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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an 21. 2021

워터 릴리스 리뷰

네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두 소녀가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 흐르는 침묵을 깨며 마리가 입을 연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는 건 천장 같아. 생을 마감하는 사람 중 90%는 그럴 걸.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 바라보는 천장이 눈 속에 선명히 남을 거야. 마치 사진처럼”. 그리고 한 마디 더. “얼마나 많은 천장이 눈 속에 남겨졌을까”. 이윽고 플로리안도 말한다. “갑자기 천장이 달라 보인다”. 카메라는 천장을 보여주지 않고 컷을 바꾼다. 그 자체로도 이상해 보이는 이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배가시키는 것은 이전 장면과 다음 장면이다. 바로 이전에 마리는 플로리안이 준 수영복을 입으면서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음 쇼트에서 활기찼던 웃음은 사라지고 침묵을 사이에 둔 채 무거운 대화가 이어진다. 더 이상한 건 다음 장면이다. 플로리안의 집을 나온 마리는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온다. 쓰레기 속 휴지의 냄새를 맡고 다 먹은 사과를 베어 물면서 구역질하는 마리. 누가 봐도 도착적인 모습이다. 이 장면들이 흐르는 동안 시간은 밤에서 아침으로 바뀐다. 여기서 드는 의문. 그런 마리는 왜 플로리안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을까? 혹은 영화는 왜 그 사이의 시간, 마리와 플로리안이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을 시간을 건너뛰었을까? 실제로 영화는 마리와 플로리안이 서로의 손을 잡으며 성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컷을 바꾼다. 이 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물론 죽음이라는 말이다. 마리와 플로리안의 세계, 두 소녀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인가? 사회적 규범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난 관계, 억압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세계, 이를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는, 약간은 도식적인 해석을 (조금 무리해서라도)영화 깊숙하게 밀고 들어가고자 한다. 


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 세계는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일 수도 있고(<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혹은 <걸후드>), 다른 성을 가지는 세계(<톰보이>)이기도 하다. <워터 릴리스>에서 마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 역시 명확하다. 하지만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유토피아는 오래 가지 못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고작 6일 동안 허락된다. <걸후드>에서 마리엠 역시 친구들과 우정의 시간을 길게 갖지 못한다. <톰보이>에서 로레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들키게 되는 순간은 가장 남성성이 강하게 돌출되는 순간, 다시 말해 미카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로레는 자신이 상상하는 미카엘처럼 다른 남자 아이와 남자처럼 싸우게 된 후 정체를 들킨다). 그러니까 셀린 시아마는 자신의 인물들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런 세계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더라도 곧 무너진다. 말하자면 인물들이 원하는 그러한 세계는 천장의 세계, 즉 죽음의 세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세계. 물론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본능은 단순히 무(無)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그렇기에 죽음본능은 또 다른 방식의 자기보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셀린 시아마는 죽음뿐 만이 아닌 죽음본능조차 거부한다. 결국 죽음본능조차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셀린 시마아가 단순히 에로스적 세계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현실에서는 성적 욕구를 이전처럼 발산하지 못한다. 셀린 시아마는 새로운 대안을 선택한다.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예술을 통해 서로를 기억하며 이상향을 연장한다. <걸후드>는 모든 세계에서 버림받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리엠의 모습으로 끝난다. 로레는 미카엘이라는 허울을 벗고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리사(진 디슨)와 마주한다. 셀린 시아마에게 현실의 세계는 회피의 대상이 아닌 수용의 대상인 동시에 투쟁의 대상이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세계에 속한 자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은 젠더적 억압이 만연하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을 지켜내고, 혹은 지켜내기 위해 나아간다(어쩌면 셀린 시아마는 그것이 영화의 역할이라고 믿는 것만 같다). <워터 릴리스>는 이러한 영화적 태도의 원형 같은 작품으로 보인다. 


2. 마리는 왜 수중 발레 팀에 들어간 것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마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수중 발레를 배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영화 초반에는 수중 발레 동작을 따라하며 배울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뿐 이다. 실제로 수영장에 가서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 시작 장면을 살펴보자. 마리는 초등부 수중 발레 경기를 보면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이윽고 경기장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중등부인 플로리안의 팀의 경기를 보고 이에 사로잡힌다(이 순간은 마치 나가려는 마리를 사로잡으려는 듯이 아무 조짐도 없이, 조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마리는 처음부터 수중 발레에 관심이 없던 인물이다. 마리는 수중 발레가 아닌 수중 발레를 너무 잘하는 플로리안에 매혹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설프고 미숙한 초등부 경기에 비해 플로리안과 중등부의 경기는 훨씬 성숙하다. 성숙. 마리는 이것에 매혹된 것이다. 영화 내내 마리는 성장과 성숙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마리가 여러 중등부 팀원에서 플로리안에게 매혹된 것도 그녀가 가장 성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플로리안은 어떤 인물인가? 팀 내에서도 소문이 오갈 정도로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수영 코치의 성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으로는 이미 어른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성숙이란 인물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당위성이다. 마리가 플로리안을 바라보는 순간은 곧 그녀가 자신의 욕구와 그 욕구에 대한 당위성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동시에 성장의 순간이다(마리가 초등부 경기를 본 후 중등부 경기를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숙은 성장을 전제로 한다. 이로서 마리는 자신의 욕구를 발견한 것이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성장을 욕구하기 시작한다. 플로리안은 마리가 그 욕구를 발현하고자 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의 친구인 안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나는 어떻게 욕구에 눈을 뜨는가? 경기가 끝난 후 팀원들이 모두 나간 후에야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프랑수아가 들어와 안나의 벗은 몸을 발견한다. 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서로를 바라본다. 같은 여자인 팀원들에게도 몸을 드러내기를 꺼리던 안나가 남자인 프랑수아에게 몸을 드러내는 순간. 이건 마리가 플로리안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 마리는 발견하고 안나는 발견된다. 마리는 플로리안을 선택한 것이다. 그 많은 중등부 선수들 중 하필 플로리안에게 매혹된 것은 그녀가 가장 성숙하기 때문이고 마리는 이것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선택하지 않고 선택된다. 그것도 프랑수아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발견된다. 안나는 타의적으로 욕망에 눈을 뜬다. 타자에 의한 욕망. 다시 말해 유아기적 욕망. 누군가가 나를 욕망하기를 바라는 욕망. 여기서부터 마리와 안나의 간극은 벌어지게 된다. 성장하는 마리와 성장하지 못하는 안나. 두 소녀는 모두 성적 욕구에 눈을 뜬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이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수아라는 소년을 놓치면 안 된다. 영화 내내 프랑수아는 두 소녀의 성장을 막는 인물이다. 안나의 벗은 몸을 처음 보면서 유아기적 욕망을 심어주고 플로리안을 욕구하면서 플로리안이 마리로부터 멀어지도록 한다. 이때 마리는 어떻게 해서든 프랑수아의 자리를 지우고자 하고 안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는다. 그렇기에 프랑수아는 두 소녀의 간극이 더 벌어지도록 한다. 남성인 프랑수아가 여성인 마리와 안나를 갈라놓는 명확한 대비는 <워터 릴리스>가 가진 명확한 영화적 태도를 보여준다. <워터 릴리스>는 성장 영화이고 사춘기 소녀들의 이야기임에도 부모가 영화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소녀들은 자유롭지만 부모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소녀들에 대한 억압은 부모의 부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편재한다. 그러니 마리와 안나가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이러한 억압과 대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리가 처음 플로리안의 수영부에 들어갔을 때 마주하는 것은 경기 때 보았던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닌 물에 떠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 속의 몸부림이다. 그러한 모습을 처음 마리에게 보도록 해준 인물은 플로리안이다(“물 속이 더 잘 보여”). 이건 일종의 교육이다. 성장에 대한 교육. 성장한 뒤 마주해야 하는 세계에 대한 교육. 플로리안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물 위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세계. 수영복 밖으로 털 하나 빠져나오지 않는 깔끔함을 유지해야 하는 세계. 말하자면 대상화를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억압의 세계. 그래서인지 프랑수아를 비롯한 남자 수영부원들이 수영하는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대상화 되지 않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대상화를 주도하는 인물들이다. 마리가 수중 발레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은 이러한 대상화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마리에게 플로리안이 교육하는 것은 대상화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주체성이다. 셀린 시아마는 대상화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현실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안에서 플로리안은 어떻게 주체성을 지키고 마리를 교육시키는가? 



3. 마리가 처음 수영장에 온 날 연습이 끝나고 플로리안이 마리를 데려가는 곳은 프랑수아와 만나는 장소이다. 플로리안은 마리를 기다리게 한 후 프랑수아와 사라진다. 한참이 지나 다시 나타난 후에는 마리에게 집에 같이 가달라고 말한다. 마리가 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프랑수아와 성적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마리의 예상과 달리 플로리안은 프랑수아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모습을 마리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혹은 마리의 존재가 플로리안이 프랑수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플로리안은 마리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여러 남자들과의 섹스를 거부해왔다. 플로리안이 남자들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에서 존재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한 번도 안 한 것 알게 되면 그냥 끝이야”라는 말처럼. 말하자면 일종의 성장통. 여성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대상화 되는 불합리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마리를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성숙이 그 자체로 목적인 마리와 달리 플로리안에게 성숙은 살아가기 위한 삶의 기본조건이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남자들과 섹스를 하지는 않는다. 플로리안은 다른 방법으로 성숙한다. 남자들이 성적 욕구를 가지고 접근할 때 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때 섹스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남성이 아닌 플로리안이다. 플로리안은 남성의 욕구를 따라가며 대상화 되지 않고 자신이 그 욕구를 소유한다. 욕구의 소유화. 이것이 플로리안의 성숙이고 성장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플로리안이 마리에게 교육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셀린 시아마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하나의 실존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마리를 기다리게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이 교육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따라가봐야 한다. 처음 마리가 한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날이 저물 때까지 플로리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리. 이때 마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자신 앞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플로리안에 대한 분노. 마리는 그러한 플로리안이 돌아온 후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플로리안의 집주소를 지워버린다. 그러니까 마리는 아직 플로리안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플로리안이 보여주는 것은 편재하는 억압, 수영장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대상화의 실체이다. 말하자면 플로리안을 비롯한 여성들은 수영장에서뿐만이 아닌 어디에서나 가라앉기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한다. 그 순간 나타나는 여성들의 무력감과 분노, 바로 플로리안이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리에게는 이 역시 성장통이다. 이 성장통을 겪은 뒤 마리의 첫 번째 선택은 회피이다. 이 고통에 대한 회피,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회피. 그래서 플로리안과 함께 대회를 따라간 그날 밤 마리는 안나를 다시 찾아간다. 플로리안을 따라갈 때는 필연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안나와 다시 만나는 것은 결국 성장에 대한 거부이다. 처음에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던 안나도 마리를 집에 들인 후 서로의 얼굴에 물을 뿜으며 즐겁게 웃는다. 


다음 날 마리는 다시 한번 플로리안이 프랑수아를 만나기 위한 장소로 나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리가 교육을 거부한다. 플로리안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마리. 마리가 떠나자 카메라는 이전에 마리를 잡은 것처럼 홀로 남겨져 방황하는 플로리안을 같은 구도에서 바라본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이윽고 플로리안은 마리를 쫓아가 붙잡고 진실을 털어놓는다. 왜 갑자기 이를 말하는 것일까? 마리가 이 교육을 거부한다면, 이 교육은 실패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이전에 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플로리안은 홀로 남게 된다. 물론 이미 플로리안은 이 세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리가 지켜보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 사이의 간극은 크다. 마리가 홀로 플로리안을 기다릴 때 마리가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지만 마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플로리안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을 얻게 된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힘. 여기서 플로리안의 두 번째 교육이 나타난다. 연대하는 힘. 이 두 번째 교육으로 넘어가기 위해 플로리안은 그제서야 진실을 말한다. 연대가 가능해질 때 비로서 두 소녀의 사랑도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마리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플로리안. 마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입히고 서로 웃어대는 두 소녀. 하지만 영화는 곧장 이 활기를 부정이라도 하듯이 정적에 싸인 채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들을 부감으로 찍는 쇼트로 넘어간다. 천장을 바라보는 소녀들.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마리와 플로리안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성적 긴장감을 높인다. 하지만 또다시 영화는 재빠르게 넘어간다. 두 소녀가 성적으로 다가서는 순간은 천장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도달하고 싶지만 도달 불가능한 세계. 억압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세계. 천장의 세계가 타나토스의 세계인 것은 제도 속의 자신의 부정하며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자아를 죽여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셀린 시아마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억압이 편재하더라도 셀린 시아마는 삶을 찬양한다. 그렇기에 마리가 플로리안의 집을 떠난 이후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에 도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이상한 장면. 수영장에서 마리는 프랑수아와 키스를 하는 플로리안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마리. 그리고 다음 쇼트. 안나가 탈의실에서 나체로 몸을 드러내고 눈을 감은 채 서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한 인물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회피하고 다른 인물은 간절히 누군가의 시선을 원한다. 물론 안나가 원하는 시선은 프랑수아의 시선이다. 우리는 안나가 프랑수아에게 몸을 드러낸 후 내내 프랑수아를 쫓아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랑수아는 안나의 욕망을 일깨운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너가 나의 몸을 봤으니 책임지고 내 몸을 소유해라. 이 욕망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대상화시켜야 한다. 마리가 절대 가고자 하지 않는 길을 안나는 욕망한다. 셀린 시아마는 이 장면을 이상하게 이어 붙였다. 키스를 하는 플로리안과 프랑수아를 외면하기 위해 벽에 붙어 굳게 서있는 마리를 잡던 카메라는 매치 컷으로 자연스럽게 안나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담는다. 우리는 이것이 연결의 순간이 아닌 균열의 순간임을 알아야만 한다. 마리와 안나는 이제 서로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다. 이를 알게 된 마리는 안나와 작별한다. 백화점에서 아이처럼 목걸이를 훔쳐 나오고 햄버거 가게에서도 장난감을 위해 어린이 세트를 주문하는 안나를 마리는 경멸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 하는 말. “왜 이렇게 애 같이 굴어”. 마리는 성장하지 못하는 안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자 안나의 대답. “가슴도 없는 어린애는 너거든”. 안나에게 성장은 이런 것이다.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더 잘 보이는 것. 성적으로 대상화 되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의 성숙과 성장이다. 이런 안나에게 마리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대답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온 네 가슴. 그거 진짜 아냐. 그거 다 살이야”. 그리고 헤어지는 두 소녀. 이제 영화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 두 소녀를 화해시킬지 혹은 영영 이별시킬지는 영화의 몫이다. 


4. 마리가 안나와 작별하기 전 플로리안으로부터 세 번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번에는 마리가 직접 행동해야 한다. 플로리안은 자신과 섹스할 대상을 찾기 위해 성인들이 다니는 클럽으로 마리와 함께 간다. 클럽에서 함께 춤을 추는 마리와 플로리안. 두 소녀 사이에 다시금 성적 긴장감이 고조되며 키스를 하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개입하고 플로리안은 그 남성과 춤을 춘다. 마리 바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리를 두고 플로리안은 남성과 함께 나간다. 이윽고 남성이 플로리안을 차로 데리고 가자 마리가 곧바로 달려와 플로리안을 데려간다. 남성에게서 빠져나온 플로리안은 화를 내기는커녕 마리와 함께 기뻐한다. 드디어 자신의 교육이 성공한 것이다. 마리는 플로리안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것이 플로리안이 바라던 힘이다. 그 자리에 있기를 거부하던 마리는 이제 확고하게 그 자리에 위치한다.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나는 네가 내 처음이면 좋겠어”. 교육이 성공했기에 마리는 이제 자신의 욕구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플로리안도 판단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 그러니 한 쪽을 향한 성적 대상화는 있을 수 없고 순수한 사랑만이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거절했던 마리도 이후 제안을 수락하고 둘은 첫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둘 만의 시간을 오래 가지 못한다. 얼마 있지 않아 프랑수아가 플로리안의 집으로 찾아온다. 마리는 또다시 집 밖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일까?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프랑수아는 플로리안과 헤어진 후 안나를 찾아간다. 이유는 하나이다. 플로리안과의 섹스를 실패해서이다. 안나는 언제나 프랑수아의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안나가 선물한 목걸이조차 프랑수아는 플로리안에게 선물한다). 프랑수아가 바라는 것은 오직 섹스이고 안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드디어 프랑수아와 섹스를 하는 것에 성공한 안나. 그리고 다음 날 마리와 안나는 재회한다. 마리는 대화를 통해 프랑수아가 플로리안과 섹스하지 않고 안나와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섹스를 했지만 첫 키스를 하지 않은 안나의 첫 키스 상대가 되어준다. 이로서 둘은 화해한다. 그럼 이때 변하는 쪽은 누구인가? 아마도 마지막 장면이 해답이 되어줄 것이다. 마리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안나는 프랑수아와 재회한다. 프랑수아는 곧 안나와 다시 섹스를 하려하지만 안나는 그에게 침을 뱉고 떠난다. 여기서 안나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섹스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대체자로서 성적 대상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실존하는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며 그런 자기 자신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반복하자면 프랑수아는 플로리안과의 섹스 실패를 대체하기 위해 안나를 찾아갔던 것이다). 안나는 자신의 성장을 포기한다. 그 대신 마리가 바라던 성장을 선택한다. 파티장을 떠나려는 안나. 하지만 마리는 플로리안을 기다린다. 그런 마리가 보는 것은 또다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플로리안이다. 탈의실에서 화가 난 채 플로리안에게 따지는 마리. 그러자 플로리안을 마리를 부르고 둘은 첫 키스를 나눈다. 플로리안의 대답. “이제 알겠지?” 플로리안은 변한 적이 없다. 둘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나 이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건 천장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플로리안은 자신이 이 세계 내에 속한 인물임을 알고 있고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마리가 할 일은 단 하나이다. 그리고 플로리안의 마지막 교육. “만약 쟤 별로면 그때처럼 구하러 와줘”. 


플로리안의 진심을 알게 된 마리는 갑자기 수영장으로 향한다. 그러고는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이윽고 안나가 따라와 그녀 역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들 사이에는 파티에서 홀로 춤을 추는 플로리안의 모습이 교차된다.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춰야만 했던 플로리안은 이제 홀로 춤을 출 수 있다.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가 되었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위험에 처하면 마리가 구하러 올 것이다. 어쩌면 이 춤은 자신의 교육이 성공한 것에 대한 자축의 춤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물 위에 누운 채로 떠있는 마리와 안나의 모습을 부감으로 찍은 쇼트이다. 두 소녀는 더 이상 떠있기 위해 헤엄칠 필요가 없다. 필사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상화에 부합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두 소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물 위에 떠있다. 마리와 안나는 함께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더 이상 천장을 지배하는 죽음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두 소녀(혹은 세 소녀)는 오로지 삶의 활력과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원제인 <La Naissance Des Pieuvres>에서 문어(pieuvres)나 영어 제목인 <Water Lilies>, 즉 수련이 의미하는 것이 마지막 쇼트에서 마리와 안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목의 문어나 수련이 모두 복수형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의 문어 혹은 수련은 하나가 아니다. 마리와 안나가 그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물론 마리와 플로리안. 이 인물들은 다른 공간에 있어도 서로 함께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간다. 셀린 시아마의 다른 인물들 역시 그렇다. 아마 로레가 다시 혼자가 되는 순간에, 마리엠이 울고 있는 그 순간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순간에 셀린 시아마의 소녀들이 나타나줄 것이다. 다행히도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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