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펌에는 군기가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최고의 조언들 4

by 봄바람

2018년의 날씨 좋은 10월 3일, 변호사로서 첫 직장에 입사했다.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영화에서도 가끔 나오는 빌딩에 정장 스커트를 입고,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메고 배지를 찍는 느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이런 곳에 근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나름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이였다.


그날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총 21명이었는데, 그중 반은 소송 업무를 맡을 동기들이었고 반은 자문 업무를 맡을 동기들이었다. 이때 뉴욕 오피스는 전체적으로 자리 배정 도면을 다시 설계하는 중이었어서 1년 차 기업 자문 어쏘(corporate associate)들은 금융 자문 어쏘 (finance associate)들과 금융 자문 팀 사이에 몇 달간 같은 층에서 머물렀다.


아무리 대형로펌이어도 첫날부터 일이 넘쳐나지는 않았고, 나는 일을 받기 위해 기업 자문 층에 가서 아침 혹은 오후에 파트너들의 거동을 살피며 그들이 바빠 보이지 않을 때 인사를 돌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금융 자문팀의 어느 8년 차가 본인 층에서 일하고 있는 금융/기업팀 1년 차들을 전부 집합시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본인이 어제 금융팀 1년 차에게 일을 주려고 했는데, 그 1년 차가 일을 거절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8년 차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이유라도 일을 거절한다면, 파트너가 새벽 12시에 오피스를 걸어 다닐 때 그 1년 차가 오피스에서 미친 듯이 일하는 광경을 발견해야 한다 (If you’re rejecting work, you better be here at midnight when a partner is making rounds doing a hallway check.)” 쉽게 말해, 다른 일 때문에 미친 듯이 바쁜 게 이유가 아니라면 일을 쉽게 거절하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일은 쉽게 거절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8년 차의 평판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4년 뒤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 나는 군계질서가 거의 없는 것처럼 알려진 미국 문화에 비해 본인 권한으로 1년 차들을 모아놓고 훈수를 두는 8년 차를 보며 꽤나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사실 그때 그가 했던 말들은 정말 로펌 문화에 대해 나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 8년 차도 좋은 마음에서 (화가 나셨기도 했지만)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미국에서 어쏘들이 본인의 선임들의 일을 거절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고, 보통 한 달에 클라이언트 일로 200~300시간을 꽉 채워야 ”내가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더 많은 일을 못 받을 지경이다“라는 유일한 이유가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도 점점 경력이 쌓이면서 같은 꼰대 기준으로 주니어들을 대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혹은 “라떼는 그랬기 때문에“가 아니라 1년 차들이 연봉 22만 5천 달러를 받는 이유가 그들이 어려운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선임이 부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대기 상태 (availability)에 매겨지는 가치라는 것을 내가 1년 차 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녁 10시나 11시, 심지어 새벽 4시에 전화받는 게 그 어떤 돈으로도 환산되지 않는다고 판단이 선다면 떠나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면 - 그리고 적어도 당분간은 일할 계획이라면 - 로펌이 본인에게 매달 지불하며 투자하는 금액도 결코 적지 않으며, 거기에 따르는 책임감은 무엇인지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국 로펌을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 Suits에서 나올만한 씬이긴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틱한 연출은 이 사건이 유일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