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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Dec 31. 2020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리뷰

논픽션이 픽션을 만나는 순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처음 영화가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극장이 아닌 모니터를 통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를 찍은 커스틴 존슨이 나에게는 어떤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전작 <카메라를 든 사람>을 본 것은 한 영화제에서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견해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분명 걸작이고 나에게 있어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게다가 그 영화는 현재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다. 오직 그때 아니면 볼 수 없었던 영화. 그래서인지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다음 작품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가 선댄스 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것이 한국에서 금방 개봉할 것이라는 큰 기대감은 없는 상태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영화가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극장이 아니라 집 안으로. 무언가 기쁜 동시에 당황스러운 감정. 물론 여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과 극장의 차이 혹은 스트리밍 공개와 극장 상영, 그리고 영화제 관람에 따른 영화적 체험의 차이에 대한 긴 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나 여기서는 일단 보류 해두자. 다만 단편적인 인상만을 말하자면 무언가 넷플릭스가 어떠한 간극을 없애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간극? 물론 영화제 상영 영화와 나 사이의 간극. 아마도 영화제, 혹은 영화제에서만 관람 가능한 영화들에 대한 낭만적 동경은 나뿐만이 아닌 다른 시네필들 역시 지니고 있을 것이다. 오직 그때만 볼 수 있는 영화들. 그런 영화들을 상영해주는 영화제라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 거기에 대한 어떤 낭만. 그리고 그 영화들이 극장에 정식 상영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까지. 그것을 넷플릭스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감정이 처음은 아니다. 이를 테면 마티 디옵의 <애틀란틱스>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일지 아닐지, 앞으로의 영화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영화로 돌아가기로 하자. 


1.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장르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무언가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다. 알다시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커스틴 존슨이 직접 제작한 픽션들이 논픽션 사이 사이 개입한다. 이건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극영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이미 많이 봐온 사례가 있다. 하지만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서 픽션은 어딘가 이상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픽션이 개입하는 경우는 보통 현재는 찍을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목적이다. 바꿔 말하면 논픽션으로 이어나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을 픽션으로 보충하는 셈이다. 하지만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픽션은 서사적인 부분에서는 분명히 불필요한 장면들이다. 종종 픽션은 논픽션의 전개에 갑작스럽게 개입하여 진행을 막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도 보인다. 게다가 영화는 픽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장면의 전후로 하여 고스란히 드러낸다. 의도적으로 픽션은 논픽션과 구분된다. 그러니 여기서 픽션은 논픽션의 보충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메이킹 필름으로 봐야할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픽션을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찍은 논픽션으로 볼 수도 있을까?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에는 비약이 많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마지막에 완성된 픽션이 나타나야 하는데 영화 내내, 혹은 영화 밖에서도 그런 완성된 픽션은 없다. 오히려 마지막에 모든 픽션들은 논픽션에 환원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픽션들은 오로지 다큐멘터리 안에서만 부분적으로 활용되고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논픽션에 사용되기 위한 픽션을 찍는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무언가 이상해 보이는 방식. 커스틴 존슨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영화 속 픽션들이 아버지 딕 존슨의 죽음을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몸이 쇠약해지고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커스틴 존슨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이별을 맞이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자각한다. 두려운 순간. 하지만 오게 될 순간. 이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순간. 커스틴 존슨은 영화를 찍기로 한다. 어떤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라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위한 픽션. 이 픽션들은 모두 딕 존슨의 죽음을 상상하며 만들어진다. 위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컴퓨터에 머리를 맞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공사현장 목재에 박힌 못에 목을 찔려서 피를 흘리며 죽기도 한다. 그리고 딕 존슨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사후세계에서의 모습도 찍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실제 현실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딕 존슨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둘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분리되는 것은 사건과 실존이다. 죽음이라는 픽션. 죽음이라는 사건.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실존. 영화 속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은 순간 영화는 재빨리 이를 픽션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아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딕 존슨을 모습을 보여주며 논픽션으로 넘어간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웃음과 유희를 잃지 않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죽음이라는 농담. 사건으로서의 유희. 아직 사건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실존은 사건을 상상할 수 있고 사건은 실존을 침범하지 못한다. 커스틴 존슨이 이 영화를 찍은 것은 다가올 아버지의 죽음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는 아버지의 실존을 찍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유희가 영화 내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불안감은 표면에서 드러난다. 


2.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 중 하나는 딕 존슨이 실제로 가장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은 픽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 초반부에 “딕 존슨은 심장마비가 오기 전날 더블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었다”라는 문구가 적힌 노트를 보게 된다. 그의 심장마비가 실제로 그 초콜릿 케이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때부터 영화에서 초콜릿 케이크나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보게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또 다시 같은 사건이 나타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게다가 그 사건은 픽션이 아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계단에서 넘어져 죽는 픽션도 실제 사건에서 가져왔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엉덩이만 부러졌다). 하지만 커스틴 존슨은 이 사건을 픽션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딕 존슨은 본인을 죽게 할 수도 있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즐겨 먹는다. 커스틴 존슨도 이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흔쾌히 권하기까지 한다. 불길한 음식. 그렇지만 멀리 하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한 음식.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음에도 딸은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다. 그건 남아있는 아버지의 시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커스틴 존슨의 결단인 것만 같다. 죽음은 결국 도래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남아있는 생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본인의 몫이다. 여기에서도 실존은 영화와 분리된다. 영화는 죽음에 점차 다가서는 실존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본다. 딕 존슨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건을 픽션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그러한 결단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그 사건을 픽션으로 만든다면 사건은 연장되고 픽션은 픽션으로만 남아있지 않으면서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그건 실존에 대한 사건의 침범으로 이어진다. 커스틴 존슨이 가장 경계하는 상황. 실존이 사건에 무너지는 순간. 영화는 이 불안감을 부정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실존을 긍정한다. 실존의 긍정만이 죽음을 유희로 만들 수 있다. 딕 존슨이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도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아직 죽음은 오지 않았기에 남아있는 생을 즐기고자 하는 의지. 커스틴 존슨도 이 의지를 함께 긍정한다. 아버지,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 마음껏 케이크를 드셔도 돼요. 이때 커스틴 존슨과 딕 존슨은 케이크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지우고자 한다. 아버지를 죽게 할 수도 있었던 케이크. 그 케이크에 더 이상 죽음은 없고 오로지 달콤함만이 남아있다. 일종의 유희. 삶과 죽음의 분리. 영화 내내 커스틴 존슨이 하는 일은 삶과 실존은 죽음과 사건의 이미지 속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그녀에게 자리잡은 강렬한 불안함이 돌출되는 순간이 종종 나타난다. 영화는 초반에는 완전히 유희에서 시작한다. 딕 존슨이 죽었을 때의 장례식을 촬영하는 장면이나 스턴트 맨에게 조언을 받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앞으로 나타날 죽음이 전부 허구라는 것을 선언한다. 영화의 불안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커스틴 존슨 가족이 뉴욕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이다. 이사를 가면서 딕 존슨은 은퇴하고 자신이 아끼던 차를 팔 수밖에 없었고 정 들었던 공간마저 떠나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차를 팔아버린 딸에게 서운한 것 같다. 하지만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아버지에게 복잡한 뉴욕 시내에서 운전하게 두기는 딸로서 어려웠을 것이다. 이건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의 삶에 개입하는 첫 번째 순간이다. 그녀가 개입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실존을 유지할 수 없다. 필연적인 선택.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선택. 여기서부터 죽음은 단순한 픽션을 위한 사건이 아닌 실제 현실과 실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집을 떠나기 전 커스틴 존슨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찍어 놓은 영상을 본다. 이후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잠겨 카메라를 내려놓고 울기까지 한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 “근데 우린 비슷한 일을 또 겪고 있잖아”. 그리고 딸의 대답. “무서워요”. 어머니가 죽음이라는 사건 안으로 들어갔듯이 아버지 역시 그 사건을 맞이할 것이다. 아무리 인물을 사건에서 구출하고자 해도 사건은 도래한다. 이 불안함. 이 무기력함. 아버지는 딸에게 이 장면도 영화에 넣으라고 말한다. 고민하던 커스틴 존슨은 그 장면을 영화에 넣었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만 딸은 이를 잊어버리기 위해서인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천국에 간 딕 존슨을 보여주며 다시 죽음을 유희 안에 가둔다. 



3. 뉴욕으로 이사오면서 커스틴 존슨의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기억력 검사를 위해 병원에 찾아갔을 때 딕 존슨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진다. 이윽고 커스틴 존슨의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좁은 방에서 휴대폰으로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도 내레이션은 있었지만 녹음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오는 것은 이때가 최초이다. 아무래도 커스틴 존슨은 이때부터 내레이션이 특정한 힘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힘? 영화 바깥에서 개입하는 듯한 주술적인 힘. 커스틴 존슨은 영화 바깥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영화의 창작자 이전에 현실의 삶에 종속된 인간으로서 보기를 원한다. 그건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이기에 가능한 결단일 것이다. 픽션이 아닌 논픽션. 허구가 아닌 실재를 찍기 위한 장르. 감독이 아무리 영화 안에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고 해도 현실은 온전히 존재한다. 커스틴 존슨의 이 선택은 또 한번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어떤 분리. 영화와 현실의 분리. 영화라는 픽션. 현실이라는 논픽션. 이건 꽤나 무서운 선택이다. 어째서? 자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픽션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시도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실존을 지키려는 노력. 죽음을 픽션으로 만들면서 아버지의 실존을 긍정하려는 시도. 그 모든 것이 픽션에 불과하다면 결국 죽음은 현실에서 도래할 것이고 자신의 영화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영화라는 사건. 현실이라는 실존. 이 사건은 실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종속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후 딕 존슨의 죽음을 찍는 장면은 이전과는 다르게 완성된 픽션의 형태가 아닌 촬영하는 현장을 보여준다. 촬영 후 결과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연출된 느낌은 아니다. 커스틴 존슨은 이 허무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영화는 캘리포니아의 로마린다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딕 존슨은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인 롤리타를 만난다. 롤리타는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을 떠나 보내면서 홀로 지내고 있다. 커스틴 존슨은 왜 그녀를 찾아간 것일까? 커스틴 존슨은 그녀에게 단 한 가지의 질문을 한다. “병리학자랑 오래 살다 보니 죽음에 관한 생각이 바뀌셨나요?” 잠시 고민하던 롤리타는 그저 “죽음은 피할 수 없어. 우리의 일부이지”라는 꽤나 상투적인 답변을 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답변의 상투성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이 상투적인 것은 죽음이 삶의 필연적인 요소라는 것을 부각한다. 그 외에 다른 답변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한 초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전에 느껴지던 불안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롤리타와 딕 존슨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 대신 삶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이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롤리타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죽음 이후에 대해서 자세하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 “성경에선 다들 부활한다고 하잖아. 난 그거면 충분해”. 이때 롤리타는 자신의 죽음을 농담으로 만들어낸다. 죽음에 대한 유희. 물론 이건 영화가 가진 태도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 커스틴 존슨이 영화에서 픽션의 창조를 통해 죽음을 사건화하는 동시에 실존을 긍정하면서 죽음을 실존과 분리시킨다면 롤리타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 안에 내재화 한다. 그러니 그녀가 죽음을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실존 역시 긍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커스틴 존슨이 죽음이 지금 여기 없기에 유희할 수 있다면 롤리타는 그것이 지금 여기 있기에 유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방법. 그러나 같은 태도. 커스틴 존슨이 롤리타에게서 얻은 것은 일종의 가르침이자 위안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도 현재 자신의 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가르침. 현실에서도 자신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위안. 그러니 이 영화는 무의미하지 않다. 커스틴 존슨은 계속 영화를 찍어 나간다. 


4. 1년이 지난 후 딕 존슨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다. 자기가 사는 집을 지나치기도 하고 은퇴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집을 사무실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제 죽음은 외면하기 어려운 수준을 다가왔다. 물론 여전히 커스틴 존슨은 죽음에 대한 유희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에 느껴지던 삶에 대한 충만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예컨대 한 가지 장면. 딕 존슨이 길을 걸어가던 중 공사현장의 인부가 휘두른 목재에 박힌 못에 목을 찔려 피를 흘리며 죽는 픽션. 분명 우리는 이것이 허구이고 유희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촬영하는 현장을 보여준 후 커스틴 존슨은 내레이션으로 죽은 자신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만 준다면 참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서로를 잃는 고통도 마주해야 한다”. 무언가 불길한 말. 이 말이 단순하게 엄마에 대한 말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말이기도 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나타나는 천국에서 딕 존슨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다. 천국에서의 분위기는 즐겁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이전까지 천국에서는 딕 존슨 홀로 있었다(천국에서 딕 존슨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제 인물인 딕 존슨의 아내가 천국에 함께 있다. 픽션에 논픽션이 개입하는 순간. 사건으로서의 죽음과 실제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 더 이상은 픽션은 허구로만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은 일상에 스며들고 불안은 외면하기 어려운 감정이 되었다. 이 모든 게 1년 사이 변한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 이전에 의자에 앉아 잠을 자던 딕 존슨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다. 픽션 촬영을 마친 딕 존슨은 무언가 불편한 듯이 말한다. “심장마비보다 더 끔찍하군. 더 불쾌하고 괴롭지”. 결국 커스틴 존슨은 촬영을 중단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유희로만 남을 수 없다. 일상이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픽션 역시 유희에서 멀어진다. 그러면서 삶의 충만함이 가득하던 픽션은 점차 어두워진다.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픽션은 짧은 무성영화이다. 할로윈을 맞아 복장을 갖추고 거리에서 사탕을 구하러 다니던 중 커스틴 존슨은 피곤해 하는 딕 존슨을 집에 잠시 두고 나온다. 그 사이 집에 있던 딕 존슨은 상황을 잠시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낯선 장소에 머물러 있었던 딕 존슨은 자신이 겪었던 불안감을 딸에게 토로한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커스틴 존슨은 그 당시 아버지가 겪었을 감정을 생각하며 픽션을 만든다. 이제 픽션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 픽션 안의 사건은 인물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픽션 안에서도 인물의 실존이 담겨있다. 이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딸도 더 이상 불길하게만 느껴지던 예감을 받아들인다. “아빠를 데려가려 그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분명한 걸 깨달았고 우린 그게 뭔지 알았다. 그건 엄마와도 겪었던 일이다. 난 어딘가로 아빠를 보내야 한다. 언젠가, 어떻게든 말이다”. 커스틴 존슨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하지만 내가 예전에 이해 못 했던 것이자 안식교에서 인정하는 가장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은 바로 남겨지는 것이다”. 남겨지는 두려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이제 그녀가 극복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이 겪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까지 모두 받아들일 때 비로서 죽음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 



5. 영화의 후반부, 커스틴 존슨은 아버지의 생일 날 이스라엘로 출장을 나가야 한다. 떠나기 전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가 좋아하는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만들어준다.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는,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 보낼 수도 있었던 케이크. 우리는 이미 커스틴 존슨이 케이크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죽음에 대한 커스틴 존슨의 태도는 물론 딕 존슨의 상태 또한 그 사이 많이 바뀌었다. 케이크에는 달콤함만이 아닌 죽음에 대한 기운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여전히 딕 존슨은 케이크를 좋아하고 즐겨 먹는다. 그러나 다음 장면. 구급차에 86세 남성이 심정지로 인해 실려있다. 의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고 커스틴 존슨은 이걸 찍고 있다. 픽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장면. 정말 딕 존슨이 죽은 것일까? 이어지는 딕 존슨의 장례식. 하지만 이는 픽션이다. 딕 존슨은 자신의 장례식을 문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 쪽에서는 픽션이 진행되고 다른 쪽에서는 논픽션이 진행된다. 공존하는 두 서사. 이전까지 두 서사를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커스틴 존슨은 이제 둘을 공존하게 만든다. 장례식의 사회를 맡은 레이가 물러나고 오르간이 연주되는 순간 단상 위에 놓여있는 딕 존슨의 관은 사라진다. 이제 딕 존슨이 들어갈 차례이다. 다가오는 딕 존슨에게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카메라는 장례식장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딕 존슨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순간, 바로 이 순간, 논픽션이 픽션을 만나고 실존이 죽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둘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실존은 죽음 안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는다. 여기서 실존은 죽음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죽음을 수용하고 내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례식장의 사람들이 딕 존슨에게 보내는 박수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한 딕 존슨이 아닌 죽음 이후에도 우리 곁은 떠나지 않는 그의 형형한 실존을 향한 박수이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유희이며 커스틴 존슨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남겨지는 것의 두려움. 아버지가 떠나간 후의 두려움.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실존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더 이상 죽음을 실존과 대립시킬 필요 없다. 아버지의 실존을 지키려던 딸의 노력은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결실을 맺었다. 이 장면에는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감흥이 존재한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만 나에게 있어 이 영화적 순간은, 커스틴 존슨의 이 선택은, 다큐멘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커스틴 존슨은 이미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영화적 이미지로 남았던 피사체들을 한 프레임 안으로 모으면서 인물들을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닌 능동적 주체이자 형형한 실존으로 보이도록 만든 순간을 선사했다. 아마 커스틴 존슨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이러한 프레임 안의 피사체를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생생한 실존으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방 안에서 내레이션을 녹음하던 커스틴 존슨은 이렇게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다시 한번. “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내가 할 말은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원하라, 딕 존슨’이다”. 녹음을 끝마치고 방을 나가는 그녀를 아버지가 맞이한다. 영화가 끝나도 아버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육체가 떠나도 그의 실존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딸과 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함께 서있다. 이제 영화(픽션)는 물러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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