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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06. 2021

노 홈 무비 리뷰

이토록 간절한 이미지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먼저 한 가지 양해의 말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지난 6월에 입대한 후 훈련소 과정부터 지금까지 글에 대한 집념과 영화에 대한 흐릿한 기억들에만 의존하여 수기로 직접 쓴 글이다. 또한 영어 자막으로만 영화를 보았기에 잘못 해석한 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다른 글들과는 달리 직접 영화 속 장면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틀린 설명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혹여나 잘못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소망한다. 다만 영화 자체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읽는 데 있어 큰 불편함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1.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잎이 많이 떨어져나가 앙상한 나무는 황무지 한복판에서 거친 바람에 맞서 연약하게 버티고 있다. 카메라는 그 나무와 함께 바람을 견뎌내듯이 흔들림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무를 바라본다. 샹탈 아커만은 여기서 무엇을 찍은 것일까? 가련한 나무를 찍는 것일까? 아니면 그 나무를 쓰러뜨리고자하는 거친 바람을 찍는 것일까? 혹은 그 너머에 있는, 프레임에 담기고 있는 이미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담고자 한 것은 아닐까? 단 하나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이 오프닝 장면은 마치 샹탈 아커만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투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이 장면이 등장할 때 바라보는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건 영화를 보기 전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장면이 처음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서 우리는 <노 홈 무비>가 샹탈 아커만의 어머니에 관한 영화라는 것,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후 세상과 문을 닫으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에는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샹탈 아커만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의 내레이션도 등장하지 않기에 우리는 샹탈 아커만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샹탈 아커만은 어떤 것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나 역시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따라가며 설명하지 않고자 한다. 대신 어떤 의도로 샹탈 아커만이 이러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는지,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지를 따라갈 것이다. <노 홈 무비> 속 쇼트들은 각각 어떤 상호 작용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닌 각각의 쇼트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독립성은 시간적인 연속성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말 그대로 다른 쇼트들로부터의 독립이다. 말하자면 몽타주의 부재. 여기서 영화 속의 한 쇼트는 또 다른 쇼트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쿨레쇼프 효과를 부정하는 것만 같은 선택. 몽타주가 부재할 때 이미지는 어떻게 영화 속에서 버티는가? <노 홈 무비>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 쇼트들의 길이가 평균적으로 꽤나 길다는 것은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고정된 상태로 이미지를 담아낸다. 마치 샹탈 아커만은 다른 이미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온전한 형태의 이미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왜 그것이 필요했는가? 이미지가 몽타주되는 순간,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게 개입 받는 순간 이미지가 지니는 의미작용은 고정되지 않고 수많은 형태로 발산된다. 그건 이미지가 의미작용을 형성할 때 그걸 바라보는 관객이 그 계산 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보는 이들의 경험, 지식, 사회문화적 간극, 그리고 수많은 요소들의 경쟁. 샹탈 아커만은 그 경쟁을 <노 홈 무비>에서 배제한다. 그럼 이미지에는 무엇이 남는가? 단지 1초에 24번 찍히는 활동사진의 잔영만이 남을 뿐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한 가지를 간과한 것이다. 카메라가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 카메라를 잡고 있는 존재를 염두해야만 한다. 시선의 주인. 카메라를 잡은 예술가. 그때 카메라에 담기는 이미지는 감독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광과 동치된다. 모든 것은 투사한 이미지. 샹탈 아커만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경험과 정념을 담고 있는 이미지를 찾아 프레임에 담아낸다. 여기에는 어떠한 개입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노 홈 무비>속 이미지들에는 어떤 간절함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 이 순간을 붙잡겠다는 의지.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이 이미지 안에 투사하고자 하는 의지. 이미지 자체가 되고자 하는 샹탈 아커만. 그러므로 영화 속 쇼트들의 길이가 긴 것은 샹탈 아커만 본인이 자신의 카메라와 자신의 마음을 일치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마음의 풍경을 찍는 것. 가장 찍기 어려운 이미지를 찍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 이 순간 카메라는 자신을 잡은 주인의 시간을 체화한다. 내가 느끼고 있는 시간. 내가 감각한 경험들을 체화한 이미지. 그러니 이 이미지들은 몽타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는 이미지들에 담긴 샹탈 아커만의 시간에 다가가기 위한 공감과 접근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노 홈 무비> 속 쇼트들의 길이가 긴 또 다른 이유이다. 이건 단순히 롱테이크의 미학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롱테이크가 장면 속 운동의 지속을 통해 화면 안의 시간과 감정의 지속성을 담아낸다면 <노 홈 무비>에서의 롱테이크는 샹탈 아커만이 이미지에 다가가는 시간이 동시에 우리가 샹탈 아커만에게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저 황무지를 바라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시나요? 하루하루 나를 떠나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때 경험한 시간의 무게가 보이시나요? 만약 그걸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신 겁니다. 샹탈 아커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노 홈 무비>를 본다는 것은 어머니와 이별해가는 딸이 견뎌낸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간의 이미지. 순간들의 영화.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영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는 심장이다. 가슴으로 보는 영화. 이토록 순수한 이미지. 마치 연약하지만 간절하게 버티고 있는 나무 한 그루처럼. 



2. 아마도 영화를 본 후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부분은 당연히도 영화의 제목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노 홈 무비>. 이 이상한 제목. 이를 읽는 데에는 세 가지 판본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노 홈무비". 이것은 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는 해석. 두 번째. "노홈 무비". 이것은 집이 없는 영화이다. 세 번째. "노 홈 무비". 이것은 집도, 영화도 아니다(그럼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 홈 무비>는 "홈(Home)"이 사라져가는 영화이다. "홈(Home)"이 "하우스(House)"로 바뀌는 과정. 물론 이 변화는 어머니의 부재와 직결된다. 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안식처. 하우스가 홈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 그래서 샹탈 아커만은 하우스를 찍을 생각이 없다. 카메라가 집 안을 찍는 순간은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나 샹탈 아커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집 안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온기와 흔적을 찾아다니는 때, 혹은 어머니에 관해 누군가와 대화할 때가 전부이다. 하우스 안에 베어있는 홈. 그래서 샹탈 아커만은 자신의 집과 어머니의 집을 분리하지 않았다. 이때 당시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샹탈 아커만은 출근하기 전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미국에 있는 그녀의 집과 벨기에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구분할 수 없다. 그건 샹탈 아커만이 그렇게 찍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차이가 아닌 하우스를 홈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어머니의 존재 유무이다. 설사 그것이 화면 속 멀리 떨어진 어머니일지라도.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카메라는 홈을 떠나지 못하는 딸의 간절한 염원마저 깃들어져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바로 황무지의 풍경들이다. 집 바깥의 풍경. 어머니 없는 세상의 풍경. <노 홈 무비> 속의 이미지는 사실상 두 가지로 나뉜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하우스, 다시 말해 홈의 이미지. 어머니 없는 황무지의 이미지. 딸의 마음의 풍광. 그러니까 <노 홈 무비>에는 어머니가 머무는 집 안과 집 바깥의 황무지만이 나올 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샹탈 아커만의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중간에 어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정작 어머니가 산책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건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은 이후 세상과 단절된 어머니의 마음을 담기 위해 딸의 의도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푸른 공원의 평화로운 풍경을 이를 더욱 강조한다. 황무지와 같은 집 바깥의 세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 역사로부터 분리된, 역사가 중단된 삶. 하지만 샹탈 아커만은 그 시선에 역사를 개입시킬 생각이 없다. 영화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설명도, 그것을 겪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내레이션도 없다. 화면 속에는 그 역사를 온몸으로 체화한 실존의 형형한 육체만이 남아있다. 육체의 영화. 그러한 육체를 바라보는 카메라. 그렇기에 더욱 더 샹탈 아커만은 이미지들을 몽타주하며 충돌시키고 조합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노 홈 무비>에서 필요한 것은 육체와 시간이 전부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딸은 그 시간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때 어머니의 시선과 딸의 시선이 일치한다. 어머니의 세상과 딸의 세상은 같은 황무지를 바라본다. 그건 서로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녀 서로의 존재가 필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전부인 여성들. 어머니와 딸. 그 세계에 시간을 천천히 균열을 낸다. 어머니의 육체는 딸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집 바깥에만 머물던 황무지의 이미지는 모녀의 홈으로 침입한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황무지는 점점 더 영화에 자주, 더 깊숙하게 침투한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몸, 떠나가는 딸의 홈. 그러면서 샹탈 아커만의 하우스는 홈에서 황무지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쇼트. 마침내 하우스 안에는 더 이상 홈이 아닌 황무지와 같은 황량한 이미지만이 남아있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 합쳐진 두 개의 이미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무심한 시간의 힘. 이로서 <노 홈 무비>는 그 시간을 바라본 영화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다시 반복. 육체가 견디는 시간, 그 육체를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 그 시선의 주인이 견디는 시간, 마음과 이미지가 일치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 그 시선의 이미지를 이해하기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시간. 한 마디로 시간의 힘을 믿는 영화. 그 모든 시간이 축적된 이미지들. 이걸 바라보는 것을 고통스러운 일이다. 샹탈 아커만도, 우리도 그것을 견뎌야만 진정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의 향연. 연약하지만 아름답다. 



3. 어째서인지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커스틴 존슨의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가 함께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나도 알고 있다. 서로 다른 감독의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 동시에 자칫 무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비평이란 그런 일이 아니던가. 위험을 돌파하는 일. 위험 속에 숨겨진 길을 찾아내는 일.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부모와 이별을 앞둔 딸의 다큐멘터리. 가족의 상실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마주했을 때 영화는 무엇을 찍을 것인가의 문제. 여기서도 나는 두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비교하는 대신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의 실체를 되돌아 보면서 커스틴 존슨과 샹탈 아커만이 어떻게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는지를 보고자 한다(<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마지막 장면. 딕 존슨은 픽션으로 진행되는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본다. 이윽고 논픽션의 딕 존슨은 픽션 안으로 들어간다. 장례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딸의 카메라.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커스틴 존슨이 그토록 분리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실존과 죽음이라는 사건이 만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사건. 사건이라는 픽션. 아직 사건이 실존에 도래하지 않았기에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픽션화하며 여전히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무심하다. 픽션에 갇혀있던 죽음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실존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딸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때 커스틴 존슨의 선택은 그 시간을 뛰어넘고자 하는 선택이다. 딕 존슨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픽션에 뛰어들 때 그의 실존은 죽음이라는 사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때 비로서 아버지의 실존은 시간을 뛰어넘어 딸의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커스틴 존슨은 "영원하라 딕 존슨"이라는 말로 영화를 마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샹탈 아커만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커스틴 존슨이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실존의 형상을 찍는다면 샹탈 아커만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육체를 찍는다. (조금은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영혼을 찍는 것과 육체를 찍는 것의 차이. 다르게 말하자면 시간과 그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차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영원을 선언하는 커스틴 존슨과 달리 샹탈 아커만은 어머니가 떠난 집의 황량한 모습을 바라보며 더 이상 곁에 남아 있지 않은 어머니의 육체와 그 육체가 사라진 집, 그 집을 바라보는 마음의 풍경을 담는다. 물론 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우열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시련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의 문제. 커스틴 존슨처럼 죽음을 삶의 품 안으로 감싸 안을 것인가, 혹은 샹탈 아커만처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재를 바라볼 것인가. 확실한 것은 더 고통스럽게, 더욱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쪽은 <노 홈 무비>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어머니의 곁으로 떠난 샹탈 아커만의 부재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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