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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초 Aug 22. 2023

전역 후 다녀온 병주고향(幷州故鄕)

1. 나에게도 기대고 싶은 품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眼中人)


23개월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그토록 고대하던 전역을 했다.


바다에서 귀한 물고기를 건져 올려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는 어부처럼 들떠 돌아온 집에는 반겨주는 이 없이 어둡고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불을 켜고 함께 기쁨을 나누어줄 사람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나 전역했어, 오늘 시간 돼?"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복학 정보, 사회 이슈, 성별 간 대립 등 들어도 와닿지 않는 당시의 논란거리들을 들으며 과잉된 정보로 인한 피로감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참 남의 삶에 관심 많으면서도 "너한테 전혀 관심 없는데?"식의 태도를 취하는 모순적인 한국의 분위기에 기괴함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고 택시에 몸을 맡겼다.


시간이 흘러 복학을 했다.

피땀 흘려 받은 쥐꼬리 만한 군월급에서 한푼 두푼 모아 온 적금은 만기 후 대학교 등록금 납부에 보태었고, 새벽에는 술집 알바, 저녁엔 가끔씩 가벼운 중어 통역을 겸하며 낮에는 정신 차리고 대학 공부에 매진하는 삶의 반복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직장을 이유로 중국에 남아 생활하고 계셨기에 군 입대/전역 기간을 포함하여 총 4년은 못 뵌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아들 잘 지내고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 마세요."라며 마치 장성한 사내처럼 큰소리 내었지만, 내심 나에게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느끼고파 아려오는 서글픈 마음에 어머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여름이 식어갈 무렵 1학기가 끝나고 드디어 종강이 찾아왔다. 곧바로 중국 입국을 위해 비자를 진행하고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그렇게 밭은 걸음으로 홀로 어머니를 뵈러 나의 병주고향(幷州故鄕) 칭다오로 향하였다.


칭다오 공항 입국 절차


잔향(余香)


초, 중, 고등학생 때는 혼자서도 잘만 왕복하던 인천공항과 칭다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것이 아니라면 성인이 되고 대학, 군대, 사회를 비롯하여 여러 공동체에 얽히고설키며 치여 지내온 탓일까? 생각하다 곧 비행기가 착륙했고 위화감은 한 낱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향기로 기억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계절, 이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고유한 감각의 기억과 여운.

신경 쓰이지 않을 기억조차 다가올 때는 진한 향기로 흔적을 남기니

그것은 진한 그리움이 되기도 또는 성숙함이 되기도…


찰나에 잊지 못할 추억의 잔향이 공항 곳곳에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과감하게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혼잡함과 질서가 공존하는 바깥 교통 상황을 보며 내내 추억에 잠겼다.


늘 심상하게 스쳐 지나쳤던 평범한 풍경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그 시절의 내가 보고도 보지 못했던,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의 민낯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칭다오이나, 단 한 번이라도 이곳을 '풍경'으로 마주 바라본 적이 있을까.


은은하게 스며드는 따스하고 노곤한 잔향과 정이 있는 동네,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질박한 웃음과 정직한 풍경은 지난날 한국에서 맡던 차갑고도 냉정한 서울의 공기와는 달랐다.


더욱이 암묵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났기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살던 주소지에 도착했다. 한인과 중국인들이 주로 사는 곳을 한국성(韩国城)과 중국성(中国城)으로 나눈 이곳은 통합 티엔타이(天泰)라는 아파트 단지이다.


아직 퇴근하지 않으신 어머니를 기다릴 겸 집에 짐을 두고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 시간쯤이면 마트에 한인들이 자주 보이곤 했는데, 현재는 거의 다 빠졌는지 중국인들 뿐이 못 봐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진해 해군 훈련소 시절 사진


비바람


탁상 앞에는 천주교 목걸이와 함께 나의 훈련소 사진이 인화되어 놓여 있었다. 사진을 보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항상 기도해 주셨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혼자 진해에 내려가 모텔에서 묵고, 식사는 편의점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운 뒤 쓸쓸히 입대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님께 절하는 입대 절차에 나는 허공에 절을 하였고, 부모님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에는 가만히 서있기 싫어 열심히 부모님을 찾는 척했다.


동기들은 수료날 오신 부모님과 부둥켜안고 있을 때, 나는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영상통화를 걸었다. 작은 화면 속 눈물 훔치시는 어머니를 보며 "아들 건강하게 수료했으니 걱정하지 마셔요"라며 북받치는 감정 억누르며 떵떵거렸고, 전화를 끊고 가족들과 식사하는 동기들을 뒤로한 채 혼자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잔인한 현실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되어주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하게 여긴다. 그 시절을 겪었기에 절실히 느끼며 얻은 감정 또한 소중한 성품적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퇴근하고 집에 오셨다. 가족임에도 몇 년에 한 번 밖에 못 뵙는 나의 어머니.

무사히 전역 잘하고 어머니 뵈러 왔다고 절 한 번 올리니 징그럽다 하시면서도 활짝 웃음 지으셨다.


너도 이제 다 컸구나.


어머니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깊고 긴 대화를 마치고, 홀로 밖을 나와 자주 가던 동네 꼬치집을 들렀다.

어머니가 출근하시고 나면 그 시간 동안 오랜만에 칭다오를 돌아보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자세히 알아보니 그때는 몰랐던 칭다오의 다양하고 매력적인 관광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중국 지도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교통편 검색을 마쳤다. 당장 다음날부터 홀로 칭다오 거리를 거닐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 찼던 첫날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힘들고 고독한 기억이 자신을 괴롭힐 때가 종종 있다면 꼭 깨닫길 바란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서 예쁘게 키워진 화초보다,

야생에서 정말 비바람 맞으며 강하게 자라온 들꽃이 더 향기도 좋고 아름답고 억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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