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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Sep 18. 202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

그런 나라는 없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한 남자가 황량한 사막에 위치한 상점에 들른다. 남자는 상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상점 주인에게 위협적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고 상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상점 주인은 앞면에 걸었고 동전도 앞면이 나왔다. 남자는 동전을 넘기고 떠난다. 물론 지금 나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안톤 쉬거와 상점 주인 간의 대화 신을 거칠게 묘사한 것이다. 이 이상한 장면. 이 장면은 분명 밀도 높게 연출되어 있음에도 이후의 서사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상점 주인이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도 않고 공간적으로 상점이 다시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신은 서사적으로만 본다면 완전히 독립된,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코엔 형제는 영화를 진행하던 중 잠시 빠져나왔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 신이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은 잉여롭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코엔 형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잉여로운 신이나 쇼트를 허락하지 않는 감독이다(특히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걸작에는 더욱). 다시 말해 해당 신은 영화와 독립된 듯한 동시에 낭비되지 않는, 무언가 모순적으로 들리는 장면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이러한 순간들이 간혹 등장한다. 지금 떠오르는 예. <시리어스 맨>의 프롤로그. 먼 옛날 독일. 한 남자가 부부의 집에 방문할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아내는 남자가 이미 죽은 자이며 남편이 만난 자는 유령이라고 말한다. 남편을 그 말을 믿지 않고 잠시 후 남자가 찾아온다. 그리고 아내는 남자를 칼로 찌른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집을 나가고 부부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꺾지 않는다. 영화는 남자가 유령인지 아닌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고 프롤로그를 끝낸다. 그리고 시대는 1960년대 미국으로 넘어온다. 당연히 이 프롤로그는 이후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프롤로그가 영화에서 낭비된다는 인상은 전혀 없다. 서사와는 독립되어 있는데 영화의 자장 안에서 한 데 묶인다. 이 장면들을 영화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서사적 유기성이나 메타포와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리되어 있는 듯한 장면과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서사적으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장면을 영화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분리되어 있는듯한 그 장면과 영화 속의 인물들 혹은 세계가 같은 원리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원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부터 이 질문을 더 깊숙이 밀고 들어가고자 한다. 


2. 장면을 조금 자세히 따라가보자. 쉬거가 들어오고 주인과 상투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얼마요?” “69센트요”. “기름은?” 그런데 문제의 다음 대답. “댁 동네엔 비 좀 왔소?” 이건 앞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상점 주인은 대화를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바꾼다. 그 순간 쉬거의 태도도 돌변한다. “내가 어디서 왔든 무슨 상관이지 친구?” 두 인물의 관계는 상점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서 친구로 변한다. 물론 이것은 쉬거가 아닌 주인이 자초한 것이다. 둘은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 주인은 쉬거가 묻는 말에 알맞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치 두 사람이 친한 것처럼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대응한다. 여기서 무엇이 사라지는가? 다시 반복. 쉬거는 상점 주인을 오로지 상점 주인으로 대하며 질문했다. 주인도 쉬거를 손님으로 대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은 쉬거를 손님이 아닌 친구로 대한다. 말하자면 상점 주인이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상점 주인과 손님이라는 관계적인 규정이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상투적인 규정이 사라지는 순간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로서 두 인물은 친구가 된다. 친구 관계만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는가? 상점 주인은 더 이상 상투적인 규정으로는 자신의 실존을 지탱하지 못한다.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상점 주인은 문을 닫고 도망치려 하지만 쉬거는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는 주인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묻는다. 문을 닫는 시간, 잠을 자는 시간, 사는 곳까지. 상점이 원래 장인어른의 것이었다는 말을 듣자 쉬거는 단정하듯이 말한다. “그것 때문에 결혼했군”. 이 말에는 근거가 없다. 쉬거는 상점 주인을 방금 만났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말한다. 상점 주인은 다시 한번 4년 전에 이곳에 왔다고 말하고 쉬거는 반복한다. “그것 때문에 결혼했군”. 이 말을 조금 확장해보자. 영화의 서사에서 쉬거가 쫓는 자는 모스이다. 여기서는 모스가 왜 쫓기는가 대신에 모스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질문해야 한다. 사슴 사냥을 하던 모스는 갱단의 전투로 모든 갱들이 죽어있는 자리에서 돈가방을 발견하고 가져간다. 바꿔 말하면 죽은 자의 물건을 가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 메커니즘은 상점 주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의 장인어른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장인어른의 상점을 물려받았다. 쉬거의 말은 곧 코엔 형제의 말이다. 코엔 형제 세계에서 인물들은 죽은 자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죽은 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모든 규정이 사라진 곳에서는 우연성과 불확실성만이 남는다. 상점 주인 또한 장인어른과 사위라는 규정을 탈피하면 코엔 형제의 인물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쉬거는 상점 주인을 이러한 우연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모든 의미가 무의미해지는 세계. 완전한 우연의 세계. 여기에는 동전 던지기만이 남는다. 안톤 쉬거조차 동전을 따라야만 한다. 여기서 잠시 반문. 왜 상점 주인에게는 동전을 던지는가? 우리는 상점 주인과 비슷한, 그러나 동전을 던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은 두 노인을 보았다. 한 사람은 쉬거가 경찰차에서 멈춰 세운 노인. 다른 한 사람은 쉬거를 도와주고자 트럭에서 내린 또 다른 노인. 이 두 인물은 쉬거를 만나자마자 죽임을 당한다. 무엇이 이들을 죽도록 하는가? 첫 번째 노인은 쉬거를 경찰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안톤 쉬거는 경찰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내리자마자 노인을 죽이고 차를 빼앗는다. 두 번째 노인은 차가 고장난 쉬거를 도와주고자 트럭에서 내렸다. 이 노인도 트럭을 빼앗기고 죽는다. 두 노인은 모두 쉬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쉬거는 그러한 규정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것이 경찰이든, 도움이 필요한 약자이든. 그렇다면 상점 주인은 어떠한가? 처음 쉬거가 왔을 때 쉬거는 상점 주인이라는 규정을 존중하였다. 그런데 그 상점 주인 스스로가 그 규정을 없애고 친구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쉬거가 그를 친구라고 부른 순간 그것은 위협이 아닌 일종의 환영인 셈이다. 자신의 세계로 들어온 것에 대한 환영. 그런 자를 어떻게 그냥 죽일 수가 있는가? 스스로 우연성의 세계를 선택한 이의 운명은 우연이 결정해야 한다. 동전이 던져진다.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점 주인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때 쉬거가 말한다. “이게 몇 년도 동전인지 아나? 1958년. 여기 오는데 22년 걸렸지”. 당연히 동전은 상점 주인에게 오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쉬거의 말은 곧 우연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슨 목적? 심판. 정확히는 자신의 세계 안에 들어온 인물의 운명에 대한 심판.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운명은 동전만이 알고 있다.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동전에게 선택 받는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상점 주인은 다행히 선택 받았다. 안톤 쉬거도 따를 수밖에 없다. 상점 주인은 여전히,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아 물론 쉬거는 계산할 필요가 없다. 그는 손님이 아닌 친구로서 계산을 끝냈으니. 



3. 영화로 돌아가자. 안톤 쉬거는 르웰린 모스에게는 동전을 던지지 않는다. 모스는 동전을 던질 자격이 없다. 모스는 살해 현장에서 물을 달라고 애원한 갱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그날 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물을 주기 위해 찾아가고 그 현장에서 갱들에게 발각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처음 현장에서 모스가 죽어가는 갱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모스는 그들과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돈가방을 손에 넣었을 때 그 돈가방은 모스의 것이다. 거래는 실패했고 주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스는 돌아온다. 동정심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든 죽어가던 갱에게 물을 주기 위해 밤늦게 다시 현장으로 찾아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그 갱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모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현장으로 찾아간다. 이 순간 모스는 더 이상 제3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갱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갱의 자리로 가는 순간 마주하는 갱들. 세계는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순간 그 관계를 따라는 것이 규칙이다(의도치 않게 쉬거와 친구가 되는 상점 주인을 보라). 하지만 모스는 전력을 다해 도망가고 갱들은 그를 쫓는다. 모스의 진짜 죄는 단순히 돈가방을 훔친 것이 아닌 도망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거부한 죄. 갱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곧바로 거부하는 모순. 그러나 한번 자리에 간 이상 그대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그 자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 즉 죽음이다. 갱들은 안톤 쉬거를 고용해 그를 쫓게 한다. 그러나 쉬거는 곧바로 자신을 고용한 갱들은 물론 자신을 뒤쫓던 갱들마저 무자비하게 죽인다. 쉬거는 갱이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될 수가 없다. 모든 통념적 규정을 파괴하는 우연적 세계의 쉬거에게는 어떤 규정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갱들이 그를 고용하여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를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쉬거는 모스를 쫓는 것인가? 갱들에게 고용된 관계가 아니라면 그를 쫓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모스를 쫓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쉬거는 모스에게 분명하게 돈을 가져와도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선을 모스에서 돈가방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돈가방의 원래 주인이었던 갱들의 거래가 실패로 끝나자 돈가방은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이를 발견한 모스는 가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모스는 다시 갱을 찾아갔고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갱의 자리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온다. 이때 모스가 그 자리에 들고 간 것은 돈가방이 아닌 물병이다. 이건 일종의 거래이다. 돈가방을 가져왔으니 그 대가로 무언가를 주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그러면서 모스는 돈가방을 정식으로 가지고 싶어 한다(상점 주인이 장인 어른으로부터 상점을 물려 받은 것과 유사한 맥락). 하지만 이건 자의적인 거래이다. 갱들은 이러한 거래를 제안한 적이 없다. 돈가방은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물병은 그 자리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모스가 갱의 자리에 들어갔다면 원래 있어야 할 물건, 돈가방을 그 자리에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갱들이 모스를 쫓는 것은 그 순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함이다. 원래 자신들의 것이니 자신들이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안톤 쉬거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자신을 고용한 갱들을 그렇게 죽일 리가 없다. 쉬거는 갱들과 자신의 관계, 고용과 피고용 관계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돈가방을 주인 없는 상태, 다시 말해 완전한 공(空)의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다. 우연은 모든 규칙을 파괴한다. 그 모든 규칙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기표는 고유의 기의를 잃어버린다. 하나의 기표. 세 개의 기의. 원래의 규칙을 회복하려는 자들과 새로운 규칙을 만들려는 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없애려는 자. 쫓는 것은 하나인데 세 개의 운동이 발생한다. 이 세 개의 운동은 서로 이상한 방식으로 충돌하고 교차한다. 이 모든 운동은 안톤 쉬거의 관장 아래서 진행되다가 멈추고 새로 시작한다. 이상하리만큼 안톤 쉬거는 갱과 모스, 심지어 칼라 진의 동선까지 모든 것을 알고 움직인다. 영화 초반부에 모스의 집과 통화 기록, 수신기 등을 통해 모스를 추적하는 것이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인물들의 동선을 추적하는지가 불분명해진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안톤 쉬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알고 있다. 세계를 자신만의 규칙으로 정의하려는 운동은 우연의 운동 앞에서 실패로 끝난다. 영화가 끝나면 돈가방의 행방은 완전히 생략된다. 결국 모든 규칙은 우연의 범주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유일한 원리이다. 우연과 불확실성. 모든 것을 아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닌 자이다. 


4. 여기에 한 가지 운동을 더해야 한다. 갱과 모스, 그리고 쉬거를 모두 쫓는 보안관 에드 톰 벨. 벨은 분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보안관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모스와 쉬거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는 것뿐이다. 따라간다는 말. 이건 쫓아간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쫓아간다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쫓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 하지만 벨은 모스와 갱의 현장, 쉬거의 현장을 바라보며 사태를 정리할 뿐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른다. 대상의 생략. 여기에 한 가지 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벨은 인물이 아닌 이미 일어난 사태만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이건 쫓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쫓고 있다면 쫓고 있다는 행위가 대상에게 영향을 미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벨은 모스에게도, 쉬거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심지어 서사에서도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노인 보안관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전부이다. 그럼 이 인물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단순한 대답. 그는 따라가라고 있는 인물이다. 왜 따라가야 하는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스와 쉬거, 그리고 벨이 한 번도 한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들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할 수가 없다. 하나의 운동이 프레임이라는 세계에 존재한다면 다른 운동은 프레임 바깥에 있거나 그 운동을 소멸시켜야 한다. 규칙의 운동과 우연의 운동. 유(有)의 운동과 무(無)의 운동. 이 둘이 공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벨은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는가? 모스와 쉬거를 따라가면서 벨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막고자 한다. 무슨 사태? 두 운동의 충돌. 모순적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한 쪽은 반드시 소멸한다.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운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 벨의 목적이다. 운동이 멈추는 순간 사태는 정지하고 그에 대한 해석만이 남게 된다. 벨은 이 모든 사태를 자신의 해석의 범주 안에 가두고자 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노인의 방식이다. 세계를 해석 가능한 무엇으로 보는 것.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것. 물론 이는 칸트와 같은 철학자로 대변되는 근대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노인의 방식은 현상을 과거에 잡아두면서 시간의 흐름을 멈추도록 하고자 하는, 시간의 힘을 없애고자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의 편이 아니다. 현재는 어떤 식으로든 운동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모스와 쉬거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인의 방식, 노인의 이해는 희생된다. 영화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안톤 쉬거에게 희생되는 노인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처음에 쉬거를 잡았다고 안심했으나 그는 곧 도망간다. 우연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스와 칼슨 역시 노인의 방식으로 쉬거와 마주한다. 그들 역시 쉬거를 죽일 수 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있다. 단지 그 지향점이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을 뿐이다. 우연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그 헛된 믿음은 얼마 안가 깨지고 만다. 과거의 방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욕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말하는 그런 과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영화 후반 엘리스를 찾아간 벨은 과거에 맥이라는 인물에게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듣는다. 1980년으로부터 한참 전인 1909년의 일이다. 그들이 걱정하던 미래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순환이다. 모스와 같은 자들이 노인들을 본받아 미래를 만들어 가는 세상이니. 그런 자들은 쉬거와 같은 자들에게 죽어가니 세상은 피바다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노인의 방식(혹은 미국의 방식, 또는 서부극의 방식)의 종말. 이 방식은 안톤 쉬거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다. 이런 나라는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한국의 영화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오역인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 무기력한 벨은 그렇게 물러간다. 은퇴 후 평화로운 아침 식사 자리, 벨은 아내에게 자신이 꾼 두 가지 꿈 이야기를 해준다. 두 꿈에는 모두 아버지가 등장한다. 첫 번째 꿈에서 벨은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다. 두 번째 꿈에서 벨은 춥고 좁은 오솔길에서 아버지의 횃불을 따라가 아버지를 마주하고자 한다. 두 가지를 합치면 벨의 현재이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잃어버렸으나 그 유산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의 길을 다시 따라가고자 한다.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거와 같은 자에게 맞서고 싶어 하는 노인. 하지만 그 꿈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코엔 형제 영화에 꿈 혹은 환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테면 <밀러스 크로싱>, <위대한 레보스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그리고 <시리어스 맨>. 여기 등장하는 꿈이나 환상은 모두 영화에서 묘사되지만 벨의 꿈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전에 벨의 꿈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모스가 죽은 현장을 찾아간 벨은 문을 열기 전 쉬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문을 열기를 망설인다. 그리고 화면에는 총을 들고 문 뒤에 숨은 쉬거가 등장한다. 우리는 당연히 그 둘이 만날 것을 예상한다. 하지만 그 방에는 아무도 없다. 쉬거는 도망간 것일까? 하지만 도망갈 수 있을만한 길이 없다. 영화는 그가 창문으로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굳게 잠긴 창문을 인서트 하여 보여준다. 어쩌면 그 장면은 벨의 상상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왜 굳이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가? 벨이 마지막에 꾼 꿈. 그 꿈의 세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문 뒤에 안톤 쉬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전부이다. 코엔 형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줄 생각이 없다. 영화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 불확실함만이 남은 세계이다. 이 악몽과도 같은 세계. 다시 한번. 이건 분명히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5. 쉬거는 모든 것을 이룬 뒤 모든 것을 잃은 칼라 진을 찾아간다. 그녀를 찾아간 이유는 단 하나이다. 쉬거는 분명 모스에게 돈을 가져오면 진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가져오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약속. 진과 쉬거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다. 영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모스가 시키는 대로 따라다닐 뿐이다(영화 속에서 또 다른 ‘따라다니는 자’인 벨을 만나는 것도 진이다). 쉬거는 분명 모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스스로 쉬거의 세계, 우연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선택. 이 순간 모스의 운동은 정지하고 진의 운동 또한 멈춘다. 진의 운동? 그녀의 운동은 철저히 남편인 모스의 운동에 종속되는 운동이다. 이때 진의 운동은 모스의 운동을 위한 수단이자 근거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운동.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키려는 운동.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의 전제조건(벨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전제조건은 범죄자와 보안관이라는 관계적 규정이다). 안톤 쉬거가 제안하는 것은 이 운동의 근거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포기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모스의 운동을 지속시켰던 근거가 사라지면서 그를 유지하던 가족이라는 관계는 의미를 잃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상태, 상점 주인과 같은 상태가 된다. 당연히 운동의 목적이던 고유의 규칙 생성의 시도도 실패한다. 대신 근거의 실체이던 진 역시 모스와의 관계가 소멸되면서 이 모든 운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은 쉬거에게 죽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모스는 자신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모스가 죽는다고 멈추지 않는다. 진이 여전히 그 관계 안에 남아있는 한 운동은 지속된다. 안톤 쉬거는 운동의 완전한 소멸을 위해서 칼라 진을 죽어야 한다. 진을 만나 대화가 이어지던 중 동전을 던지는 안톤 쉬거. 그녀는 상점 주인과 다르다. 상점 주인이 스스로 우연의 세계로 걸어 들어와 동전을 만났다면 그녀는 한 번도 그 세계로 들어간 적이 없다. 쉬거는 동전을 던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기꺼이 동전을 던진다. 말하자면 일종의 선의인 셈이다. 우연의 선의. 그 세계로 들어오라는 제안. 하지만 진은 끝까지 거부한다. 선의를 스스로 거부한 그녀에게 동전을 던질 자격은 사라진다. 영화는 동전을 거부한 진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히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의 죽음을 생략한다. 초반부에 그렇게 자세히 묘사되던 보안관과 차를 빼앗긴 노인의 죽음과 달리 모스의 죽음, 진의 죽음, 심지어 진의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코엔 형제도 아는 것이다. 더 이상 영화에서 인과성이나 당위성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극이 진행될수록 안톤 쉬거는 영화를 장악해 나간다. 인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오로지 우연과 불확실성으로만 움직인다. 영화의 운동마저 안톤 쉬거에게 패배한다. 모든 운동을 없앤 안톤 쉬거. 영화가 끝나갈 무렵 코엔 형제는 갑자기 방향을 트는 듯이 이상한 사건을 개입시킨다. 차를 운전하던 쉬거는 초록색 신호등을 보고 운전하다 갑자기 다른 차와 충돌한다(그 차에 누가 탔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차에서 내린 뒤 따라오던 두 소년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존재를 함구하게 만든 후 사라지는 안톤 쉬거.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멕시코 국경에서 피를 흘리며 걸어가던 모스가 청년들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사는 장면. 이를 쉬거가 반복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 모스와 쉬거의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모스는 돈을 주고 청년들과 옷을 교환했지만 쉬거는 소년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산 것이 아니다. 옷은 그냥 받은 것이다. 그때 교환한 것은 돈과 존재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재로 만드는 선택. 모스는 생명의 연장을 샀지만 쉬거는 죽음을 산다. 왜 그래야 하는가? 영화에서 모든 운동은 멈춘 상태이다. 모스도, 벨도, 그리고 갱의 운동까지 멈추고 사라진다. 이제 남은 것은 우연 스스로의 운동, 안톤 쉬거의 운동이다. 그러나 안톤 쉬거는 이 운동의 주인이 아니다. 그조차 동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는 우연을 운동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운동 안에 포함되어 있다. 자신이 작동시키는 세계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 파괴. 그 세계를 움직이게 하던 다른 운동들이 모두 소멸했으니 마지막 동력, 우연 스스로가 세계를 움직인다. 그러니 쉬거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세계를 우연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던 그는 성취를 이룬 후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규정, 존재마저 부재로 만들고 완전히 자신의 세계, 우연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이라는 삶. 부재라는 존재.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간 안톤 쉬거는 영화에서도 사라진다. 일종의 승전보. 이 장면의 끝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디졸브로 처리 된다. 피를 흘리며 걸어가는 쉬거의 모습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벨의 얼굴과 겹쳐진다. 이 때문에 마치 벨이 걸어가는 안톤 쉬거를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아내에게 들려주는 두 개의 꿈. 불가능한 꿈. 마치 안톤 쉬거가 사라진 세계를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바로잡고 싶어하는 듯한 벨. 하지만 쉬거는 패배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을 뿐 언젠가 그가 다시 필요해질 때 돌아올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는 안톤 쉬거의 세계에 살고 있다. 누구의 원리도 아닌 안톤 쉬거의 원리만이 세계를 움직인다. 영화는 한없이 무기력하게 보이는 노인의 얼굴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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