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위한 도시락
아내가 없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까. 결혼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괴롭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고 간절할 수 있었다. 쉽게 얻은 것은 소중함도 덜했다. 서로에게 성숙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 결혼 예비 학교라는 곳에 갔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존재에 대해 곱씹고, 가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거기에 가서는 안 됐다.
결혼 예비 학교의 첫째 날 강의 주제는 '나는 결혼하면 이런 배우자가 되겠다'였다. 배우자를 위해 어떤 것을 해줄 것인지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매일 아침 식사를 차려주는 자상한 남편이 되겠다.' 강사는 내가 쓴 종이를 뽑아서 사람들 앞에서 읽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쓴 건 무리수였고 패착이었다.
결혼을 한다니까 직장의 한 선배가 다소 황당한 조언을 해주었다. 한마디로 빙신, 팔푼이로 살라는 것이었다. "괜히 이것저것 잘하는 척 잘난 체하다가는 평생 네 일이 된다." 형광등 하나 못 갈고 설거지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자를 연기하고 살라는 얘기였다. '에라, 이 한심한 인간아.' 속으로 선배를 경멸하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에 그렇게 계산적으로 살 필요 있나요." 결혼하고 나서 밥을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초창기에 아내가 요리를 한 적도 있었다. 몇 번 하더니 내가 만든 게 더 맛있다며 요리에서 아주 손을 뗐다.(근데 왜 설거지도 안 하는 건데!) 군대 있을 때 취사병이었다. 군에서 요리를 처음 배웠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적성에 맞았다. 어떤 이는 남이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행복했고, 누군가는 남을 위해 요리를 만들 때 행복했다. 나는 후자였다.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고 칭찬 한 마디 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선배의 말대로 나대는 게 아니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겸손할 줄을 몰랐다.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식사는 챙겨 먹어야 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무얼 먹는 게 부담스러워 빈속으로 출근하는 게 편했다. 아내는 아침밥을 차려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얼마 후 학교 급식이 먹기 싫다며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다. 아침밥을 차려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해 그러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방학 때만 빼고 3년 7개월 동안 매일 도시락을 쌌다. 진미채 볶음, 계란 장조림, 멸치 볶음, 어묵 볶음, 콩나물 무침, 무생채, 감자채 볶음, 계란말이, 삶은 브로콜리, 두부조림, 계란찜, 오이 무침... 안 만들어 본 반찬이 없었다. 아내는 양심이라는 걸 잃어버린 건지 이틀 연속 같은 반찬을 싸면 초심을 잃었다며 나를 나무랐다. 장모님은 장가를 잘못 들어 고생이 많다며 가끔 밑반찬을 보내 주시기도 했다. 퇴근할 무렵이 되면 오늘은 또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되나 고민이 됐다. 도시락을 싸는 것 자체에 대한 성가심도 힘들었지만 메뉴 선정은 늘 부담이었다. 도시락 싸기에 지칠 때면 결혼 전 조언을 해준 선배가 생각났다. 그분은 감히 나 따위가 경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위대한 현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결혼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처가에서 연애하는 것을 알고부터 줄곧 반대가 있었다.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낙관했으나 착각이었다. 추석에 선물을 들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 장인어른께서는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며 헤어질 것을 종용하셨다. 정중하면서도 사뭇 단호해서 준비해 온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와이프는 옆에서 연신 눈물만 흘렸다. 그 소리가 너무 구슬퍼서 가슴이 아렸다. 부모 마음은 더 찢기어 갈라졌겠지만. 부모님의 일방적인 뜻 앞에 모질게 반항 한 번 못하는 착한 딸이라 더욱 애처로웠다. 삼 년이 넘는 지난하고 심산한 시간을 보내며 지친 적도 있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내 욕심으로 인해 나의 부모님께도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는 처음 인사 드리러 갔던 날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리도록 아픈 마음을 혼자 감내하고 내색하지 않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녀가 건넨 단단한 신의 때문에 먼저 단념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힘들어서 자기가 손을 놓겠다고 할 때까지 그녀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또 다짐했다. 해가 바뀌고 다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나를 대하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마음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결혼을 승낙하시자 이전에 품고 계시던 고집은 무한한 신뢰로 모습을 달리했다. 어쩌면 가슴 한편에 남아 있을 미안한 마음은 이제는 더 깊은 애정으로 표현되는 것 같았다. 그녀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시간은 때론 막연하고 가슴 먹먹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와 난관은 외부에서부터 찾아온 것이었고, 그녀는 요동치 않고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다소 사납고 호전적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도시락 반찬을 만들었다. 내일 메뉴는 깻잎장아찌와 마파두부, 황탯국이었다. 때로는 불평하며 앓는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를 위해 도시락을 싸는 시간은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