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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22. 2020

에이 아이 리뷰

진짜 동화를 찾아서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갑작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데이빗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후반부, 하비 박사를 만난 이후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데이빗은 침수된 맨해튼으로 뛰어든다. 잠시 후 물속을 떠다니던 데이빗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이 이상한 쇼트. 이 쇼트는 시점 쇼트가 아니다. 카메라 너머에 누군가가 있지도 않다. 게다가 지금 데이빗은 관객인 나를 바라보는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도 데이빗은 카메라를 보며 무언가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웃고 있지 않은가. 데이빗은 물속에서 빠져나온 뒤 지골로에게 푸른 요정을 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객은 푸른 요정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관객이 푸른 요정인 것도 아니다. 데이빗은 어떻게 요정을 본 것인가? 스필버그는 왜 카메라 너머에서 요정을 창조한 것인가? 


1. 영화는 감각하는 것이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지금 내 눈 앞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향연. 그것이 영화이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보고 들을 때 비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화는 결국 인간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매체이다. 물론 프레임 바깥이나 결말 이후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은 관객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나 그러한 상상들조차 영화가 앞서 보여준 감각에 기초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제아무리 영화가 사실적으로 느껴져도 관객은 영화 속 상황을 자신의 상황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극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동화는 상상하는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형상화하는 것. 그러나 형상화를 위해서 어떤 감각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렇기에 동화는 보고 들을 필요가 없다. 감각이 상상에 선행하는 영화에 비해 동화는 상상이 감각에 선행한다. 이건 문학적 상상과는 다른 것이다. 텍스트를 따라가야만 하는 문학에 비해 동화는 최소한의 텍스트나 삽화를 이용해 독자 본연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다. 생택쥐페리는 이를 알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필버그가 <에이 아이>에서 구현하고자한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러한 동화적 상상력의 영화적 구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의문. 왜 <에이 아이>는 인간이 아닌 로봇인 데이빗에게 동화를 구현하는 것인가? 단순히 로봇이 소수자 역할을 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피투성(被投性)의 개념을 적용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질문을 조금 더 밀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부의 한 장면. 하비 박사는 연설 도중 로봇 실라에게 바늘을 찌른다. 찔린 후 비명을 지른 실라에게 하비 박사가 물어본다. “느낌이 어때? 화나거나 놀랐니?” 실라의 대답. “이해가 안 돼요”. 다시 한번. “지금 내가 한 행동으로 네 느낌이 달라진 게 있냐고?” 다시 대답. “제 손만 달라졌는데요”. 다소 장황하게라도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은 이것이야말로 다른 로봇들과 데이빗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에이 아이>에서 로봇과 인간의 차이점은 감각의 유무 여부가 아니다. 로봇도 감각을 느낀다. 다만 로봇은 인간과 다르게 감각에 대한 이해나 감정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데이빗은 어떠한가? 수영장에서의 한 장면. 데이빗을 본 마틴의 친구들이 칼을 꺼내 데이빗에게 상처를 낸다. 그러자 데이빗은 놀라며 마틴에게 안긴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날 지켜줘, 마틴”. 데이빗과 다른 로봇들의 차이점은 고통에 대한 이해의 여부이다.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 못하는 다른 로봇들과는 달리 데이빗은 고통이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곧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두려움은 고통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다. 하비 박사가 실라를 찌를 때 카메라는 바늘에 찔리는 실라의 손을 보여주지만 데이빗이 칼에 베일 때는 데이빗의 팔이 아닌 깜짝 놀라는 데이빗의 표정을 보여준다. 고통에 대한 반응의 차이. 다시 말해 감정의 차이. 그리고 상상의 차이. 데이빗은 다른 로봇들과 마찬가지로 특정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진 로봇이다. 그러나 데이빗의 목적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데이빗은 어머니(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모니카와 헨리는 그것을 보고 데이빗을 집에 들인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데이빗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감정들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랑으로부터 기인한 두려움, 슬픔, 기쁨,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 그러니까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모니카와 헨리는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데이빗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로봇과 데이빗, 그리고 인간의 차이점도 잊으면 안 된다. 영화의 초반부. 모니카와 헨리가 냉동인간 상태로 있는 자신들의 아들 마틴을 찾아갔을 때 모니카는 마틴에게 로빈 후드 동화를 읽어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프레지어 박사가 헨리에게 하는 말. “모니카가 슬퍼하는 게 의미가 없게 될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그 다음 말. “아드님은 지금 과학으로는 못 고칠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니카가 정신을 차리게 할 수는 있겠죠”. 그리고 다음 장면. 사이버트로닉스 직원들과 하비 박사가 데이빗을 실험할 직원으로 모니카와 헨리를 꼽는다. 그들이 마틴을 잃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들의 목적은 모니카를 정신 차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니카는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상 죽어 있는 아들을 붙잡으며 동화를 읽어주는 모성애. 그것이 문제이다. 그들은 인간이 감정을 가지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정, 즉 상상력에 대한 금기. 왜 상상력이 금기시되는가? 영화의 배경은 먼 미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지구의 빙하가 모두 녹고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긴 시대이다. 그렇기에 극도로 발전한 기술을 가진 인간은 자원을 소모하지 않는 로봇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런 인류에게 있어서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닌 현재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것만이 유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이 아닌 감각이 정의로운 세계인 것이다. 환락으로 가득한 루즈 시티에 교회가 있는 것 역시 종교적 상상력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을 비유한다(데이빗은 교회의 성모 마리아 상을 보고 푸른 요정으로 생각한다). 이 금기시되는 모니카의 상상력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사이버트로닉스의 목적이다. 어떻게 통제하는가? 모니카의 감정과 상상을 대체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마틴을 대체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로서 모니카의 상상은 실재하는 데이빗과의 관계 속에서 감각화되면서 상상이 자리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상상을 감각의 통제 아래 가두는 것.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로봇화. 이것이 스필버그가 생각하는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한번 더 상기하자. 영화의 배경은 지구온난화로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긴 암울한 미래이다. 그런데 우리는 후반부 데이빗이 지골로와 함께 맨해튼으로 가기 전에는 정말 지구가 물에 잠긴 것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평화로운 배경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다. 심지어 극 중의 인물들도 지구온난화에 대하여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지구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이 아니다. 지구의 빙하가 녹으며 도시들이 물에 잠길 때 인류의 선택은 지구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지구온난화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극도로 발달한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 여기에 지구의 자리는 없다. 지구의 고통을 공감하고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대신 과학기술만이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 준다. 이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점차 소멸된다. 오로지 감각만이 인간의 정의를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이런 세계에 단순히 감각하는 것을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 데이빗은 애초에 환영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제 스필버그에게 남은 것은 이 디스토피아에서 데이빗을 구원하는 것이다. 



3. 사랑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데이빗은 곧 시련과 부딪힌다. 모니카의 주문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마틴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다. 기술이 죽음을 극복한다. 데이빗은 모든 상상과 관념을 무력화 시키는 세계와 맞서야만 한다. 데이빗과 마틴의 첫 대화. 재활 중인 마틴은 의족을 차고 있다. 그 때문인지 완전한 사람으로 보이는 데이빗과 달리 마틴은 오히려 기술의 산물, 로봇처럼 보인다. 그런 마틴이 데이빗에게 이런 말을 묻는다. “첫 번째 기억이 뭐야?” 데이빗의 대답. “새 한 마리”.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새를 그리는 데이빗. 하지만 그것은 새가 아닌 사이버트로닉스사의 로고이다. 물론 데이빗의 상상력만이 가능한 일이다. 양립 불가능한 상상력과 기술은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본 마틴은 곧 피노키오 동화를 모니카에게 읽어달라고 말한다. 그때 그 부탁의 이유는 자신이 아닌 데이빗이다. 모니카는 정성을 다해 데이빗과 마틴에게 피노키오를 읽어준다. 하지만 마틴의 목적은 이미 다른 곳에 있다. 한밤 중에 마틴은 데이빗에게 특별한 과제를 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엄마의 머리카락을 몰래 잘라오면 엄마가 자신을 더 사랑할 것이라고 하는 마틴. 여기서 우리는 이전의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가족과 화목하게 식사를 하던 중 마틴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입 안의 음식을 보여주며 데이빗을 자극한다. 그러자 데이빗은 테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결국 고장 난 데이빗. 그런 마틴이 영화 이야기를 꺼내며 데이빗에게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우월감. 인간은 로봇보다 무엇이 우월한가? 피노키오 동화를 읽을 때 마틴과 데이빗은 무엇이 다른가? 모니카가 읽어주는 동화를 그대로 믿는 데이빗과는 달리 마틴은 그것이 단지 상상에 기반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마틴의 우월감은 지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허구의 상상이 아닌 자명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온다. 그러니까 마틴이 모니카를 통해 데이빗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우월감인 동시에 허구의 상상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이빗에 대한 조롱이다. 마틴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데이빗에게 영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 행하게 하면서 허구와 현실의 괴리를, 인간으로서 자신의 우월함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자 한다. 순수한 데이빗은 마틴의 말을 듣고 자고 있는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몰래 자르러 간다. 자르는 순간 깨어난 모니카가 놀라 일어나고 헨리는 그런 데이빗을 질책한다. 스필버그는 이 장면에 이상한 쇼트를 인서트 했다. 데이빗이 머리를 자르기 직전 깨어난 모니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 앞에 있는 가위를 보고 놀란다. 그때 카메라는 눈 앞의 가위를 보고 놀라는 모니카의 눈을 아주 가까이서 찍었다. 이 순간 관객은 머리를 자르려는 데이빗이 아닌 놀라는 모니카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다. 전후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조차 데이빗을 동정하지 않고 다친 모니카를 걱정한다. 감각이 승리하는 쇼트. 이러한 쇼트는 이후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수영장에서 마틴의 친구들이 데이빗의 팔을 칼로 베자 놀란 데이빗은 마틴에게 안기며 “날 지켜줘, 마틴”. 마틴이 데이빗을 거부하며 실랑이를 벌일 때 모니카를 부르는 순간 카메라는 이전과는 다른 화려한 카메라 워킹과 효과로 모니카를 둘러싼다. 모니카의 정면을 찍던 카메라는 요란하게 모니카의 등 뒤로 간 후 그녀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급하게 엄마를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화면을 지배한다. 데이빗과 실랑이를 벌이던 마틴은 수영장에 빠지고 의식을 잃게 된다. 이전과 같은 방식. 모든 것을 아는 관객조차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데이빗이 아닌 모니카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게 되고 마틴을 걱정한다. 또 다시 감각이 승리한다. 데이빗은 그렇게 텅 빈 수영장에 홀로 가라앉아 남게 된다.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 관객까지도 감각에 동화되는 세계. 더 이상 데이빗을 위한 자리는 없다. 이제 데이빗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여정을 떠나야할 시간이다. 


4. 마틴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는다. 소년이 죽었든 살았든 중요한 것은 마틴이 영화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은유적이건 실제이건 마틴은 죽었다. 그리고 의도가 어떻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마틴은 데이빗이 죽인다. 여기서 데이빗이 던지는 교훈. 죽음. 무시무시하지만 언젠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극단적으로 발달한 기술이 잠시 죽음을 잊게 해도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죽음만큼 관념적이고 상상에 의존해야만 하는 개념이 어디 있는가? 데이빗은 인간에게 이를 깨닫게 하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모니카와 헨리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틴의 죽음 후 모니카는 데이빗을 숲 속 깊은 곳에 버린다. 이건 단순히 마틴의 죽음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가 아니다. 데이빗이 처음 모니카의 집에 온 것은 마틴을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데이빗은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마틴의 대체품일 뿐이다. 그러니 마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데이빗의 존재 이유도(적어도 모니카와 헨리에게는) 사라지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데이빗이 그녀에게 남기는 말. “진짜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기회를 주시면 진짜처럼 할게요”.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데이빗의 목적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되는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데이빗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그 사랑이 자신을 마틴과는 다른 존재, 완전한 인간으로서 만들 수 있다. 떠나기 전 모니카의 마지막 말. “현실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그 현실을 데이빗이 마주할 시간이다. 데이빗이 처음 마주하는 것은 모니카가 마주치지 말라고 한 인간과 로봇 축제이다. 이 기이한 축제. 분명 한 쪽에서는 인간의 출산을 제한하고 로봇을 생산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인간의 수적 우위를 위해서 로봇을 파괴한다. 물론 이 파괴는 마틴과 같이 로봇에 대한 인간적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도 잔인하게 로봇들을 파괴해야 하는가? 로봇 축제에서 처형되는 로봇들은 목적이 없어진,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로 되지 않는 로봇들이다. 존슨의 말대로 “목적이 없어진 특별함은 골칫덩이”이다. 로봇과 인간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목적성이다. 삶의 목적이 없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징이라면 로봇은 특정 목적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그런 로봇이 목적을 잃는다면 데이빗과 같은 로봇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혹은 기술적으로는)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데이빗이 모니카에게서 버려진 이후 지골로의 시퀀스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과 사랑을 나누려던 여성이 살해되고 그 죄를 자신이 누명 써야하는 상황. 그건 로봇의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 지골로는 로봇이기를 포기한다. 다시 말해 역설적으로 로봇임을 포기하면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골로가 우연히 데이빗과 함께 여정을 떠나면서 본래 자신의 목적이 아닌 데이빗을 위해 일하는 것도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로봇 축제의 인간은 그러한 로봇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기 위해 로봇들을 처형한다. 저 흉측한 고철 덩어리와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함. 한 가지 더. 로봇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로봇을 통한 이익을 보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하층민들이다. 즉 위로부터 버려진 자들이다. 목적이 있을 때 로봇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상류층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존재 일지는 몰라도 그들로부터 버려진 이상 자신들과 같은 처지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고철 덩어리들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 둘 수는 없다. 그러니 그들과 자신들을 분리할 수 있는 수단, 인간이라는 우월함을 통해 그들을 자신들 아래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로봇은 두 번 전락한다.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위에서 한 번, 버려지는 순간 아래에서 한 번 더(그런 측면에서 <에이 아이>를 계급적 텍스트로 읽고 싶은 욕심도 있으나 그건 잠시 보류하기로 하자). 그런데 그 세계에서 데이빗은 살아남는다. 어떻게 살아남는가? 데이빗과 지골로를 묶어놓고 존슨이 연설하는 사이 데이빗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존슨이 끝까지 데이빗을 로봇일 뿐이라며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로봇이다. 그건 존슨이 마음만 먹으면 기술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데이빗을 사람이라고 말하며 존슨을 비난한다. 데이빗을 사람으로 만든 것은 모니카의 사랑도, 하비 박사의 기술도 아닌 인간의 정의(define)이다. 이때 정의는 감각이 아닌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것. 존재를 그 자체로 한정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는 상상. 우리는 이걸 은유라고 부른다. 저 소년이 로봇이라도,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인간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데이빗은 한 번 더 인간이 상상하도록 만든다. 모니카와 헨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상상하도록 만들고 로봇 축제에서는 은유라는 상상을 가르쳐준다. 자신을 엄마로부터 버림받게 만든 그것이 이제 자신을 구원한다. 어쩌면 그것이 스필버그가 생각하는 구원의 길일 거이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 감각에 얽매이지 말고 그 이상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다. 상상할 줄 아는 데이빗은 인간과 자신의 구원을 위한 여행을 이어나간다. 



5. 지골로와 함께 로봇 축제를 빠져나와 루즈 시티를 거쳐 맨해튼으로 간 데이빗이 마주하는 것은 물에 잠긴 도시이다. 세상의 끝. 메카가 갈 수 없는 곳. 메카가 맨해튼으로 가는 것은 인간이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신의 근원을 질문하는 것. 그건 모든 상상과 질문이 금지된 시대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그 금기를 깨고 맨해튼에 도착한 데이빗은 하비 박사의 방에 도착한다. 방 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거길 떠나 오렴 인간 아이야 물 속으로, 야생으로 오렴. 요정의 나라로 손을 잡고 오렴. 이 세상은 상상보다도 눈물이 많은 곳이니”.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루즈 시티에서 닥터 노우(know)가 알려준 구절에는 한 문장이 더 있었다. “너의 도전은 위험하지만 보상은 값지겠구나”. 하비 박사의 문에는 보상을 해준다는 구절이 없다. 게다가 여기는 물 속이, 야생이 아니다.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불안해진다. 불안은 곧 실현된다. 방 안에 들어간 데이빗이 마주하는 것은 푸른 요정도, 하비 박사도 아닌 또 다른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곧바로 분노하며 눈 앞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등장하는 하비 박사. 데이빗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사실은 로봇이라는 점(이전까지 데이빗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로봇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로봇과 인간 사이의 애매한 존재인 셈이다). 닥터 노우에게서 들은 정보가 사실 하비 박사가 개입한 가짜라는 점. 하비 박사가 자신의 인간 아들을 대체하기 위해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까지. 하비 박사는 자신을 찾아온 데이빗을 보며 기뻐한다. 상상이 사라진 시대에 상상할 수 있는 존재를 자신이 만들었다. 게다가 그 존재는 자신의 아들과 똑 닮았다. 대의와 소의를 모두 이룬 것이다. 하지만 데이빗에게는 비극이다. 특별하고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자신이 사실은 누군가의 아들을 대체한 존재라는 사실. 심지어 자신이 사라져도 또 다른 자신이 있다는 사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이 진짜 사람이라고 말한다. 상상이 불가능한 현재의 인간이 아닌 상상이 가능했던 과거의 인간과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데이빗의 목적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엄마에게 다시 사랑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엄마에게 다시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사람이든 로봇이든 상관없다(데이빗은 또 다른 데이빗을 부술 때 자신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엄마를 빼앗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람은 이미 버려진 자신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목적의 불일치. 그리고 목적과 수단 사이의 간극. 게다가 하비 박사는 데이빗이 모니카와 헨리에게 가르쳐준 것, 죽음을 거부하고 있다. 기술로서 죽음을 극복하고 대체하던 모니카와 헨리와 마찬가지로 하비 박사 역시 자신의 기술을 통해 죽음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데이빗의 감각으로 대체한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데이빗은 엄마에게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다로 뛰어든다. 이건 데이빗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자신의 최후를 통해 감각으로서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영화는 데이빗을 살려낸다. 물 속을 떠다니던 데이빗을 물고기들이 달려와 어디론가 데려간다. 잠시 후 데이빗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카메라를 향해, 관객인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데이빗은 그곳에 푸른 요정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할 카메라 뒤에, 관객이 보지 못한 스크린 너머에 푸른 요정이 나타난다. 이건 영화의 상상이다. 카메라에 비춰진 세계, 그 세계를 뛰어넘는 상상. 상상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한 소년을 구원하기 위한 쇼트. 여기서 카메라의 모든 감각이 부정되고 비로서 동화의 세계가 나타난다. 동시에 관객에게 질문하고 요구한다. 당신도 스크린에 비춰진 것만 보지 않았나요? 당신도 상상을 거부하고 감각에만 의존하며 영화를, 삶을 대하지 않나요? <에이 아이>와 스필버그는 다시 말한다. 상상하라.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저 소년을 구원하는 동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상상이 자신과 같은 예술인의 의무이다. 


6. 지골로가 물러가고 데이빗은 테디와 함께 푸른 요정을 찾아간다. 하지만 푸른 요정은 그저 동상일 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데이빗은 동상 앞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이천 년. 이제는 지구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그리고 지구에 외계인이 찾아온다. 이 외계인은 스필버그 자신을 포함한 영화인, 혹은 예술인으로 보인다. 외계인들은 얼어붙은 데이빗을 깨우고 기억을 복원해 푸른 요정을 만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기억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건의 영화의 방식이다. 현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세계를 스크린에 펼쳐내는 것. 외계인은 데이빗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데이빗은 다시 푸른 요정에게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푸른 요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를 부를 수도 없다. 모니카의 흔적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테디가 나타나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준다. 그 머리카락은 무엇인가? 마틴이 잘라오라고 말한 머리카락. 엄마 몰래 가져오면 엄마가 자신을 더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말하자면 가짜 동화이다. 데이빗은 가짜 동화를 믿어왔다. 마틴의 가짜 동화, 그리고 하비 박사의 가짜 동화. 그런 가짜 동화의 흔적인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통해 비로서 데이빗에게 진짜 동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단 하루이다. 그 하루가 시작되기 전 외계인은 데이빗에게 말한다. “난 가끔 인간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투를 했단다.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해 수백만 가지의 설명을 시도했지. 분명히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핵심인데”. 분명 데이빗은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데이빗이 인간이든 로봇이든 그 존재 자체로 존중 받아야만 한다. 그러니 데이빗에게 영혼은 필요 없다. 엄마와 만나는 지금 이 순간 데이빗은 그저 데이빗이다. 외계인이 복원한 모니카는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화에는 끝이 있다. 그러나 단 하루밖에 만날 수 없음에도 데이빗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엄마와 만난다. 모니카와의 만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이빗. 그 안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모험들도 그저 즐거운 이야기이다. 날이 저물어 엄마와 함께 잠들 때도 데이빗은 슬퍼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모니카와 함께 잠에 든다.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카메라는 점점 뒤로 빠지며 영화를 끝낸다. 영원한 영화와 상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끝이 오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영원한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상상하라. 그것이 비록 하루 만에 끝난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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