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서 살아가기를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먼저 한 가지. 나는 아직 박석영 감독의 전작들인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을 감상하지 못한 상태이다. 분명 이 영화들을 보고 <바람의 언덕>을 감상한다면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테지만 그러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어떤 순수한 힘 자체에 이끌려 글을 써내려 갔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다른 영화들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오직 영화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이라면 영화를 보는 나를 매혹시킨 영화 고유의 리듬과 운동성을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실패 자체에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시작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부디 영화를 먼저 보고 읽으시기를 바란다.
1. 새하얀 눈이 쌓인 겨울, 환희가 설산에 오르고 있다. 곧장 환희는 자신의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 풍경을 담는다. 그런 환희를 따라가던 영화는 언덕에 앉은 환희를 바라본 채 프롤로그를 끝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환희가 자신의 강습소(이자 집)으로 돌아와 현상한 사진을 벽에 붙인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순간에 두 장면, 두 공간 사이에 어떤 분리가 일어나는 듯 보인다. 어떤 분리? 물론 단순히 앞쪽의 프롤로그를 환희의 꿈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우리는 환희가 존재했던 ‘바람의 언덕’이라는 공간과 사진 속에 담긴 ‘바람의 언덕’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바람의 언덕이라는 공간이 나오는 것은 영화의 시작과 끝, 단 두 장면이 전부이다. 이때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은 오직 환희(혹은 마지막에 함께 등장하는 영분)뿐이다. 이 공간은 단순히 하나의 메타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언덕은 환희가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공간. 도시를 벗어난 자연. 물론 그렇다고 환희가 도시 속에서 눈에 보이는 수많은 관계에 둘러싸여 살지는 않지만 도시라는 공간은 환희가 그녀 자체로서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필라테스 강사로서 수강생을 모집하고 가르치며 그 관계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존재를 위한 관계의 연속. 환희는 그 관계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아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환희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던가? 관계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지만 환희에게는 이러한 관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없었다. 오직 그녀 스스로 이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바람의 언덕은 이러한 모든 관계성이 배제된 채 환희의 온전한 존재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리고 환희는 이 공간을 자신의 사진 속에 담아낸다. 사진 속에 담긴 바람의 언덕은 더 이상 하나의 공간이 아닌 환희의 존재성 그 자체로서 변환된다. 메타포의 이미지. 이미지로서의 메타포. 이때 이 이미지에 담긴 것은 바람의 언덕의 공간만이 아닌 환희 그녀자신이다. 환희가 찍은 것은 단순한 겨울 풍경이 아닌 그녀 자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실존이자 존재성이다. 그러니 <바람의 언덕>이라는 제목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공간이 아닌 환희 그 자체이다. 이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간다면 왜 영화가 바람의 언덕에서 시작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환희를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그녀자신뿐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기억이나 사건이 있지 않다. 영화는 인물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을 생각이 없다. 대신 첫 장면에서 그 모든 사건을 자신의 육체와 기억 속에 함축하고 있는 인물의 존재 그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는 환희의 불행을 전시하거나 불행의 원인을 찾아 도덕적 비난을 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이 사건과 기억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세계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물이 세계 속에서 버틸만한 힘을 부여하는 공간이 바람의 언덕이다. 언뜻 보면 환희는 매우 고독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 고독 안에서도 실존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건 아무 전화도 오지 않은 휴대폰으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그녀에게 영분이 찾아올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 하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과거. 이 만남은 지금까지 환희가 겪어왔던 관계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실존의 성장통.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의 도래. 이때부터 바람의 언덕에 있었던, 사진 속 공간에 있었던 환희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영화가 첫 장면에 환희를 등장시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소녀가 앞으로 전혀 새롭게 태어날 것을 미리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영분은 환희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분명한 사실이다. 함께 동거하던 남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태백으로 간 것은 자신의 동생 윤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결혼을 여러 번 했다는 그녀에게도 함께 살았던 윤식이라는 남자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음에도)그녀에게 큰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윤식의 부재는 삶의 거대한 공백으로 다가온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동생을 찾아갔으나 그곳에는 동생이 아닌 환희에 대한 소식이 담긴 편지만이 남아있다. 사실 환희도 영분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아이러니한 상황. 관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또 다른 거대한 공백을 마주한다. 어떤 공백? 끝내 책임지지 못했던 과거. 모성의 죄책감. 영분은 이걸 마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관계가 사라졌을 때 이를 대체하는 것이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이다. 영분이 환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영분이 찾아간 자리에는 자신이 의지 할만한 새로운 관계가 아닌 자신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동시에 실존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 영분은 환희보다 먼저 이 순간을 만나게 된다. 아니, 차라리 환희는 애초부터 이를 마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환희가 자신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고 한들 그녀는 이미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바람의 언덕에서 보여줬다. 하지만 영분은 그렇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그녀가 의존할 수 있을만한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 아마도 영분이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은 환희를 버렸다는 과거의 근원적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에게로 도망치기 위한 과정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가 결혼을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온전하게 의존 할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영분에게, 자신의 동생과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이제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 대신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실존하는 삶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근원지를 찾아온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이 잊어버리고자 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과거는 잊힐지 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영분은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과거의 죄책감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해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마치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오이디푸스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 영분은 아직 이를 받아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동생에게서 받은 환희의 명함을 버리고 가버린다. 하지만 카메라는 영분이 버린 명함을 쫓아가 아주 가까이서 담아낸다. 마치 영분이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다음날 영분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다리 위에서는 택시 기사 윤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난해한 인물. 아마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기억해낼 것이다. 윤식은 영분과 얼마 전까지 함께 살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 남자의 이름이다. 그런데 윤식이라는 이름을 한 남자가 다시 등장한다. 그저 흔한 이름이니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영분과 술을 마시면서 윤식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분명 영분은 자신과 동거하던 윤식을 떠올리는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윤식이라는 택시 기사는 마치 영분과 함께 살던 윤식이 유령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왜 돌아와야 했을까? 혹시 영분이 아직 윤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윤식에 대한 애도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에서라면 택시 기사 윤식은 영분의 환상으로 끝나야 하지만 택시 기사 윤식은 분명 영화 안에서 실존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영분은 윤식과 확실하게 작별을 고하듯이 집을 떠날 당시 윤식이 투병했던 것처럼 보이는 침대에 작별인사를 남겼다. 이 유령은 영분이 소환한 유령이 아닌 영화가 영분을 위해 보낸 유령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보낸 것일까? 혹은 무엇이 영화로 하여금 이 유령을 보내도록 만든 것일까?
3. 윤식이라는 인물은 이상하리만큼 영분에게 포용적이다. 영분이 다리 밑에 버린 환희의 명함을 되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는 동안에도 도망가지 않고 그녀를 기다린다. 그 후에 영분이 환희와 처음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갑자기 영분이 늦은 밤에 배가 고프다고 하자 함께 식당을 찾아 밥을 먹기도 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 다음부터이다. 영화에서 영분이 환희를 제외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윤식이 유일하다. 영분이 윤식과의 대화에서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아닌)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과거가 아닌 이에 대한 회상이라고 말했다.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실재를 마주하는 것이지만 회상을 마주하는 것은 표상을 마주하는 일이다. 표상은 해석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는 순간 표상의 변화가 나타난다(오이디푸스가 경험하는 것도 사건의 변화가 아닌 사건에 대한 표상의 변화가 아니던가?). 윤식이 영분과의 대화를 통해 유도하는 것은 이러한 표상의 변화이다. 해석의 차이. 과거에 대한 회상의 변화. 영분은 윤식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이야기한다. “나는요, 되돌리고 싶어요. 나는 되돌리고 싶어.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하는 말. “아오, 억울해”. 여기서 영분은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읊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겪었던 과거에 대한 현재 자신의 회상만이 남아있다. 그러자 윤식이 말한다. “억울하기 뭐가 억울해. 사람은요, 그 나이대 진실이 있어”. 그때의 진실. 여기서의 진실은 진리나 실재와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런 과거의 선택조차 긍정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그것이 진실이 될 때 비로서 과거는 전혀 다른 회상을 통해 다가올 것이다. 윤식은 영분에게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표상을 마주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표상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건 영분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표상을 돌파해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에서야 표상의 이면에 숨어있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건 영분의 과거를 감싸고 있던 표상이 영분으로 하여금 실체로부터 계속 멀어지도록 만드는 부정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영분이 겪고 있는 문제는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표상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영분이 그 실체를 몸소 자신의 삶 안에서 긍정할 수 있을 때 비로서 가능하다. 표상을 마주하는 것. 마주한 표상을 돌파해 나가는 것. 그러면서 그 뒤에 숨겨진 실체를 긍정하는 것. 그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표상을 원동력으로 삼아 실존의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를 알려주는 인물의 이름이 윤식인 것도 영화가 영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의 이름을 빌려 그녀에게 사건 자체가 아닌 기억을 마주하도록 제안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영분과 윤식 사이에 무슨 일이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윤식에 대해 매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때 남아있는 것은 윤식이라는 남자에 대한 영분의 회상이 전부이다.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남자가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듯이 영분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다시 해석되고 긍정할 수 있기를 영화는 바란다. 그래서인지 일분, 이분, 삼분이 아닌 영분이라는 이름조차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윤식과 대화를 하던 영분은 자신의 합창단 시절을 언급하며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 순간이 특별한 것은 영분이 자신의 과거를 몸소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현은 더 이상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과거 자체를 마주할 때 비로서 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떠한 해석도 없다. 표상의 흔적들을 치워내자 실체가 그 자리에 드러난다. 영분은 그저 그때처럼 노래하고 있다. 윤식은 그 앞에서 그녀의 무대를 감상하고 있다. 이전까지 영분과 윤식을 각각 원 샷으로 번갈아가며 찍던 카메라는 노래하는 영분과 감상하는 윤식을 한 프레임 안에 투 샷으로 담아낸다. 노래가 끝나자 윤식은 박수를 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난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퇴장한다. 유령의 임무는 끝났다. 영분은 이제 과거를 긍정하고 이 세계에서 홀로 버틸 수 있는 법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영분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4. 환희와 영분은 갑자기 만난다. 정말 아무 준비도 없이 서로 만난다. 영분은 환희가 일하는 강습소에 찾아갔지만 앞에서 서성일 뿐이다. 그때 환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다. 대면의 순간. 이때 문제는 무엇인가? 환희는 영분을 강습소에 찾아온 손님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영분은 손님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마주하기 위해 온 것이다. 불균형한 상황. 이때 상황의 간극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둘 사이의 정보의 격차가 아니다. 영분은 자신을 필라테스 수강생으로 생각하는 환희에게 자신이 여기 온 진짜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환희의 규정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간극이 나타나는 곳은 환희와 영분 사이가 아닌 영분 자신에게 있다. 환희가 규정한 정체성. 영분 자신이 되고자 하는 정체성. 둘은 공존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희와 있을 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 사이에서 영분은 환희가 규정해준 정체성을 선택한다. 이제부터 영분과 환희는 필라테스 선생과 수강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한다. 한 가지 반론. 영분은 환희에게 표면적으로만 수강생인 척하고 그 뒤에서는 어머니처럼 행동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본인이 직접 환희의 필라테스 학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나요? 우리는 여기서 이면 대신 표면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영분의 목적이 오직 딸과의 재회라면 그냥 환희에게 자신이 엄마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에도 가장 쉬운 길을 버리고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선택의 이유를 표면에서 찾아야 한다. 영분이 환희를 위해 몰래 해주는 일은 선생과 수강생의 관계 안에 종속된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분은 자신과 환희의 관계를 오로지 선생과 수강생이라는 관계 안에 가두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걸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근원적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한 퇴행적 행위라고 보면 안 된다. 이 행위에는 영분의 모성애 역시 계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때의 모성애는 단순히 딸에 대한 소유욕이 아닌 자신의 딸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버텨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영분이 돕고 있는 인물은 필라테스 강사도, 자신의 딸도 아닌 필라테스 강사로서의 딸이다. 두 가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딸이라는 존재는 어머니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어머니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딸에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삶에서 또 다른 수사가 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순간부터 딸은 어머니에게서 자립하여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여기서 모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전까지 이어지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붙잡는 것이 아닌 자신과 독립적으로 살아가야할 개인에게 본인만의 방법으로 힘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와 딸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개인은 그 성장통을 오롯이 겪어야 한다. 게다가 영분은 과거에 이미 환희와 맺을 수 있었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던가? 영분 자신도 이미 포기한 관계에 대해서 자격을 요구할 생각이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딸이 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을만한 힘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건 영분이 이미 다른 곳에서 배운 것이 아니던가? 윤식이라는 유령에게서, 영화가 보낸 유령의 가르침을 (물론 방법 자체는 다르지만)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으니 그 가르침을 딸에게도 알려줄 차례이다. 그래서인지 영분이 자신이 버린 환희의 명함을 찾는 장면은 영분 본인이 아닌 윤식이 시킨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당신의 딸을 포기하나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딸을 만나야 해요. 그래야만 당신의 딸도 함께 나아갈 수 있어요. 영분은 그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은 하나의 선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선택을 마주할 때가 왔다.
5. 영분과 동거하던 용진은 수소문 끝에 영분에게 찾아왔다. 영분에게 상속재산포기 청구서에 인장을 받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용진의 큰 아버지는 가족도 아닌 영분이 윤식의 재산을 상속 받는 것이 불쾌한 것 같다. 영분은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용진은 이걸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용진의 도착은 그 자체로 어떤 불길함을 가져다 준다. 어째서? 영화 내에서 용진은 가장 나약한 인물이다. 영분이 처음 보이던 모습처럼 의존적인 인물. 용진은 과거 자신이 기댈 수 있던 그 관계의 연장을 위해 찾아왔다. 영분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 용진과의 관계의 청산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건 무엇과 유사한가? 영분은 과거 자신이 환희에게 했던 행위를 용진에게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던 그때처럼, 용진에게서 도망치는 영분. 다시 한번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부인한다. 부인하는 것은 곧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언제든지 회귀하기 마련이다. 용진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환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의 학원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허가 범위 밖까지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영분이 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환희는 처음 듣는 일이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갔더니 정말 수많은 포스터가 자기도 모르는 새 붙여져 있다. 당황하며 포스터를 떼어내던 환희는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는 영분을 발견한다. 아마 누군가는 영분이 그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이런 사건이 생길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물이다. 왜 그런가? 혹시 영분이 자신 안에 품고 있던 괴리가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영분의 모성애가 지나치게 발현된 것일까? 내가 질문하고 싶은 점은 이 장면이 영분과 용진이 만나는 장면과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배치 안에서 유사성을 찾아야 한다. 이 장면들 안에서 영분과 환희가 각각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분은 용진을 찾은 적인 한 번도 없다. 윤식과 달리 용진은 영분에게 스쳐가는 한 명의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영분은 용진에게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곳은 영분 뿐이다. 이때 영분이 깨닫는 것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끼치고 있던 힘의 실체이다. 어떤 힘? 용진에게는 영분의 모성애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영분은 용진의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생물학적, 혹은 사회학적인 대답에 불과하다. 용진에게 있어 영분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영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진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의지 바깥의 모성. 의지에서 벗어난 모성. 물론 영분은 이러한 모성을 이미 어린 시절 환희에게서 경험한 바가 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된다고 자동적으로 모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의지하지 않았던 모성. 영분은 스스로 그 모성을 포기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환희에 대한 모성은 영분이 분명하게 인식하였지만 용진에 대한 모성은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타났다. 인식의 문제는 곧 책임에 대한 윤리적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영분이 환희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은 영분 자신이 환희를 향한 모성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희에 대한 모성을 영분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포기했다. 그녀의 의지는 곧 자신이 짊어질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의지와 인식이 행위에 작동했기 때문에 영분에게 책임에 대한 명분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용진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모두 결여되어 있다. 사실상 영분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용진을 그녀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때 용진의 입을 빌려 영화는 영분에게 질문할 것이다. 당신이 떠나면 이 나약한 남자는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때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모든 행위와 과거에 대해서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대에는 한계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를 <바람의 언덕>은 책임의 윤리적 문제와 함께 질문하고 있다. 환희의 문제로 넘어가보자. 환희는 자신 몰래 포스터를 붙이는 영분을 발견하고 영분이 자신이 그토록 찾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환희가 왜 이를 대면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환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관객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전화이다. 표면적으로 이 전화는 허가 범위를 벗어난 포스터를 떼라고 통보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게 이 전화는 환희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알려주는 전화인 것만 같다. 너의 어머니가 지금 여기 있어. 빨리 와서 만나봐. 왜 알려주어야 하는가? 영분이 포스터를 몰래 붙이는 것은 자신의 딸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힘을 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환희가 이 힘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이 관계는 딸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 관계가 아닌 어머니와 딸의 호혜적 관계로 탈바꿈한다. 대상에서 주체로의 성장. 영화는 환희를 일방적으로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는 인물로 만들 생각이 없다. 인식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환희는 단지 좋은 수강생이라고 생각했던 영분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때의 관계는 이전까지의 상투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라테스 강사와 수강생으로서 맺은 관계는 서로에 대한 표상을 관계성 안에 가두는 작업이었다. 표상들의 관계. 이 표상의 껍데기를 뚫어내고 실재가 들어나고 있다. 영분 자신이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실재. 두 장면에서 공통점은 영분과 환희 모두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던 힘을 발견하면서 관계의 상투성 이면에 숨어있던 관계의 실재와 마주한다는 것이다. 표층을 뚫어낸 심층. 심연을 마주한 자들. 우리는 이미 환희가 영분에게 자신의 실존이 담긴 바람의 언덕 사진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여기서부터 둘 사이의 상투적 관계성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환희가 자신의 실재를 주었으니 영분도 맞교환을 해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할 단계이다.
6. 환희가 어머니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영분은 (딸이면서)강사와의 만남을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아마 이 표현을 보자마자 이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의 괴리. 이제 괴리는 영분에게서 영분과 환희 사이로 자리를 옮긴다. 환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하나는 지금 둘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표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럼 두 모녀는 삶의 끝까지 서로를 필라테스 강사와 수강생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건 영분이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또 다른 선택. 표상을 걷어내고 실재와 마주하는 것. 그때부터 두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환희는 후자를 선택한다. 영분과의 수업은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영분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고 환희는 그런 영분을 뒤에서 바라본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숨이 막히자 비닐봉지에 숨을 뱉어낸다. 이미 우리는 환희가 숨이 막히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환희의 숨이 막힐 때는 모두 관계의 무게에 짓눌리는 순간들이다. 관계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실존의 고독. 그 고독이 그녀의 숨통을 조인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관계들이 모두 표상들 간의 관계였다면 이제는 실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어머니라는 실재. 딸이라는 실재. 실재들 간의 관계. 이 관계는 표상들 간의 관계보다 훨씬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누를 것이다. 영분이 이 실재를 외면한 것도 이 무게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건 자신만이 아니라 딸 역시 그 무게를 견디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신과 딸의 관계를 끝까지 표상 안에 가둬 두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실재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내 딸이 발견했다. 그걸 발견한 딸은 거의 발작을 일으키면서 쓰러진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무게. 환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영분은 이미 떠난 상태이다. 자신의 딸이 쓰러지는데도 도와주기는커녕 매정하게 떠나는 어머니.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과 딸의 관계를 다시 표상의 상투적 관계로 회귀시키는 것 역시 아니다. 한 번 실재를 마주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영분의 모성은 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 딸이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영분 자신 역시 딸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실존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까 딸을 위해 내린 선택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도와주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배반하는 것이다. 어떤 배반? 환희를 도와주는 순간 어머니와 딸의 종속적 관계가 형성되고 지금껏 둘을 규정하던 선생님과 수강생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진다. 그건 영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다시 반복. 어머니와 딸의 관계. 그리고 수강생인 어머니와 선생님인 딸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영분은 모녀의 관계 안에 또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실재가 나타날 때 남는 것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뿐이다. 영분은 이를 거부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이 모성은 드러나는 순간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식이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종속적 관계 또한 회피할 수 있다. 환희는 이제 그 무게를 스스로 견뎌야 한다. 환희를 떠난 영분 앞에 용진이 다시 나타난다. 떠난 줄 알았던 용진은 아직 그녀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용진은 영분이 직접 도장을 찍은 상속재산포기 청구서를 직접 찢고 영분에게 묻는다. “우리 아빠 진짜 좋아는 하셨어요?” 이 말의 번역본. “나는 잊어버린 건가요?” 영분의 대답. “모르겠어. 잊어버렸어”. 단호한 대답에 용진이 한탄한다. “그러시구나”. 영분이 반박하듯이 묻는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되니?” 그러자 용진이 재반박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돼요?” 두 질문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영분은 용진과 윤식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어하지만 용진은 그녀를 놔 줄 생각이 없다. 그의 삶은 영분에게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영분은 다시 한번 실재와 마주한다. 어떤 실재? 자신도 몰랐던 모성의 실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용진을 살게 해주었던 모성. 과연 이 모성을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질문. 영분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저 멀리서 환희가 오고 있다. 두 개의 모성. 두 명의 (불완전한)자식. 어떻게 이들을 품에 안을 것인가의 문제.
7. 용진과의 대화 이후 영분은 떠날 준비를 한다. 그녀는 용진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일까? 돌아가는 길에 영분은 자신이 그동안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모두 떼어낸다. 모성의 흔적을 지우는 어머니. 딸은 그런 어머니가 남긴 흔적을 따라 어머니를 쫓아간다. 그리고 다리 위, 영분이 환희의 명함을 되찾은 장소에서 딸과 어머니가 만난다. 환희가 포스터를 떼어내는 영분을 말리자 영분이 말한다. “버리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환희와의 모녀 관계를 다시 포기하고 싶은 영분.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환희가 여러 번 묻는다. “왜 그래요?” 영분이 반박한다. “넌 왜 그래? 여기서 뭐 하세요 선생님?” 그러자 환희가 대답한다. “엄마. 엄마잖아. 맞잖아”. 처음으로 엄마를 부르는 딸. 하지만 엄마는 딸을 부를 생각이 없다. 아니, 딸이 부디 선생님으로서 남기를 바란다. 계속 자신을 위악적으로 대하는 엄마에게 환희가 질문한다. “이럴 거면 왜 왔어?” 영분은 이상한 대답을 내놓는다. “나 같이 살던 사람이 죽었거든. 그래서 돈이 필요해. 돈 좀 줘라. 한 번만 줘. 그럼 다신 널 찾아오지 않을게”. 하지만 영분도 환희가 돈을 빌려줄 수 있을만한 사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건 자신과 환희의 관계를 채무 관계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모녀가 종속된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채무는 무의미하다. 그건 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영분이 지속적으로 자신과 딸의 관계를 상투적 모녀 관계로부터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나타나 있다. 같은 메커니즘의 다른 방법. 하지만 환희는 말한다. “나는 보고 싶었어요”. 이 말 한마디에 영분의 노력은 무너진다. 아니,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자 영분이 방법을 바꾼다. “난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너 때문에 나는 평생 나쁜 사람으로 살아야 돼. 아 끔찍해. 아 갑갑해. 난 억울해”. 영분은 호소하듯이 울먹이며 말한다. 이 말은 오해 받기 쉬워 보인다. 여기서 영분은 자신이 겪은 불행의 책임을 무고한 딸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분이 가리키는 것은 환희가 아닌 원치 않게 환희를 낳았던 과거의 사건 자체이다. 모성의 죄책감. 근원적 죄책감.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환희의 뒤를 받쳐준 것이다. 하지만 그 모성이 드러난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떠나는 것뿐이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 딸이 본인의 삶을 살도록. 이 말을 들은 환희의 대답. “나는 안 미워. 한 번도 안 미웠어. 난 어떻게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엄마 나 낳을 때 나보다 어렸잖아. 나 어른이야”. 아이와 어른의 차이. 어른은 아이가 책임질 수 없는 것도 책임질 수 있는 주체이다. 환희는 이제 자신도 엄마처럼 어른이니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은 어른이니 책임질 수 있다는 말에는 그때는 어렸으니 아무 책임도 없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사건에 대한 책임의 부재. 책임이 사라지는 순간 영분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해진다. 환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분은 분명하게 대답한다. “아니야. 미안해. 나도 살고 싶어”. 이 한마디에 더 이상 환희는 반박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명징한 대답. 이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살고 싶다. 그리고 살기 위해 떠난다. 영분은 위악적인 태도 뒤에 숨겨오던 자신의 진심을 드러낸다. 또 다른 실재. 살고자 하는 실존의 초상. 영화가 궁극적으로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 영분은 자신의 실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책임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것이 영분의 윤리이다. 환희는 떠나는 어머니를 조용히 지켜본다. <바람의 언덕>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녀 사이의 상투적 관계 자체가 아닌 그 관계를 견뎌야 하는 실존의 모습을 묵묵히 주시하기 때문이다. 다리 위에서 두 모녀의 대화를 한 프레임 안에 잡지 않고 각각의 얼굴을 원 샷으로 담아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떠나는 영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환희는 그걸 깨달은 것만 같다. 이제 영분은 떠났지만 그녀는 용진 곁에 없다. 용진은 홀로 집에 돌아온다. 왜 영분은 용진과 함께 가지 않은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용진은 영분과 함께 할 수 없는가?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환희가 다시 바람의 언덕을 찾았다. 첫 장면에서와 달리 눈이 녹아 땅이 드러난 상태이다. 봄이 오고 있다. 환희는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만끽한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그녀의 정면에서 응시한다. 우리는 카메라가 환희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장면을 이미 한 차례 보았다. 처음 어머니가 자신 대신 붙여놓은 포스터를 발견하는 순간. 두 장면은 모두 자신의 삶이 바뀌는 전환점을 환희가 마주하는 순간의 얼굴을 찍었다. 어머니를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나를 마주하는 순간. 이제 환희의 얼굴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길을 가던 환희는 언덕에 앉아 있는 어머니와 만난다. 이 장면은 현실일까? 아니면 환희의 꿈이나 환상일까? 나는 차라리 세 번째 답을 제시하고 싶다. 이건 환희와 영분의 내면적 진실이다. 영화는 모녀의 만남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별과 만남 사이에 나타나는 비약을 숨기지 않는다(이와 반대로 영분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 하던 용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것과 비교해보라). 이때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람의 언덕이다. 실존이 드러나는 곳. 존재의 충만함으로 가득한 곳. 그 장소에 영분 역시 들어와 있다. 그건 영분이 환희에게 바람의 언덕 사진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실존의 맞교환. 서로의 실존은 서로의 삶에 들어온다. 이것이 환희와 용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용진은 영분에게 의존할 뿐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마주하는 것이나 영분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용진은 바람의 언덕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용진의 삶에는 더 이상 영분이 자리잡을 수 없다. 마치 칸트의 정언 명령 중 인간성 명령을 실현시키는 듯한 대목. 영분의 모성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용진과 달리 환희는 영분의 삶과 실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용진의 곁에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용진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어떻게 되돌아 오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그 두 가지 방식 사이에서 영화는 환희의 방식을 지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엄마의 곁에 앉은 환희. 이윽고 영분이 입을 연다. “나 너무 무서워”. 환희도 대답한다. “나도”. 새로운 시작. 언제나 두려운 일. 아직 바람의 언덕에는 우리가 영화 포스터에서 보았던 따스한 봄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영화가, 혹은 우리가 간절하게 꾸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봄은 언젠간 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