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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산책 사랑

산책의 효능

by 아옹다옹하다

아내가 그토록 산책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강아지를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직장 선배가 키우는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새끼를 낳았다. 사진을 보여줬는데 단번에 마음을 흔들 정도로 귀여웠다. 아내에게 사진을 전송했더니 역시 한눈에 반했는지 새끼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처가에서는 이미 두 마리의 강아지를 마당에서 키우고 있었다. 처가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라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식사를 하거나 강아지 산책을 시키러 가곤 했다. 선배는 달라는 사람이 많고, 병으로 죽은 새끼도 있어서 상황을 보고 가능하면 준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얘기가 없길래 안 되는가 보다 하고 단념했다. 아내는 틈만 나면 강아지 노래를 부르며 다시 한 번 부탁해 보라고 했다.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두 마음을 품으면 일종의 배신이라며 데려오지 말자고 했다. 항상 케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처가에 맡겨 놓고 보고 싶을 때만 가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얌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모님이 리트리버 새끼 사진을 보시더니 너무 예쁘다며 언제 가져올 거냐고 거들었다. 선배에게 넌지시 새끼들 잘 크고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러 퇴근 준비를 하던 어느 날 귀띔도 없이 박스에 담겨 앙증맞은 리트리버 새끼 한 마리가 찾아왔다. 소처럼 크고 순진한 눈망울이 얼굴을 한없이 가련하게 꾸미고 있었다. 도둑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집 구석구석을 안내한다더니 역시나 처음 보자마자 찰싹 안겨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아내는 백치마냥 헤벌레 웃으며 실실거렸다. 여보, 원래 강아지 이렇게까지 좋아했어? 아내는 새끼를 품에 안고 셀카를 찍느라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강아지의 이름은 우리라고 지었다. 아내는 틈만 나면 우리를 산책시키러 가자고 졸랐다. 성장 속도가 빨라 매일같이 가서 보는데도 갈 때마다 다르게 자라 있었다. 그녀는 야근을 하는 날엔 저녁 시간에 잠깐 나와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일터로 돌아갔다. 시골이라 8시가 넘으면 캄캄했으나 손전등의 불빛으로 어둠을 뚫으며 산책을 강행했다. 사실은 조금 버거웠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아내를 보며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겐 선택할 수 있는 힘과 권리 자체가 없었다.


산책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길을 걸으며 마주 다가오는 바람을 느낄 때 시원한 바람결에 내 안에 노폐물이 씻겨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마치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높은 산의 정상에서 탁 트인 전경을 마주할 때처럼 안에서 정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우울증 환자에게 산책은 약물 치료를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만드는 호르몬을 억제하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한다고 했다. 의학적으로 몸을 건강하게 하는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마음을 치유하는 더 강력한 효능을 갖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 처음 허리 디스크가 터졌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재활 운동을 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혼자 서지도 못하고 119에 전화를 해서 병원에 실려갔다. 열흘 정도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 암담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성경의 욥기 서를 읽으며 불현듯 나를 찾아온 고난에 대해 낙심하고 또 부정했다. 담당 의사는 수술 없이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로 충분하다고 했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퇴원하고 밤마다 매일 집 근처 효창공원을 1시간 이상 걸었다.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는 잡념과 근심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걷는 날도 있었고, 여러 가지 잡스런 생각과 낙담한 마음을 간추리고 다스리던 날도 있었다. 산책과 글쓰기는 효능적인 면에서 굉장히 비슷했다. 글을 쓰며 내면의 나와 조우하듯 산책 역시 산산이 조각난 자아를 회복시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산책은 나를 질병과 절망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었다. 누군가와 같이 걷는 효과도 탁월했다. 아내와 산책을 자주 했다. 우리를 데려오기 전에는 주로 아파트 단지 주위와 동네를 가볍게 걸었다. 심신이 지친 날은 밖에 나가는 것도 싫고 대화할 힘도 없어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려고만 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체중계 위에 몰아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화와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 나란히 걸으면 이런저런 속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공유하기도 하고 미래상을 함께 그리기도 했다. 산책이 없었다면 말로 꺼내지 않고 혼자 담고만 있었을 진심이 술술 새어 나와 우리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강아지 산책을 위해 처가에 끌려 왔다. 어쩌면 아내는 내게 목줄만 안 채웠을 뿐이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걷게 하기 위해 데려왔을지도 몰랐다. 산책 가기 위해 서랍에서 목줄을 꺼내면 강아지들이 눈치를 채고 방방 뛰며 포효했다. 아내는 내게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데 산책시키기 싫어한다며 면박했다. 목에 줄을 채우자 녀석들이 총알처럼 강력한 힘으로 튀어나갔고 나는 개처럼 끌려갔다. 먼발치에서 장인어른이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에서 '어휴, 저 불쌍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머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여보, 저기 하늘 좀 봐. 무지 개 같네. 갑자기 언어유희가 하고 싶어 머릿속으로 문장을 지어내 보았다. 장인은 인자함의 장인이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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