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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n 13. 2021

겨울밤에 리뷰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장우진은 춘천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중년의 부부와 함께. 낯선 소재는 아니다. 그는 이미 전작 <춘천, 춘천>의 두 번째 챕터에서 중년 커플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렇기에 어쩌면 <춘천, 춘천>이 <겨울밤에>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장우진에게 춘천은 단순히 하나의 지역이 아닌 인간의 삶과 세계의 삼라만상이 깃들어 있는 세계 그 자체이다. <춘천, 춘천>과 <겨울밤에>에서는 춘천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 지역성이 부재하는 공간. 그 공간에 들어설 때 인물들의 특수성과 구체성이 사라지고 남은 것들. 무엇이 남는가? 불투명하고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세계와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운동. 무슨 운동?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회귀하고 반복되는 시간의 운동성, 윤회하는 시간. 장우진의 카메라는 그러한 시간의 윤회를 프레임 안에 담고자 한다. <춘천, 춘천>이 연관성이 전혀 없는 세 인물을 두 챕터로 나눠 찍은 것도 서로 다른 존재에게 같은 방식으로 윤회하는 시간, 그러한 시간을 채화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담긴 필연적인 허무와 권태, 그리고 상실감을 찍기 위한 선택이다. 그렇기에 <춘천, 춘천>에서 반복되는 ‘춘천’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에게 같은 지역(세계)이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취업난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미래를 낙관하고 긍정하는 젊은 지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중년의 흥주와 세랑. 아마 흥주와 세랑의 시간은 지현에게 윤회하고 반복될 것이다. 청평사와 같은 절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윤회의 문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장우진의 의도를 나타낸다. 그러한 그가 거의 같은 주제의식과 함께 춘천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차이. 전작의 제목인 <춘천, 춘천>이 영화의 공간성을 강조한다면 <겨울밤에>라는 제목은 영화 속의 시간성을 강조한다. 이 요소들은 각 영화에서 중첩되고 반복되는 요소이다. <춘천, 춘천>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플롯이 춘천이라는 (같은 듯 다른)중첩된 하나의 공간에서 펼쳐질 때 나타나는 차이, 공간의 중첩이 드러내는 반복과 윤회에 집중한다면 <겨울밤에>는 한발 더 나아가 완전히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중첩시키면서 만들어지는 반복과 차이를 보여준다. 겨울이라는 계절, 밤이라는 시간. 그러나 존재가 경험하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같은 경험이 되지 않는다. 같은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 하나의 시간 안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시간대가 뒤섞여있다. 장우진은 그 시간대가 중첩되는 순간의 모호함과 신비로움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이때 중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모든 존재들에게 반복되고 윤회하는 영원회귀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장우진의 영화에서 인간의 삶은 윤회하는 시간 아래에서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을 뿐 결국 영원회귀를 향해 나아간다는 운명론적인 태도와 직결된다. 한 존재가 이미 지나온 시간, 그리고 다른 한 존재가 겪고있는 시간. 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그 순간이 겨울밤이 되었을 때 프레임 안에 잡히는 것들. 그것이 그려주는 한 폭의 수채화. 그럴 때 장우진의 카메라는 한 폭의 도화지처럼 보인다.


2. 은주와 흥주가 춘천으로 들어온다. 카메라는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는 택시의 앞모습을 계속 따라간다. 이때 뒷자리에 타고 있는 은주의 모습은 앞자리의 흥주와 기사에 비하면 어둡고 흐릿하게 보인다. 흥주와 기사는 서로의 추억을 나누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은주가 자신의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고 택시를 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택시가 불법유턴하기 직전 화면에는 <겨울밤에>라는 영화의 제목이 뜬다. 아마 <춘천, 춘천>을 본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눈치챘을 것이다. <춘천, 춘천>에서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은 두 챕터 사이에 위치해있다. 하나의 분기점. 혹은 전환점. 챕터가 바뀌고 공간의 의미가 바뀌는 순간. <겨울밤에> 역시 같은 전략을 반복한다. 택시가 불법유턴하는 순간. 현재의 시간대를 벗어나 이미 지나온 시간대로의 회귀. 중첩되는 두 개의 시간대. 그때 비로서 <겨울밤에>가 시작된다. 무엇을 위해? 잃어버린 은주의 휴대폰을 찾기 위한 여정. 분명 누군가는 이러한 플롯을 본 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는 무언가. 그럴 때 표층으로 드러나는 실존의 초상. 누가 보더라도 <정사>의 플롯. 그리고 마치 <태양은 외로워>의 엔딩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하지만 <겨울밤에>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이 목적 자체를 상실 혹은 망각하게 되는 플롯이라면 <겨울밤에>의 은주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끝까지 기억한다. 자신의 휴대폰. 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겼는가? 예전에 찍은 사진 몇 장. 간절하게 간직하고 있던 나의 과거. 현재를 구성하고 지탱하던 과거가 부재할 때 흔들리는 실존. 그런데 왜 그 역할을 하필 은주, 한 남자의 아내가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누군가는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동원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우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틀린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그런 식의 해석을 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젠더의 문제를 이끌어 들이기보다는 이를 잠시 배제하고 은주와 흥주 각자가 보이는 태도의 차이 자체에 집중할 생각이다. 은주는 영화 내내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리고 흥주는 그런 은주가 못마땅하다. 그녀가 휴대폰을 찾기 위해 문이 닫힌 청평사에 들어가려고 할 때도 흥주는 화를 내며 만류한다. 잃어버린 과거에 매달리는 행위는 흥주에게 용납될 수 없다. 어째서? 은주가 현재의 시간대를 이탈할 때 그녀가 지탱하고 있던 흥주의 실존 역시 흔들리게 된다. 흥주는 그 위기에서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장갑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는 찾을 생각이 없다. 잃어버린 것은 대체하면 된다. (그런데 무엇으로?) 은주는 청평사에서 흥주와 다툰 뒤 갑자기 사라진다. 흥주는 사라진 은주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도중 은주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흥주가 그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은주가 돌아온 것이다. 왜 돌아왔는가? 우리는 그전에 흥주가 왜 그녀를 애타게 찾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은주의 부재는 곧 흥주의 현실이 흔들리는 것이고 흥주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때 이 행위는 은주의 존재를 하나의 실재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환상이 아닌 실재로서의 존재.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대타자로서의 존재. 실재의 부재로 인해 흔들리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흥주는 은주를 찾아야 한다. 이건 바꿔 말하자면 은주 역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흥주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 흥주에게서 벗어났던 은주는 다시 흥주에게 돌아온다. 두 부부는 다시 만난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이때 부부의 뒤 편에는 군인 남자와 그의 친구(라고 말하는)여자가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다. 식당 cctv에서 나왔던 커플. 마치 흥주와 은주의 과거라고 되는 것 같은 존재들. 하지만 이 커플은 부부의 과거라기보다는 부부가 지나온 시간대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로 보인다. 다시 말해 커플과 부부 사이에서 중첩되는 것은 존재가 아닌 시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영화가 사물인 cctv의 시점까지 동원하여 그 둘을 분리하고자 애쓰겠는가? 여기서 문제의 초점은 옮겨간다. 흥주와 은주는 자신들의 과거가 아닌 자신들이 지나온 시간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을 통해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 자체를 마주하게 된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마주했을 때 정말 나타나는 것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권태와 허무로 가득 찬 현재이다. 이를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의 문제. 흥주와 은주는 여기서부터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3. 부부가 열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 그러나 흥주는 잠이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겨울 풍경과 심우도. 동자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선종화(禪宗畫). 한 인터뷰에서 장우진은 심우도를 챕터의 기준으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흥주의 챕터가 시작될 것이다. 흥주는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가게 사장에게 어묵 국물을 얻어 마신다. 그때 흥주의 등 뒤로 하얀 옷의 여자가 지나간다. 흥주 본인도 이를 감지한 듯하다. 카메라는 그런 흥주에게 배경을 지워내듯이 서서히 다가간다. 여자를 쫓아가던 흥주는 한 노래방에 들어간다. 이때 장우진은 방황하는 흥주를 바라보며 카메라 안에 흥주가 잃어버린 장갑을 어떻게 해서든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간신히 프레임에 걸쳐있는 장갑. 현재의 흔적. 마치 이건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카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장면. 노래를 부르다 자리에 앉은 흥주 앞에 그의 뒤를 지나갔던 하얀 옷의 해란이 이상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해란은 술에 취해 앉은 흥주의 맞은 편에서 의자 위로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카메라는 그런 해란을 그녀의 정면이 아닌 뒤에서만 바라본다. 그녀를 본 흥주는 놀란 눈치이다. 함께 그 자리에 왔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리가 없다. 누구든지 이 연출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것이다. 환상의 시작. 현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흥주의 환상. 이때 바로 이전 쇼트에서 등장했던 장갑의 존재를 잊으면 안 된다. 흥주는 지금 잃어버린 장갑의 자리를 해란의 존재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환상으로 대체하는 것. 환상으로의 후퇴. 반복해서 말하자면 잃어버린 것은 대체하면 된다. 어떻게? 흥주는 현실에서 부재하는 부분을 환상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에서 고작 사진 몇 장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은 결국 상상계에 폐쇄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거의 실재가 사라지는 순간 환상은 그 실재를 각각의 상상계 안에서 변질시킬 것이다. 은주가 휴대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재를 잡아두면서 부부의 현실이 안정적으로 고정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내가 썼던 표현을 스스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흥주와 은주 중에서 현실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인물은 흥주가 아닌 은주이다. 은주가 집착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루는 과거의 실재이다. 은주는 부부의 현실이 환상의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기를 원한다. 하지만 환상으로 후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흥주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때 이 환상은 단순히 꿈과 같이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여기서 환상은 대상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해란을 만난 것은 실제의 유무를 떠나 자신의 환상과 마주하는 것이다. 어떤 환상? 흥주는 해란과 함께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회상이라는 환상. 회상은 곧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환상이다. 그것이 흥주가 현실을 버티는 방법이다. 환상 안에서 흥주는 해란과의 뽀뽀를 허락받기 위해 은주에게 전화를 건다. 이때 흥주의 행위는 이전까지 대타자의 자리에 가있던 은주를 소타자에 자리시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라캉적인 의미에서의)거울로의 후퇴. 이 안에서 은주는 흥주에게 대상화 된다. 관계의 균열. 현실의 위기. 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해란과 함께 산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흥주는 경찰에게 단속되어 신분증을 제시한다. 현실이 환상을 멈추는 순간. 해란 역시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운다. 해란이 사라진 후 취한 몸을 이끌고 산을 오르던 흥주는 창문 너머로 젊은 여자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미 해란과 함께 있는 흥주 앞을 젊은 커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때 흥주는 이 커플을 그냥 지나치지만 혼자 남게 된 흥주는 여자를 알아보는 듯하다. 젊음의 시간. 내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시간. 그리고 창문 안쪽에 조명이 꺼지자 유리창에 흥주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그가 진짜로 마주하게 된 것. 결국 환상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자리. 현재의 시간. 그리고 이어지는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다음 장면. 어쩌면 장우진은 투명한 유리창 위에 이 장면을 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4. 젊은 커플은 얼어붙은 폭포를 얼음 위에서 구경한다. 남자는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지만 여자는 경치 구경하기에 바쁘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얼음이 없어 둘은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한다. 남자는 이에 대해 물어보지만 여자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얼음 위에서 불안하게 움직이는 여자가 답답했는지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다가간다. 여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프레임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야 한다. 프레임 안으로 돌아온 남자는 연신 여자에게 화를 내며 물어본다. “얘기를 안 하며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아무도 아냐? 나는 너한테 아무도 아니냐고!” 하지만 여자는 반응이 없다. 소리치는데 지친 남자는 기침을 하며 쓰러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 쪽으로 다가와 함께 눕는다. 그들은 더 이상 얼음이 깨질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장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푸른색의 색감이다. 이 색감은 상당히 인공적인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누군가는 이 푸른 색채를 보자마자 떠올렸을 것이다. 푸른색과 대비되는 붉은색의 색감. 열풍기의 색. 은주와 흥주가 머무는 숙소 방안을 감싸는 색채. 완전히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대. 부부의 시간대는 열풍기의 붉은색이 얼음의 푸른색을 녹이는 때이다. 그들 사이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을 단단한 얼음이 더 이상은 없다. 그러나 젊은 커플은 아직 그 얼음 위에서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다. 미래를 걱정하는 남자는 이 얼음이 깨지거나 녹을 것을 걱정하지만 여자는 그저 자신이 지금 속해 있는 시간대를 긍정할 뿐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 규정해주기를 원한다. 마치 현실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은주처럼. 아마도 <춘천, 춘천>을 본 사람이라면 <겨울밤에>의 군인 남자와 <춘천, 춘천>의 지현을 연기하는 배우, 젊은 여자와 지현이 유람선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여자 승객을 연기하는 배우가 같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춘천, 춘천>에서 서로 지나쳤던 인물들의 만남. 그래서인지 <춘천, 춘천>의 첫 번째 챕터 마지막 장면에서 지현이 유람선 위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마치 구조 요청이라도 하듯이 팔을 흔드는 장면은 <겨울밤에>에서 폭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남녀의 상황과 유사하게 보인다. 여자를 찾는 남자. 침묵하는 여자. 하지만 전작에서 엇갈려 나가며 이어지지 못했던 남녀는 한 프레임 안에서 만나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불안한 현실을 고정하고 여자가 지탱해주기를 바란다(여기에서 은주와 흥주의 자리는 정반대로 뒤바뀌어 반복된다). 그러나 여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여자는 침묵으로서 남녀가 처한 불안정한 현실을 긍정하고자 한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그러면서 그 자체로 무언가가 되는 것. 여자는 남자에게 이렇게 젊음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음의 기운으로 충만한 커플을 얼음 위에 누워 이를 만끽한다. 이 장면 직전에 유리창에 비치던 흥주의 얼굴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흥주의 또 다른 환상일까? 아니면 흥주가 유리창에서 정말 마주한 것을 그려낸 장우진의 수채화일까? 분명한 것은 이 장면을 흥주가 마주했을 때 더욱 부각되는 것은 젊은 커플의 활기가 아닌 더는 이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흥주의 허무와 권태이다. 되돌릴 수 없는 젊음. 깨달음을 얻는 흥주. 그리고 두 번째 심우도. 다음 챕터의 시작.



5. 흥주는 구토를 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한다. 구토가 나오는 순간 흥주는 카메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토사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은주가 발자국을 남기며 나타난다. 마치 흥주가 은주를 토해낸 것처럼 보이는 연출. 이때 흥주가 토해낸 은주는 흥주의 환상 속에 갇혀있던 소타자의 은주이다. 흥주의 환상에서 빠져나온 은주는 소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대타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풍경 너머로 걸어가는 은주. 다시 한번 휴대폰을 찾기 위해 그녀는 청평사에 찾아간다. 스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뒤져보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스님과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후 떠나는 은주. 그녀의 밑에는 젊은 커플이 몰래 담배를 피고있다. 흥주와 달리 은주의 시선을 피한 커플. 은주와 커플의 동선은 계속 아슬아슬하게 엇갈린다. 다시 얼음 위에 눕는 커플. 이윽고 세 번째 심우도가 화면에 등장한다. 세 번째 챕터. 은주는 커플이 있었던 폭포에 간다. 여자가 그랬듯이 조심스럽게 얼음 위에 걸음을 내딛고 물을 만져본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있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던 얼음이 조금씩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와 젊은 여자의 차이. 여자는 얼음 위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서있을 수 있는 젊음, 아직은 가벼운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얼음은 은주가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은주가 가지고 있는 온기가 얼음을 녹인 것일지도 모른다.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힌 은주는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소리를 들은 커플이 나타나 은주를 구해준다. 은주와 젊은 남녀가 만나는 곳. 시간이 중첩되는 공간. 흥주는 그저 바라만 보았던 공간. 그렇다면 왜 은주만이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사실상 “왜 흥주는 만날 수 없었던 젊은 남녀를 은주는 만날 수 있는가?”라고 바뀌어도 무방하다. 한번 더 반복하겠다. 흥주와 은주의 차이. 흥주는 흔들리는 현실을 자신의 환상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은주는 그 현실을 끝까지 지탱하고 고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 환상으로 현실을 메우고자 시도하는 흥주는 젊음의 실재와 직접 대면할 수 없다. 그가 결코 대면할 수 없는 젊음의 시간대를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자리에 밀려오는 (사르트르적 의미로 말하자면)실존의 구토뿐이다. 이 실재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환상이 아닌 실재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재의 영역에서 현실과 마주하는 은주만이 젊음과 대면할 수 있다. 커플과 만난 은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흥주가 창문 밖에서 바라만 보았던 건물. 군인 남자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 두 여자 간의 진솔한 대화가 이어진다. 은주는 자신이 흥주와 싸우고 헤어진 뒤 못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흥주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이윽고 은주는 젊은 여자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러면서 자신과 여자 사이에 중첩되는 점이 꽤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를 나눌 때 은주는 비로소 시간과 삶의 윤회를 마주하게 된다. 내가 겪어왔던 삶의 반복. 타자에게도 윤회하는 나의 시간. 이건 자신의 회상 안에서 폐쇄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는 흥주가 절대 마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거울 안의 자아. 그 자아는 결코 세계의 윤회라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이야기를 마친 은주는 젊은 커플과 헤어진다. 노래를 부르며 떠나는 커플. 그 노래와 함께 화면을 채우는 네 번째 심우도. 흥주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은 은주. 중년의 부부는 열풍기의 붉은색이 가득 찬 방안에서 다시 만난다.


6. 흥주가 침묵을 깨고 먼저 묻는다. “나 밉지?” 은주의 대답. “아니, 난 당신이 나 미워하는 줄 알았지”. 이윽고 흥주가 말을 꺼낸다. “난 그냥 모르겠어. 당신 힘든 거 아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냥 모르겠어. 이제는 그냥 그 모르겠는게 굳어져버린 것 같아”. 흥주는 이제 인정한다. 자신과 은주 사이 메울 수 없는 균열. 부부가 겪고 있는 관계의 위기. 그러자 은주가 말한다. “어렸을 때 참 예뻤는데. 그냥 같이 있으면 내가 행복해 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같이 있었는데 아닌 것 같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그럼 내가 필요가 없잖아”. 흥주의 대답. “필요 있고 말고가 어디 있어. 곁에 있으면 되지”. 그러자 은주가 반박하듯이 대답한다. “외롭더라.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여기서 은주는 자신이 흥주에게 있어 그동안 소타자의 자리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부부의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대상. 그 대상이 대타자의 자리로 옮겨가면서 일어난 위기. 실재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남편과 필사적으로 실재를 붙잡고자 하는 아내 사이의 간극. 그리고 날이 밝아 온다. 부부는 숙소를 떠나 다시 한번 택시를 탄다. 같은 듯 달라 보이는 길. 흥주는 택시 기사와 이전과 유사한 대화를 이어 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뒷자리에 앉은 은주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게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은주가 택시를 세운다. 차가 멈춘 후 은주는 아무 말없이 택시에서 내린다. 뒤쫓아온 흥주가 말을 걸어보지만 그녀는 침묵을 지킨다. 침묵하는 것. 우리는 젊은 여자가 남자에게 침묵한 것을 이미 보았다. 여기서의 침묵은 자신을 표현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현재의 상황을 긍정하는 것이다. 은주는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가? 관계의 위기. 부부 사이의 커다란 간극. 은주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흥주와 달리 은주는 그저 부부가 처한 상황 자체를 긍정한다. 새로운 도약의 순간. 젊은 남녀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 아내는 이제 남편을 위한 대상이 되면서까지 이 현실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긍정이 내포하는 것은 현실의 위기를 넘어 자신에게 다가올 또 다른 윤회의 시간까지도 긍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장우진은 중년의 위 세대, 노년의 세대는 다루지 않았다. 그렇기에 앞으로 두 부부에게 어떤 시간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든 간에 그 윤회의 실재를 외면하면서 현실을 유지하고자 했던 흥주와 달리 그 실재를 대면한 은주는 자신에게 다가올 그 모든 윤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모든 허무와 권태 역시 회피하지 않고 긍정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으로 도약할 수 있다. 심우도를 따라가는 것만 같은 은주. 부부의 뒤편에 서있는 택시는 계속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들. 은주가 지나왔던 공간들. 흥주가 구토를 했던 공간 저편에서 은주가,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들어온다. 안토니오니와는 정반대의 선택. <태양은 외로워>에서 안토니오니가 인물들이 부재하는 공간들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냈다면 장우진은 그 공간에 새롭게 태어난 인물을 보낸다. 이제 은주는 흥주의 대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거듭났다. 카메라는 눈밭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을 다시 한번 내려다본다. 겨울밤에 펼쳐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혹은 이제 끝나도 된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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