계의 기본을 다시 가르쳐준 부분이다.
관계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넌 아직 다른 수십만의 어린이와 다를 게 없는 어린 소년에 불과해. 그리고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너 또한 내가 필요하지 않고 말이지. 너에게 난 그저 다른 수십만 마리 여우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하지만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나에게 넌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재가 될 테고, 나 또한 너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될 테니까..."
여우는 곧 어린왕자에게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귀여운, 인간관계 시작의 정석을 어린왕자에게 설명한다.
"처음엔 내게서 약간 떨어져 이 풀밭에 앉아 있는 거야. 그러면 난 곁눈질로 널 바라볼게.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란 오해의 씨앗이니까. 그러면서 넌 날마다 조금씩 내 가까이 다가앉으면 돼."
다음날 여우에게 다시 온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꿀팁을 알려준다.
"항상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겠어. 예를 들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난 점점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되면 걱정도 되면서 흥분도 돼서 안절부절못하겠지. 행복의 값어치를 알게 되는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온다면 나는 몇 시에 널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잖니... 적절한 의식이 필요해."
이렇게 어린왕자는 여우를 길들였지만, 결국 여우를 떠날 때가 되었다.
떠나기 전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정원의 장미꽃들을 다시 가서 보라고 한다. 그러면 "네 장미꽃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 나온다.
다시 5천 송이가 넘는 장미꽃들이 있는 정원에 간 어린왕자는, 그 장미꽃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꽃과 전혀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너희를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또한 마찬가지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내가 처음 여우를 만났을 때도 너희와 똑같았어. 그때 그 여우는 다른 수십만의 여우들과 다를 게 없는 한 마리의 여우에 불과했지. 하지만 내가 그 여우를 나의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여우가 되었어.
너희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무의미해. 누구도 너희들을 위해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나의 장미도 너희들과 똑같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내게는 그 꽃 한 송이가 너희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소중해. 왜냐하면 내가 물을 준 건 그 꽃이기 때문이야. 내가 유리관을 씌어준 것도 그 꽃이고, 바람막이를 쳐준 것도 그 꽃이며, 내가(나비가 되라고 구해준 두세 마리를 제외하고) 애벌레를 잡아다 준 것도 그 꽃이었기 때문이야. 푸념을 늘어놓거나 뽐낼 때, 그리고 심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귀를 기울여준 건 그 꽃이었어. 그건 내 장미꽃이었으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흔하게 잊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본질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우리 모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소수의 사람들과 만들었던 역사 - 서로를 길들였던 그 순간들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여우에게 찾아간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비밀을 말해준다.
그 비밀은 바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덧붙인다. "사람들은 이 같은 진리를 잊어버렸지만 넌 그걸 잊으면 안 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넌 너의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라고..."
이 왕자의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
처음 5천 송이의 장미정원을 발견했을 때 왕자는, 장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장미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너무 슬퍼 엎드려 울던 친구였다. 하지만 이제 장미가 어린왕자에게 주는 의미는 거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장미가 의미 있는 이유는, 어린왕자가 그만큼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과 마음, 정성 때문이다. 자신이 의미를 투여한 만큼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 때문에 <어린왕자>라는 책은, 자신의 옆사람이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권태기를 지나가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린왕자는 곧 이 비행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아저씨가 사는 별에서는 정원 하나에 장미를 5,000송이나 키우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있어." 비행사는 어린왕자와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건 단 한송이의 장미꽃이나 한 모금의 물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거야."
어린왕자와 비행사가 말한 대로, 우리가 이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살며 결국 갈망하는 것은 '의미를 둘 그 무언가'이다. 우리는 사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진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나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왕자>는 여우와의 작별 이후, 비행사와의 작별로 이어진다. 자신의 별을 떠난 지 1년이 되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길이 너무 멀고, 너무 힘들 것이라 무서운데도 어린왕자는 없는 기운을 내며 이렇게 얘기한다. "난 그 꽃을 책임져야 해. 그 꽃은 너무 연약해! 또 너무 순진하기도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 네 개를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이 줄거리를 얘기하는 동안, 얘기하지 못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어린왕자와의 대화 중, 비행사는 양이 장미를 먹어버리지 않게 양을 매어줄 가죽 끈을 그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린왕자가 자신의 별에 가기 전, 그 약속을 까먹고 그려주지 못했다.
양이 장미꽃을 먹어버렸을 까 걱정하는 비행사는 곧,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린왕자가 매일 밤, 꽃에게 유리 덮개를 덮어 줄 거야. 또 양도 잘 감시할테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면 모든 별들이 비행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준다고 한다.
하지만 "한두 번 방심할수도 있지.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인데! 어린 왕자가 어느 날 저녁 유리 덮개 씌우는 걸 깜박 잊는다거나, 양이 밤중에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간다면..."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모든 별들이 눈물방울로 변해버리고 만다고 한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수수께끼라고.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양 한 마리가 저 하늘 어디선가 한 송이 장미를 먹었는가 아니면 먹지 않았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이 천진난만하지만 심지 굳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장미가 양에게 먹혀버렸다면, 그 작은 어린왕자는 얼마나 아플까?
이게 왜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를 못 한다면, 당신은 이미 낭만을 잃어버린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