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한통으로 돈 아끼기
미국에 오래 살다 보면 이런 표현을 꽤 쉽게 접하게 된다. "It never hurts to ask" 혹은 "You have nothing to lose by asking" - 물어봐서 잃을 건 없다는 표현이다 (한국에도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나만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네고(negotiate)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마인드에서부터 나온 것 같기도 한데, 최근 내 경험을 기록하고 싶어서 브런치를 켰다.
5월에 샌프란 안에서 아파트를 이사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일단 샌프란에 계속 있을지, 한국으로 갈지 혹은 샌프란보다 더 밑에 있는 마운틴뷰, 팔로알토, 써니베일이 쪽을 통째로 일컫는 사우스베이 (South Bay) 지역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정말 안전한 지역에 월 $1,800 이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 sublease(전대)를 받는 기회가 생겼는데,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과연 다음 13개월을 또 같은 도시에서 살지 확실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기존에 월세자로 있던 친구가 다른 아파트로 옮기면서 들어가는 상황이라서, 이 임대차 계약서 (lease agreement)에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A) 13개월에 묶이지 않고 $2100을 내는 옵션, (B) 13개월에 묶여 $1800을 내는 옵션이 있었다. 꽤나 큰 차이라서 직업병이 있는 나는 바로 계약서 파괴 시 (lease termination) 얼마를 내야 하는지 적혀있는 조항을 읽었다. 2달어치 월세였다. $3600이라. 샌프란에 언제까지 계속 거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아파트로 들어간다는 것은 혹시나 떠날지 모르는 상황을 위해 내가 흡수하는 부담이 매달 $300불 정도였던 것이다 (A 옵션에서 $300, B 옵션으로 계약 파괴시도 거의 300 ($3600/13 = $276.92)).
이 상황에서 나는 임대인 쪽에 이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전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한테 sublease를 해주던 친구에게 내가 계약서 수정을 요구하면 들어줄 것 같냐고 물어보니 그 친구도 아마 안 해줄 거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1,800은 이 지역에서 믿을 수 없는 숫자인데 괜히 일을 더 만드는 게 아닌가 고민도 들었다. 그냥 빨리 옵션 하나 고르고 싸인하는 게 훨씬 더 편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단 물어봐서 잃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안 해주면 안 해주는 데로 받아들이지 뭐, 라는 생각에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곧바로 들어갔다가 해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돈을 못 내서 요구하는 상황은 아닌데, 지금 실리콘밸리의 마켓이 불안정하니까 여기서 조금 자비를 베풀어 주어서 계약서 파괴 시 내야 하는 돈을 두 달어치 월세가 아닌 한 달어치 월세로 바꿔줄 수 있냐고.
다행히 임대인을 대표해 이 아파트를 담당하는 leasing agent들은 흔쾌히 한 달어치 월세로 바꿔주었고, 그것을 토대로 $1,800 렌트에 싸인했다. 아파트를 떠나야 할 때 내야 하는 돈에 대한 부담감은 훨씬 적어진 채로.
(물론 이게 매번 먹히는 건 아니다.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 임대인 쪽은 정말 그 어떤 이메일을 보내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파트에 살던 14개월 중 5개월은 아파트 전체가 공사를 진행했는데 (복도에 있는 타일부터, 카펫, 벽 페인트, 그리고 몇몇 아파트의 발코니까지 때려 부셨다) 입주자(tenant)들이 실질적으로 피해 본 것에 그 어떤 보상도 없었다. 그 5개월 동안 진심 공사장 한가운데서 일하는 것 같은 착각에 들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갈 때도 보통 아파트 주인이 담당해야 할 것을 입주자 책임으로 돌려놔서 그 아파트에서 나가는 비용만 $500이 들었다. 이게 얼마나 정당하지 못했는지 이메일을 썼지만 마치 AI로봇에서 이메일을 써준 듯 한 답을 받았다. 뭐... 그래도 어차피 물어봐서 잃을 게 없었으니, 일단 물어본 것으로 만족한다.)
아파트를 옮기면서 이런저런 서비스를 해지하고 다시 계약을 맺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누구나 알 것이다 (이 동네의 사대장은 PG&E 회사의 전기세, 아파트 (월세 & amenities & utilities) 관리비, 그리고 AT&T 나 Xfinity/Comcast 통신사의 인터넷, Renter's insurance (입주자 보험)이다).
나도 이사를 하면서 AT&T 통신사 회사의 인터넷을 다른 패키지로 바꿔야 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미국은 같은 통신사가 제공하는 와이파이 패키지가 각 지역마다 살짝 달라질 수 있다. 전에 있던 아파트에서는 AT&T Fiber이라는 굉장히 빠른 와이파이 패키지가 있었는데, 이 지역은 그걸 제공할 수 없다고 직원이 설명했고 이 아파트는 그것보다는 한 단계 낮은 와이파이가 최고로 빠른 와이파이로 제공되었었다고 얘기하셨다.
AT&T는 아파트 옮길 때마다 인터넷 설치 또한 따로 돈을 받았는데, 설치비 $99와 인터넷 $55를 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와이파이를 써보니 예전과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느렸다. 로딩 페이지의 속도나, 넷플릭스의 재생이나 화질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려고 하면 몇 분이 걸렸다.
결국 새로 이사 온 지역에서 가장 좋은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어딘지 열심히 찾았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AT&T에서 30-day money-back-guarantee를 마케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30일 안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돈 다시 돌려준다는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나는 예전 아파트에서 AT&T의 와이파이를 쓰고 있었고 새로 옮기면서 패키지만 바꿨기 때문에 "기존고객"으로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돈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어도, 이 정도로 느린 와이파이는 일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Google Fiber로 바꿨다. 여담으로 쓰던 와이파이를 해지하고, 다른 통신사(혹은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집에 누군가 와서 설치하는 예약시간을 잡고, 그날 누군가 집에 와서 셋업 하기를 기다리고, 다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새로운 통신사의 계정을 만드는 건... 역시나 피로한 일이었다.
AT&T에 전화를 걸었다. 와이파이가 너무 느려서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은 알겠다고 하고 어떻게 와이파이 모뎀을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지 설명해 줬다. 그러는 와중에 화면에 떠있는 $162 ($99+55+세금) 정도의 숫자를 보고 있으니 테크니션이 와서 설치를 하는 비용은 이미 나갔다고 해도, 고작 10일 정도 받은 서비스를 위해 $162를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일단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혹시 30-day money-back-guarantee로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지. 직원은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어나갔다. "네, 당연하죠. 그러면 어차피 지금 어카운트에 있는 돈이 아직 신용카드에서 나가지 않았으니 어카운트의 밸런스를 $0로 만들겠습니다."
위에도 썼지만, 이게 항상 먹히는 건 역시 아니다. 그리고 할 때마다 이 단계까지 가는데 어느 정도의 용기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상황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감정적으로는 억울하지만 육체적으로는 훨씬 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그래, 물어봐서 잃는 건 없잖아. You have nothing to lose by as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