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희 엄마
엄마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윽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연인을 대하듯 사랑스럽게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뭇 경건해 보여서 마치 종교를 대하는 것 같았다. 조물주가 진흙으로 최초의 인류를 빚을 때처럼 정성스럽게 키패드를 누르고 있었다. 엄청난 집중력은 뇌가 귀에 보내는 신호까지 무색하게 만들어 애타게 리모컨을 찾는 아버지의 외침도 허공에만 맴돌 뿐이었다. 육십 넘은 여편네가 이제 와서 그런 건 뭐 하러 배워! 고작 핸드폰에게 반려자를 빼앗겨버린 남자는 퉁명스럽게 아내를 타박했다. 백 살까지 살려면 아직 한창인데, 난 다 배우고 말 거야!(그렇다. 엄마는 백 살까지 살 계획이다. 지금 기세라면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최신 휴대폰의 기능을 묻는 엄마의 질문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상하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사실 아버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장해서 화를 내는 중이었다. 그만큼 엄마의 수준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엄마는 급기야 카카오톡 어플의 개정을 만들더니 모든 대화를 카카오톡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냥 방 문을 열고 말하면 될 것도 메시지를 이용하는가 하면, 아주 사소한 일들, 굳이 메시지를 통하지 않아도 될 대화가 전파를 타고 이루어졌다. 퇴근하면서 냉이랑 달래 좀 사 오너라. 봄에는 제철 나물을 먹어야 한단다,부터 시작해서 아직 니 아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기본이고, 회식이 있더라도 술을 다 받아먹지 말고 몰래 컵에 버리거라, 등등. 엄마는 지금 신이 나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흥이 많은 사람인지는 몰랐다. 마치 엄마의 속에 숨겨지고 억압되었던 무언가가 통신을 통해 마구 분출되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대면해서는 물론이고 글로도 마찬가지였다. 과묵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고 침묵은 스스로 쌓은 자산이었다. 상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익힌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유년의 나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어른 앞에서 유도신문을 받곤 했다.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영리한 질문으로 아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기만하는 어른 앞에서 매번 알몸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마주한 누군가에게 속내를 들켜버리는 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상대의 미소를 보는 순간 이미 게임에 진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입을 봉하는 것뿐이었다. 무심한 척 표정을 지우고 말에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아야 지지 않는 줄 알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랬으니 내가 배운 표현의 방식이 얼마나 삐뚤어졌는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감정 표현이 미숙한 것은 집안 내력 탓도 있었다. 대대로 딸이 귀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사 형제 중 둘째였는데, 큰아버지는 아들만 세 명을 낳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출산한 고모도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용하다는 점집에 찾아가 거액의 복채를 주고 딸을 낳을 수 있다는 이름을 받아왔다. 다들 돌림자를 쓰는데 내 이름만 ‘상희’인 탓에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날엔 괜한 소외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차남의 첫째 또한 아들이란 비보를 전해 들은 할아버지는 그날 막걸리를 두 말이나 받아 마셨다고 한다. 유독 곁을 주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가슴에는 늘 서운함과 실망감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가엾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도 하다. 연년생인 남동생은 심지어 할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맞기도 했다니까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일 것이다. 어쨌든 명절에 대가족이 다 모여도 사촌 형제들과 나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 말 없이 티브이만 볼 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들 과묵한지. 만약 누군가가 티브이를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추석에도 큰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상희야, 비 오는데 어떻게 운동을 하니. 조심하거라! 상희야, 오늘을 감사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열심히 살자꾸나! 상희야, 친구를 잘 사귀고 자존심을 지키거라! 엄마는 꼭 첫 문장에 내 이름을 불렀다. 간절한 당부와 염원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의 가여운 욕망에 비롯해 세상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내 중성적인 이름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엄마를 상희 엄마라고 불렀다. 온통 남자들뿐인 집안에서 엄마는 한 줌의 공감과 이해도 없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 데도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며 어떻게 가정을 지켜냈을까. 엄마와 내가 가진 다른 의미의 침묵을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으로 보내는 고백이었다. 답장이 왔다. 상희야, 엄마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