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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gbi Mar 28. 2022

16일차_싫은 날

통장이 비어간다. 문서작업 단순알바자리가 있어서 한다고 했다. 돈이 급했다.


알바 말고 정식으로 일해보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의 표현이 어렵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나를 지켜주자고 약속했잖아. 좋게 에둘러 거절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한다고 했다가 못하겠다고 번복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하고 싶냐고, 좋은 기회라고 말해줬을 뿐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제안을 주신 선생님껜 감사했지만 이전에 제안주신 일과 비슷한 일을 하다가 겪은 불상사가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머릿속은 엉터리 수식들로 복잡해진다. 


옆에서는 고양이가 운다. 눈치 없이 자기랑 놀아달라고. 고양이 장난감을 산다고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을 거의 다 썼다. 필요하다는 건 다 샀는데도 살 게 계속 생긴다. 장난감도 금방금방 질려해서 싼 걸 여러개 시킨다. 살 돈이 없을 때는 박스를 모았다가 만들어준 적도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절대로 혼자서 놀려고 하지 않는 1살 짜리 아기고양이는 하루종일 나를 붙잡고 늘어진다. 무시하면 쳐다볼 때까지 갖은 소리를 내며 운다. 마지못해 놀아주기 시작하지만 몇 번 놀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다시 불만이라는 듯 손등 발등을 깨문다. 뜻대로 안되면 허공에 뒷발팡팡질을 해대며 시위하고 오버그루밍을 하며 반항한다. 


니 장난감 하나라도 더 사줄려고 일하는 거잖아! 혼자 놀라고 셀프 장난감 만들어줘도 갖고 노는 시늉도 안해, 팔다리 부서져라 놀아주면 재미없다고 노려봐, 새 장난감 사줄려고 일하면 옆에서 놀아달라고 징징거려, 뭐 나보고 어쩌라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고양이가 뭘 알겠는가. 방에서 조용히 내쫓는다.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넘겼을 일인데. 오늘따라 하나하나 예민하고 힘들다. 하루종일 해야할 일들에 시달라고 마침내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쓸 수가 없었다. 1시간 동안 멍때리며 귓전을 맴돌다 흘러가는 음악만 들었다.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지? 오늘따라 싫은 날이라고, 솔직하게 말해볼까. 하지만 징징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럼 나는?


오늘따라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남자친구는 멀리서 걱정할 것이다. 친구들은 본인 일도 감당하기 벅차고 우리의 대화는 각자의 이야기로 겉돈다. 혼자서도 잘 해내야 하는데. 그게 어른인데. 내 나이는 어른이 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나는 왜 자꾸 휘청이나. 나는 왜 똑바로 말도 못하나. 나는 왜 자꾸 휘둘리나. 


그렇다고 울고 싶지는 않다. 그냥 밖에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오랜만에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이런저런 공상이나 늘어놓고 싶은데, 코로나 무서우니 나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당부를 끝내 어길 수가 없어서 결국 오늘도 내 방이다. 나만 아프면 상관 없지만 다같이 걸리면 멸망이다. 농사 짓는 사람은 며칠씩 격리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은 제일 농번기니까. 조심해야 한다. 조심해야 되는 거 아는데,



그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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