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심연을 마주하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욥기 41장 31절~33절).
1. 먼저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리바이어던>. 성경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 기독교 칠죄종 중 하나인 질투를 상징하는 악마. 혹은 토마스 홉스의 그 유명한 저서. 절대 군주의 상징. 아마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리바이어던(레비아탄)은 타락천사 루시퍼의 창조물로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을 폭풍우를 일으켜 죽이거나 타락 시킨다고 한다. 토마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창조한 국가라는 괴물을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리바이어던’은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 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제목은 메타포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메타포인가? 아마 가장 쉬운 방법은 바다를 리바이어던으로 환원하는 은유일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바다는 그저 어둡고 거칠 뿐, 괴물이 아니다. 바다는 자신의 존재양식대로 존재할 뿐 어부들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마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조금 더 밀고 들어가보자. 리바이어던이라는 전설 속 괴물과 이 영화가 공유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바다라는 공간. 그리고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과 그 선박 위에서 노동을 이어가는 어부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이 개념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완전히 구분되어 보이는 이 개념들은 영화 안에서 생생하게 하나의 실체로서 묶일 것이다. 여기서 반문. 그 개념들을 하나로 묶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개념이 마치 삼위일체처럼 하나의 실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아마 지금쯤 당신은 내가 개념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바다라는 개념. 선박이라는 개념. 어부라는 개념. 이 개념들은 물론 영화 안에서 분명하게 실재하고 실존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것들을 실재화 시키는 실존양식이다. 바꿔 말하자면 어떻게 실존하는가의 문제. 영화 안에 이 개념들을 하나의 실재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어쩌면 이 질문은 이렇게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실제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영화는 지금 무엇을 찍고 있는가? 질문이 이렇게 바뀌는 순간 하나의 대답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영화 내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다. <리바이어던>은 노동을 찍은 영화이다. 이때 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리바이어던>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노동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노동이 아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영화는 인간의 노동만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영화에는 인간의 노동만이 아닌 다른 노동이 함께 등장한다. 어떤 노동?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의 노동.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활동하는 바다의 노동. 그러니 이 노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적 의미로 읽을 수는 없다. 여기서의 노동은 세계가 활동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운동과도 같은 것이다. 노동이라는 운동. 운동하는 세계. 이 운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바다는 바다의 방식으로, 선박은 선박의 방식으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로 노동한다. 노동의 분유. 분유되는 운동.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리바이어던’이란 바로 이 노동 자체, 그리고 노동이라는 운동을 통해 유지되는 세계 그 자체일 것이다. 이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괴물.
2. <리바이어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촬영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두 가지 방식. 먼저 이 영화에서 촬영은 시종일관 너무 피사체에 가깝게 다가간다. 카메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그물을 걷어내고 잡은 물고기들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지나치리만큼 가까이서 담아낸다. 우리는 영화 내내 어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다. 어부들의 대화도 수많은 소음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리바이어던>은 어부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유일한 관심은 그들의 노동뿐이다. 손들의 노동. 노동하는 손. 노동으로서 살아 숨쉬는 인간. 여기에는 인간의 노동만이 있지 않다. 영화는 바다와 선박의 노동까지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다. 어떻게? 두 번째 방법.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캐스팅-테일러는 선박 바깥쪽에 카메라를 달아놓았다.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바다의 거친 파도에 따라 흔들리는 선박의 움직임. 바다의 안과 밖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카메라. 격렬하게 느껴지는 선박의 운동. 그 선박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고기의 피와 시체, 그리고 부산물들. 카메라는 인간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이 노동을 밀착해서 찍는다. 이러한 노동은 선박 위에서도 펼쳐진다. 손질된 물고기의 시체와 그물에 걸려 함께 올라온 부산물들이 바닥에 버려지고 곧 바다로 떠내려간다. 이윽고 바다에 버려진 부산물들은 바다로 되돌아가거나 수많은 새떼가 먹어 치운다. 하나의 순환. 하나의 운동. 노동이라는 운동. 인간이 선박 위에서 자신들의 노동을 이어나갈 때 선박 역시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자신의 노동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바다는 인간에게 노동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고 그들의 노동이 남겨놓은 부산물을 처리하며 이 순환을 완성한다.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순환. 거대한 괴물 같은 운동. 이때 이 순환을 이루는 운동들은 하나를 이루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영화의 한 장면. 한 마리의 새가 선박 위로 들어온다. 아마 선박 위에 있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 온 것 같다. 카메라는 이 새에게 아주 밀착하여 다가간다. 잠시 바닥을 살펴보던 새는 앞쪽에 세워진 판자를 넘어가려고 한다. 이 판자를 넘어가면 어부들이 노동하는 장소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먹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경계. 새는 판자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판자를 넘지 못한다. 물론 이 과정을 카메라는 아무 개입도 없이 지켜볼 뿐이다. 결국 새는 이를 포기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물론 영화에서 이 장면만을 인위적으로 연출했을 리는 없다. 이 장면은 돌이켜봐도 굳이 영화에 넣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캐스팅-테일러는 영화에 이 장면을 포함시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아주 길게,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새가 판자를 넘지 못하는 지가 아닌 이 장면이 영화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메타포. 은유로서의 작용. 새가 어부들의 장소에 들어가는 순간 이건 단순히 새 한 마리가 선박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바다의 노동은 인간의 노동에 개입하는 것이고 분유 되어 있던 운동의 순환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 되어야 한다. 조금 쉽게 얘기해보자. 바다의 운동이 지나치게 과해지는 순간(예컨대 폭풍우나 해일) 인간에게는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선박의 운동이 멈춘다면 당연히 인간의 노동도 멈출 것이다. 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운동이 멈추는 순간 다른 노동은 함께 멈추거나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 장면을 통해 이 말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순하다. 그건 영화에 담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인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지 않는 이상 다큐멘터리에서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포착한다고 해도 재난이 인간을 파괴하는 그 순간을 영화에 포함시킨다면 그건 시선의 윤리라는 거대한 윤리적 문제와 맞닿아드릴 것이다. 그럴 때 영화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장면을 메타포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 담기에도 거대한 이 운동. 어쩌면 영화가 피사체에 계속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 어마어마한 운동을 한 번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에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은 이 운동이 너무 거대해서 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순환 안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야 한다. 분업. 이 단어를 읽는 순간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분업의 생산 수단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이 노동의 자본은 누가 소유하는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요점을 놓친 것이다. 다시 한번. <리바이어던>은 인간만의 노동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이 노동은 이 거대한 세계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동력으로서의 운동이다. 그러니 이 운동의 주인이 있다면 바로 노동 자신이다. 노동은 자기 자신을 소유하면서 그 중 일부를 필요한 존재들에게 분배한다. 그 안에서 바다와 선박과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방식대로 노동하며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노동은 이 모든 존재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만약 이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 순환을 원래대로 회복할 것이다. 분업의 결정권을 가진 자에게 절대 권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을 포함한 세계 내 존재들은 노동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절대적인 실존 양식. 마치 홉스의 표현과도 같은 거대한 괴물. 인간은 이 실존 양식을 잃어버리는 순간 거대한 절망과 마주할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낸다.
3. 내내 숨막힐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지던 영화가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카메라는 어느 순간부터 한 선원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착실하게 노동을 이어가는 선원을 따라가던 중 영화는 부감으로 선박 전체를 바라본다. 이 낯선 쇼트. 내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던 카메라가 갑자기 피사체와 거리를 둔다. 위에서 바라본 선박은 누군가가 그 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평온하게 보인다. 그리고 다음 쇼트.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선원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고된 노동에 지쳤는지 그의 눈에 졸음이 쏟아지고 있다. 선원은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잠에 든다. 그리고 영화는 곧장 다음 쇼트에서 다시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을 보여준다. 왜 이 장면들을 넣어야 했는가? 영화는 한 번도 한 개체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저 개인이 수행하는 노동을 찍을 뿐이다. 그런 영화가 처음으로 개체를 찍는 순간은 노동이 잠시 멈춘 순간이다. 그때 어떤 모습이 비춰지는가? 노동을 멈춘 선박은 평온하지만 이전에 느껴졌던 생동감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하지 않는 선박은 의미를 잃게 된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원. 처음으로 영화가 노동을 멈춘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의 모습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잠에 드는 모습이다. 또 하나의 메타포. 노동이 멈추는 순간. 이때 노동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던 존재들은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잃어버린다. 그런 존재들에게 남은 것은 무기력하게 잠(죽음)에 드는 것뿐이다. 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인간은, 선박은,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다시 노동하기 위해 나가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영화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노동을 끝내고 편히 쉬는 인간이 아니라 노동 없이는 자신의 실존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초상이다. 마치 자연에서 인간이 생존을 위해 창조한 절대권력처럼. 이 역시 영화는 메타포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이 무시무시한 괴물. 두려우면서도 경외할 수밖에 없는 노동이라는 괴물. 진정한 ‘리바이어던’. 아마 그 선원도 다시 선박을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또 하나의 순환. 혹은 굴레. 잠에서 깨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아마 이 괴물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날까지 이 순환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족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꽃을 수 있겠느냐.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기 41장 4절~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