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일기 01 - 로펌 안에서의 '나'는, 로펌 전에 세팅된다
내가 다녔던 로스쿨은 한국인들이 정말 없었다. 버지니아 로스쿨은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생소한데, 미국에서는 나름 권위 있는 로스쿨로 백악관에 가서 일을 하려고 하거나 졸업 후 법원으로 가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로스쿨이다. 나는 내가 합격한 로스쿨들의 employment score을 계산해서 이 학교를 선택했다 (그때 당시 상위 80%는 법원으로 가거나 대형로펌으로 간다고 학교에서 매년 ABA에게 내야 하는 리포트에 나와있었고, 나는 "적어도 상위 80%에는 들겠지"라는 생각으로 이 학교를 선택했다. 물론, 학생으로서 뉴욕의 물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뉴욕에 있는 학교들은 미리 배제했다.)
UVA 학부에는 그래도 한국인들이나 동양인들이 꽤나 있다고 들었었는데, 로스쿨에는 정말 없었다. 우리 학년만 해도 Korean American 포함 한국인들은 4명이었고, 한국인 여자는 나뿐이었다. 내 윗 학년에는 한국말을 할 수 있는 한국인은 한 명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동양인들이 없는 학교에서 한국인들끼리 나름 서로 도와주고 정보도 공유해 주자고 설립되었던 게 KALSA (Korean American Law Students Association)였고, 내가 로스쿨을 조인했을 때는 아마 이 동아리가 설립된 3년째 쯤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나름 설날 (lunar new year)이 다가올때는 만두도 빚고, 학기 시작할 때는 APALSA (Asian Pacific American Law Students Association) 학생들도 초대해 작은 파티도 열었었다.
내가 느끼기에 KALSA가 가장 잘한 부분은 LLM으로 어떻게 샬로츠빌이라는 낯선 땅에 한국에서부터 오시게 된 변호사님들을 미국사회에 조금 더 적응된 한국 JD학생들과 어울리게 도와주는 매체가 된 것이다. 실제로 LLM을 하시는 분들은 KALSA 같은 단체 없이는 한국 학생들을 찾기 너무 힘든 상황이다 (클래스에서 앉아서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과연 한국 사람일까?'라고 생각하다 말도 섞지 못하고 일 년이 지나가 버릴 경우가 높다). 나도 어쩌다 이런저런 LLM분들을 만났는데, 기억하기로는 로펌 세종에서 오신 변호사님들은 사실 샬로츠빌을 엄청 좋아하셨다 (주변에 예쁜 골프코스가 정말 많고 골프 연습을 할 수 있는 range도 정말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다). 3학년 때는 한국에서 오신 남자 판사분과는 밥도 꽤 자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연애로 바쁘지 않았다면 더 잘 챙겨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연락드리니 전화까지 주셨다!
내 로스쿨 1학년때는 한국에서 여검사님이 오셨었다. 아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샬로츠빌로 아이와 남편분과 함께 오셨었는데 그때는 사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몰랐었다. 로스쿨 1학년은 사실 법조계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1년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 검사님과 자주 마주쳤었다.
어느 날 나는 로스쿨 도서관 2층에 있는 라운지에 커피를 받으러 갔었고, 검사님과 마주쳤다. 나는 그 시점에 Rosetta Stone 법무팀 인턴쉽에 합격을 하고 1학년 2학기 파이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름에 있을 로제타 스톤 법무팀 인턴쉽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검사님께 얘기하다, 검사님이 한국에서 일하셨던 경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마 검사님은 스쳐 지나가 듯 나에게 말해주셨을 수도 있지만, 그때 하셨던 말씀이 나에겐 일터 관련 꽤나 큰 지표가 되어주셨다.
상사한테 사랑받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보다,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이에요. 특히, 꾸중을 듣거나 싫은 말 들었을 때 그걸 담아놓지 않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면서 해맑게 "안녕하세요!" 이러는 애들이 결국엔 가장 오래 가더라고요.
이 말을 듣는 순간도 인상 깊었지만, 나는 이게 추후에 얼마나 자주 생각날지 몰랐었다.
이 조언의 핵심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 말을 듣기 전에는 나는 일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어떤 식으로 칭찬과 꾸중을 대해야 할지, 일터에서 어떤 일관된 태도가 필요한지 - 이런 것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다. 이런 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검사님이 해준 말은 일터에서 내가 만들 '이미지 세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베이스라인이 전혀 없던 나는 저 태도를 나에게 입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나는 "새벽 4시에 전화해도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는" 어쏘가 되었다. (물론, 이런 태도의 장단점이 있다. 일을 열심히 하려는, 그리고 잘 보이고 싶은 이 마음을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도, 이런 단점을 피하는 노하우도 생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야겠다.)
어쨌든, 나는 주니어 때는 무조건 긍정적인 태도로 시작할 것을 추천한다. 실제로 내가 로펌 1년 차 때 나를 정말 아껴주던 시니어 어쏘는 나에 대해 파트너들에게 "she's good at her work, she's positive, and she's responsive - basically everything you could ask for in a first year associate" 이렇게 얘기하며 소개하고 다녔었다.
물론, 이런 '일관적이게 해맑은 태도'가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닐지라도, 혹시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로펌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고 싶은지, 그리고 '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할지, 다양한 상황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해놓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로펌은 특히나 일이 많은 게 보너스와 바로 연결되고, 어떤 일을 받을지, 어떤 파트너와 일을 할 것인지 생각보다 어쏘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커리어 옵션이 많다. 각자 로펌에서 얻고 싶은 게 다를 수 있지만, 생각보다 미국 로펌에서는 재밌고 다양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수동적인 자세보다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추천한다.
로펌 시작 후 한 달, 일이 생각보다 쌓이지 않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오전 10시에 오피스를 돌며 파트너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하며 "새로 들어온 1년 차다. 최근 파트너님이 하셨던 이런 이런 딜들이 흥미롭다고 느껴졌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음 딜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표현을 할 어쏘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쏘들이 다 바빠진 후, 남은 어쏘 중 하나라서 파트너도 얼떨결에 일을 맡기게 된 어쏘가 되고 싶은가?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파트너들에게 더 많이 받을 수 없다고 알릴 것인가? 일은 내가 다 했는데 나랑 같이 일한 어쏘가 마치 자기가 다 한 것처럼 파트너들에게 얘기하고 다니면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가? 방금 보낸 이메일에 오타가 있으면 어떡할 것인가? 심지어 클라이언트한테 보낸 문서에 오타가 있으면 어떡할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미리 생각해 놓고, 스스로에게 매뉴얼을 만들어 놓는 게 좋다. 그리고 결국 이 매뉴얼은 로펌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로펌 전에 이미 형성된 나의 성격과 성향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앞으로 올 모든 경험들이 그렇듯, 로펌 전에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내가 경험하는 로펌 또한 달라진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