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Jan 22. 2022

혼자 사는 사람들 리뷰

혼자, 그러나 함께 사는 것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어쩔 수 없이 제목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 제목을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 여기에는 모순적인 표현이 혼재되어 있다. ‘혼자’라는 부사어와 ‘들’이라는 접미사의 공존. ‘혼자’라는 상태로 공존하는 개인들의 집합체. 따로 있으면서 함께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물론 영화가 시종일관 따라가는 것은 진이라는 개인이지만 그렇다면 제목을 굳이 복수형으로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특별한 공동체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는 각자 1인분의 삶을 짊어지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개인들만이 나올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특정 공동체가 아닌 ‘혼자’라는 상태를 공명하는 개인들 각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독립적으로 공존하는 개인들. ‘혼자 사는 사람’과 ‘혼자 사는 사람들’의 차이점. 고립과 독립의 차이. 무엇이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가?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자를 환대할 수 있는가의 차이.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의 문제. 영화 속 진아는 ‘혼자 사는 사람’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게 된다. 그건 곧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고립되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 관계를 수용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체성을 그 관계 안에서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혼자 사는 사람’ 일 때의 진아는 자기 자신을 관계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에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건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카드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을 하는 진아는 목소리만으로 고객을 응대해야 한다. 첫 장면에서 일하는 진아의 모습은 목소리는 고객을 상대하지만 눈과 손은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자아의 (의도적인) 분열. 일하는 자아와 실존의 자아.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아 본연의 자아는 자신을 관계로부터 도피시키기 위해 일하는 자아라는 가면을 파생시킨 것이다. 관계를 맺기 위한 자아. 타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면. 그러니 여기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것이 혼자 사는 사람인 진아의 모습이다. 이 불안정한 세계. 언젠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계.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혼자 사는 진아의 세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홍성은이 그 세계를 어떻게 무너뜨려가는지에 달려있다. 과정의 영화. 필연적인 도달을 향한 방법의 영화. 그때 무엇이 우리 앞에 도착하는가의 문제.

2. 진아의 세계는 불안정하지만 그 자체로의 질서와 리듬을 가지고 있다. 아침에 출근한 후 근무를 한 뒤 점심으로 항상 같은 국수를 먹고 다시 근무를 한 후 퇴근을 한 뒤 TV를 보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이 리듬 안에는 타자가 자리할 이유가 없다. 진아의 세계에서 타자의 빈자리는 스마트폰과 TV가 대신 자리한다. 호혜적 관계에 대한 일방적 관계의 대체. 타자에 대한 자아의 방어수단. 그 자리에 홍성은은 유령을 보낸다. 진아의 옆집에 살던 남자. 죽은 지 일주일 넘게 아무도 찾지 않아 시체 썩어가는 냄새로 자신의 죽음을 알린 남자. 이 유령은 왜 나타나는가? 물론 애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누가 실패했는가? 진아가 실패하고 남자의 집주인이 실패하고 한국 사회가 실패한 애도. 그렇다면 이 유령은 왜 하필 진아에게, 가장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웃인 진아에게 찾아왔을까? 그저 옆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질문은 차라리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왜 진아만이 유령을 마주하는가? 왜 다른 인물들은 그 자리에 있는 남자의 유령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영화에서 유령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 진아가 처음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타자와 소통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장면에서부터 진아는 항상 휴대폰과 함께한다. 타자의 자리를 대체하는 매체. 그런 진아를 처음 소통하도록 만드는 타자가 유령이다. 반론. 이전 장면에서 진아는 자신의 상사인 팀장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가? 여기서 이 대화는 진아 본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진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아의 소통은 그녀 자신이 아닌 그녀의 가면이 대신한다. 그런 그녀의 가면을 뚫고 다가가는 유령. 이때 진아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진아 본인이 유령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남자. 혼자 사는 진아. 고립된 자들의 소통. 이 순간 진아는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의 죽음. 고독하고도 쓸쓸한 죽음. 그 자리에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가면 뒤에 숨어있던 자신을 만나는 것. 남자의 유령은 진아에게 서운하다는 듯이 말한다. “인사 정도는 해주지”. 인사라는 애도. 인사라는 환대. 환대받기 위해 돌아온 유령. 이 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유령과 같은 자리에 있는 진아뿐이다. 홍성은의 첫 번째 전략. 혼자 사는 사람 간의 환대. 그때부터 진아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걸 알려주듯이 (약간의 노파심이 담겨있지만) 식사를 하던 진아의 방에 잠깐의 흔들림을 일으킨다. 일상의 균열. 흔들리는 질서. 이때 진아의 세계에 균열을 가하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 진아의 휴대폰에 어머니의 전화가 온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가장한 아버지의 전화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이다. 어머니의 부재. 그 어머니를 대신하는 아버지.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딸(혹은 아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거기서 어머니의 자리가 부재이다. 진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한국 사회, 혹은 한국 기성세대의 기준에서) 정상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이때 진아의 아버지는 그들의 가족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어떻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한국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의 인정을 통해서. 이 순간 어머니의 빈자리는 아버지가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진아의 아버지는 그 자리를 자신이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법이라는 가면. 가족이라는 가면. 그렇기에 어머니의 전화도, 유산도 아버지의 것이 된다. 하지만 진아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별거하다가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고작 1년 반 정도 함께 산 것이 전부이다. 어쩌면 진아의 눈에 아버지의 병간호는 어머니의 유산을 얻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여부가 아닌 진아와 아버지가 가족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진아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법의 가면을 통해 가족관계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법이 진아의 가족 안에 개입할 때 어머니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리로 포함된다. 그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은 법의 이름 앞에서 도구화된다. 여기서 세대론이라는 홍성은의 두 번째 전략이 나타난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기성세대는 관계를 도구화해서 맺는다. 법으로서 가족을 도구화하는 진아의 아버지. 세입자인 남자의 죽음을 오로지 집값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집주인. 상담원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무개념 고객 등. 물론 이러한 세대론적인 접근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면서 이분법적으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은 위험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홍성은의 요점은 이러한 기성세대의 방법론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것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청년 세대인 진아가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진아는 기성세대의 방법론을 혐오하는 동시에 그 방법론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건 진아 스스로 그 방법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아가 기성세대와 다른 점은 타자와 물리적 거리를 좀 더 멀리 유지한다는 점뿐이다. 가면들의 관계. 홍성은은 이러한 가면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홍성은은 혼자 사는 진아의 가족을 해체시킨 것처럼 보인다. 가족이 해체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진아가 관계를 맺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은 진아가 어머니와 맺고자 하는 관계가 이웃집 남자의 유령이 요구하는 관계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거리를 두지만 인간으로서 대면하는 것. 가면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것. 타자와의 관계를 가면을 통해 맺는 진아는 오직 가족관계에서는 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대면하기를 원한다. 딸은 어머니와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딸과 어머니로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실존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아버지를 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진아에게 남자의 유령은 마치 “왜 나에게는 그렇게 대해주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것만 같다. 진아는 자신이 유령의 목소리를 외면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지켜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령의 가르침을 실현해 나갈 때이다.



3. 진아는 원치 않게 신입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이유는 너무 일을 잘해서이다. 바꿔 말하자면 직업인으로서 진아의 자아가 너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회사는 그런 진아에게 수진이라는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을 요구한다. 이걸 오해하면 안 된다. 진아의 회사는 진아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진아를 지배하고 있는 자아, 직업인으로서 진아의 자아가 완전히 진아 본연의 자아를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완전한 가면. 도구로서의 자아.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되는 자아. 진아는 이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그건 회사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 아니다. 진아는 그저 인간으로서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반드시 상처를 동반한다. 타자가 자아의 가면을 뚫고 들어올 때 타자의 가면 넘어 숨겨진 수많은 얼굴들의 모습을 만나야 한다. 그때 마주해야 하는 부조화. 내가 아는 타자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나타난 모습 사이의 모순. 그것을 환대하지 못할 때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진아와 수진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진아와 고객의 관계는 오직 상담원과 고객의 관계일 뿐이다. 진아 본인이 지닌 수많은 자아의 가면들도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진은 가면을 통한 관계를 거부한다. 첫 출근 하자마자 셀카를 찍는 모습에서 잘 나타나듯이 수진은 상담원이라는 직업을 새로운 자아가 아닌 수진 본연의 자아를 통해 접근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수진과 고객의 관계 역시 단순히 상담원과 고객의 관계만이 아닌 수진과 타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 뒤집어 얘기하면 수진은 고객과의 만남에서 상처를 입을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는 의미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진아는 수진과 달리 고객의 폭언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건 진아가 좋은 고객의 콜만 받아서가 아니라 진아의 직업 자아가 진아 본인을 대신해서 고객을 만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아의 직업 자아 안에서 벌어지는 환상. 오로지 상담원과 고객이라는 가면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이미지. 그래서인지 영화는 종종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수진은 그렇게 가면을 통해 관계 맺는 법을 모른다. 고객과의 통화는 단순한 상담이 아닌 타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이 된다. 그렇기에 고객이 폭언을 하면 가면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 동시에 수진은 자신을 가르쳐주는 진아와도 직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진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선물도 주지만 진아는 아직 이 타자가 불편하기만 하다. 이 관계의 원래 의도를 오해하고 있는 쪽은 수진이다. 진아가 수진을 담당한 이유, 회사가 수진을 진아에게 보낸 이유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 아닌 직업인 수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수진은 그 규정을 거부한다. 수진이 회사에 가져오는 활력은 여기서 온다. 회사 선배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 역시 인간의 얼굴로서 그들과 만나기 위한 시도이다. 그때부터 진아의 환상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가면의 환상. 분열된 자아가 만들어낸 스크린. 이 환상을 깨뜨리고자 하는 타자들. 첫 번째 타자는 유령이었지만 두 번째 타자인 수진은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세 번째 타자가 있다. 가족이라는 타자. 가족이 타자가 되는 순간. 생물학적, 법적 공동체라는 가면을 벗어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타자와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것. 어떻게? 진아는 어머니의 집에 cctv를 설치한다. 어째서? 진아는 cctv의 시선을 통해 어머니와의 물리적 거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어머니의 곁에 없다는 죄책감에 대해서 스스로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러니 곁에 있다는 것. 이때 cctv의 시선은 곧 매체의 시선이다. cctv 화면은 진아의 스마트폰과 TV 화면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매체는 무엇인가? 진아의 세계에서 타자의 자리를 대체하는 대상. 혼자 사는 사람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통로. 진아는 cctv라는 매체의 시선을 통해 가족이라는 가면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아가 간과하고 있는 점은 cctv를 통해 보는 화면에서 진아는 스스로 시선의 주인이 된다는 점이다. TV와 스마트폰에서 일방적으로 전송되는 화면을 보는 것과 달리 cctv 속 화면은 진아가 주인이 되어 바라볼 수 있다. 이 차이는 곧 대상에 대해서 무엇을 소비하는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스마트폰과 TV 화면을 볼 때 진아는 대상의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매체의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의 기호를 소비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은 이미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바이다. 기호라는 가면. 그렇기에 진아는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또 다른 맛의 기호를 소비한다. 진아의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 역시 그러한 가면과 기호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러나 cctv 화면에서는 어떠한 기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아 스스로가 매체의 시선에 대한 주인이 된 이상 그녀는 대상의 실재와 마주해야 한다. 어머니의 실재. 그리고 아버지의 실재. 타자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 진아의 세계는 그렇게 확장된다. 그리고 혼자 사는 진아는 조금씩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4. 유령이 떠난 진아의 옆집에 성훈이 이사를 오게 된다. 다리를 다친   성훈은 진아에게  집값이 이렇게  것인지 물어본다. 진아는 성훈에게  집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면 담배 연기가 다르다는 유령의 말도 전해준다. 여기서 진아는 다른 대답을  수도 있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대신 사람이 죽었다는 대답. 육체와 영혼.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의 선택. 진아는 망설임 없이 유령 이야기한다. 어째서? 물론 그녀가 죽은 남자의 육체 대신 유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훈은 그런 진아를 비웃는다. 아직 성훈은 진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성훈이 옆집에 들어온  진아에게는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성훈의 특이한 점은 다리를 다친  이사를 왔다는 점이다. 그게  이상한가? 성훈은 다리를 다쳤기에 혼자서는 이사를    없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집에 정착할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성훈은 진아와 달리 홀로 있지 않은 인물이다. 혼자 살지만 홀로 있지 않는 . 성훈은 이미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런 성훈이 옆집에   진아 역시 변화를 맞이한다. 성훈은 이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진아의 TV전파를 방해하고 진아는 이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한다. 여러  언급했듯이 진아에게 TV( 포함한 매체) 타자를 대체하는 수단이다.  자리에 기호가 아닌 실재의 타자들이 들어오고자 한다. 이제 진아는 매체를 통해 대체하던 자리의 실재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아와 수진의 관계 또한 변하기 시작한다. 일을 하던 수진은 진아에게 이상한 말을 한다. 그녀의 귓가에 콜을 받을  울리는 연결음이 지속적으로 들린다고 한다. 이건 무슨 신호인가? 가면이 본인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징조. 회사가 수진( 포함한 모든 직원들)에게 원하는 변화. 오로지 직업인의 자아만이 남아있는 . 그때 진아와 수진, 그리고 직원들은 매체와 동일시된다. 기호로서의 존재. 컴퓨터 화면과 하나가 되는 . 상호 간의 소통이 아닌 일방적 전달을 위한 소통. 당연하게도 매체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인물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이다(기성세대의 도구적 관계 역시 관계를 기호화하여 맺는 것이다).  신호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수진이다. 혹은 수진만이   있는 일이다. 유령을   있는 유일한 인물이 진아였던 것처럼.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한걸음 떨어진 수진만이 자신의 실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눈치챌  있다. 그런 수진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곽민규라는 이름의 남자가 자신이 타임머신을 개발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를 2002년에 가져가도   있는지를 물어본다. 남자에게 2002년은 월드컵을 포함해서 꽤나 의미 있던 해였던 걸로 보인다. 진아는 이미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진아는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문의를 직업적으로 거절한다. 하지만 진아는 점차 남자의 이야기에 몰두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저도 데려가 주시면  돼요?" 여기서 우리는 진아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질문하면  된다. 진아는 상담원으로서는 하면  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 직업인의 자아를 뛰어넘는 . 이때 진아는 남자와 고객과 상담원이 아닌 인간  인간, 주체와 타자로서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이상 기호의 논리, 자본주의의 논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진아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 이로써 (회사가 그녀에게 맡긴) 진아의 교육은 실패한다. 이제 진아와 수진의 위치는 뒤바뀌게 된다. 진아가 수진에게 가르침을 받을 차례이다.  가르침을 받은  아파트 복도만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처음으로 아파트 외부 전체를 진아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집이 낯설어지는 순간.  옆집에 사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제야 진아는 비로소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쇼트. 진아가 바라보는 cctv 화면이 스크린에 그대로 나타난다. 화면 속에서 진아의 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람들과 함께 진아의 어머니를 위한 추도 예배를 드리고 있다. 표면적으로 아버지는 분명 자신의 아내를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애도는 뭔가 이상하다.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애도의 대상이 빠져있는 것만 같다.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와 교회 사람들은 어머니를 기억하기보다는 자신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에 바쁘다. 어머니를 위한, 그러나 어머니가 없는 애도. 이때  자리는 아버지 주위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신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령을 위한 자리는 사라진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유령을 잊어버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유령을 자신의 집에서 추방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존이  자리를 대신하기를 원한다. 유령이라는 타자. 환대받지 못하는 타자.  모습을 딸이 지켜보고 있다. 딸이 지켜보는  화면이 스크린 위를 차지한다. 이제 진아는, 그리고 우리는 기호 뒤에 숨겨져 있던 실재를 확실하게 마주하게 된다. 어떤 실재? 기호의 세계, 가면의 세계에 대한 실재.  세계의 부조리와 공허함. 진아는 어머니의 유령이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배제되는 것을 목격한다. 가족이라는 기호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실재. 그것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오던 세계의 실재를 마주하는 것이다. 유령이 만들어준 . 유령이 안내해준 세계. 이제 진아의 직업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는 무너진다. 진아는 남자의 유령이, 그리고 수진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세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다만 그녀의 옆에는 수진이 사라진 상황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은 온전히 그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5. 회사로 출근했을 때 수진은 더 이상 자리에 있지 않다. 아니, 있을 수 없다. 회사에는 그녀 자신이 아닌 그녀의 직업 자아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수진이 근무 중 나타난 이상 회사에 수진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하지만 수진은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고 떠났다. 콜을 받은 후 진아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목 통증을 느낀 후 수진에게 선물 받은 스프레이를 처음으로 뿌린다. 선물이란 무엇인가? 아무 대가 없는 증정. 어떠한 거래도 필요 없는 것. 진아가 상품이 아닌 선물을 쓰는 순간. 그때서야 진아는 수진과 처음으로 가면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게 된다. 더 이상 진아는 자신의 직업 자아, 직업인의 가면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가면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가면이 만들어낸 일상의 환상 역시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평소처럼 똑같은 국수를 먹던 진아는 뭔가 이질적인 것을 느낀 것 마냥 먹기를 주저한다. 진아는 그제야 국수의 맛을 본 것이다. 실재의 맛. 스마트폰 화면에서 소비하던 기호의 맛이 아닌 실재의 맛. 그동안 진아에게 국수는 그 자체의 맛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맛의 기호를 매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기호 뒤에 숨어있던 국수의 맛을 진아는 만나게 된다. 기호의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일상이 낯설게 바뀌는 순간. 진아는 점차 수진의 가르침을 깨달아 나간다. 다시 일터로 복귀한 진아는 자신의 카드 명세서를 읽어달라는 고객의 콜을 받는다. 화면에는 강조하듯이 "절대로 틀리지 말 것"이라고 적혀있다. 기계가 될 것을 요구하는 회사. 이를 충실하게 지키며 이전과 같이 결재 내역을 읽어나가는 진아. 하지만 지금의 진아는 더 이상 직업인의 자아만이 남은 진아가 아니다. 그녀가 직업인의 가면 뒤로 숨으려고 할 때 그녀의 실존이 그녀를 부를 것이다. 컴퓨터 화면만을 쳐다보며 결재 내역을 읽어나가던 진아는 갑자기 수진이 말했던 연결음을 듣게 된다. 가면 뒤의 실존이 보내는 위험신호. 더 이상 가면에게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실존의 저항. 그러자 기계처럼 화면을 읽어나가던 진아는 고장이 난 것처럼 버벅거린다. 고객도 이에 불만을 품고 진아에게 멈추라고 한다. 하지만 진아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가면은 실존의 저항을 뿌리치려고 하듯이 더욱 자신을 강하게 표출한다. 진아의 귓가에는 연결음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진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계속 기계처럼 명세서를 읽어간다. 고객은 그런 진아에게 멈추라고 소리친다. 진아가 처음으로 고객에게 항의를 받는 순간. 이 여성 고객은 마치 진아에게 더 이상 기계처럼 말하는 것을 멈추고 인간으로서의 진아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다음 쇼트. 진아가 전날 보았던 cctv 화면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 자리에는 원래 컴퓨터 화면이 있어야 한다. 이 쇼트는 마치 cctv 화면이 갑작스럽게 침투해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 화면에는 추도 예배를 드리면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머니를 배제하는 아버지. 기호의 세계, 가면의 세계, 가면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 한국 사회와 한국 기성세대가 구축한 세계, 그 환상의 이면에 숨어있던 실재, 그 실재에 대한 환유로서의 아버지. 진아는 비로소 자신이 보았던 cctv 화면 속 아버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실재. 이토록 공허한 실재. 진아는 자신의 일터를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는 곧장 아버지의 집에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집에 없다. 전화를 걸어보니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시끄럽게 노는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계속 전화를 걸더니 갑자기 자신과 어머니에게 사과할 것을 울부짖으며 요구한다. 어떤 사과? 어머니의 유령을 집에서 쫓아낸 것, 어머니의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대체한 것, 그리고 자신을 어머니와 떨어뜨리려고 한 것. 아버지의 세계에 속해있는 한 딸은 어머니의 유령을 만날 수 없다. 그렇기에 진아는 어머니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을 것을 아버지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애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애도에는 진아가 자신을 유령과 동일시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상기해보자. 진아가 처음 이웃집 남자의 유령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아 본인이 유령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웃집 남자의 죽음에서 진아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진아가 어머니를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죽음과 동시에 추방당한다. 그건 진아 자신도 죽음 이후 아버지로부터 언제든지 버림받을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웃집 남자의 유령에게서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한 죽음을 보았다면 어머니의 유령에게서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의 상징적 추방을 보게 된다.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선 진아.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타자를 모두 환대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전화를 끊은 진아는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전과 달리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마치 하나의 여행 혹은 여정을 보는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환상을 가로지르는듯한 여정. 집에 도착했을 때 옆집에서는 성훈과 아파트 사람들이 이전에 죽은 이웃집 남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버지의 애도와 달리 성훈의 애도는 온전히 타자를 위한 애도이다. 그리고 남자의 유령은 비로소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에 환대받는다. 이것이 홍성은이 진아에게 제안하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대안이다(홍성은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성세대인 아버지는 예배라는 신세대적인 방법을, 신세대인 성훈은 제사라는 기성세대의 방법을 쓰는 역설을 배치했다). 기호가 아닌 실존의 세계. 가면이 아닌 인간의 세계. 제사가 끝난 후 성훈은 유령이 진아에게 알려준 대로 성냥불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유령과 동일시되는 성훈. 그 유령과 함께 환대받는 진아. 그리고 진아 역시 자신의 세계에 새로운 타자를 환대한다. 영화에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와도 통화를 하지 않던 진아는 처음으로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수진은 진아가 자신에게 그동안 쌓인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전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자 TV 앞에서 전화를 하던 수진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피해 고백하듯이 말한다. "사실 저는 혼자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척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난 수진 씨한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요". 이윽고 다음 쇼트에서 수진의 모습이 나온다. 집에서의 수진. 직업인으로서의 수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수진. 진아는 이 타자를 자신의 세계로 환대한다. 이웃집 남자에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통해서. "수진 씨.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내가 잘 못했어요". 이 말을 들은 수화기 너머의 수진은 눈물을 흘린다. 끝내 환대받은 타자의 눈물. 자신의 가르침이 성공한 자의 눈물. 당연히도 이건 기쁨의 눈물이다. 그날 밤 진아는 처음으로 방안의 TV를 끄고 잠에 든다. 다음 날 아침, 진아는 항상 어둡고 음침하던 자신의 방에 커튼을 거두고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둔다. 이제 직업인으로서 진아는 잠시 멈출 시간이다. 항상 혼자 담배를 피우던 진아는 팀장과 함께 담배를 피운다. 여기서 두 여성은 직업인의 가면을 벗고 잠시나마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팀장은 한탄하며 말한다. "내가 요즘 들어서 생각한 건데, 우리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싶어. 좀 설렁설렁할 걸 그랬나". 그리고 진아가 마지막으로 인사한다. "정리되면 밥이나 같이 먹어요". 아직 팀장은 이 상투적인 인사를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 상투적인 약속은 곧 실현될 것만 같은 믿음이 간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진아에게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온다. 아버지는 지난 통화에서 딸이 울부짖으며 사과하라고 한 것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딸이 말한다. "아버지 집 거실에 홈 캠이 있어요. 그걸로 아버지 집 거실 볼 수 있어요. 그걸로 자주 아버지 들여다볼게요. 딱 그렇게까지만 지내요 우리". 딸의 선언. 더 이상 딸과 아버지라는 상투적 관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마주하겠다는 선언. 그러니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있어도 계속 지켜볼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딸. 아버지는 아직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진아는 어머니의 연락처 이름을 아버지로 바꾼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리에서 딸과 만나지 못한다. 딸은 아버지와 그저 아버지로서 만나기를 바란다. 둘 사이의 간극은 딸이 거실에 둔 cctv가 메울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환대. 아버지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로의 초대.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 세대의 제안. 관객에 대한 홍성은의 제안.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진아의 모습을 처음으로 창문 밖에서 바라본다. 창문에는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 비친다. 버스 안의 진아는 이 풍경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고립되었던 진아의 일상은 이웃집을,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한 층 더 넓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 역시 그렇게 구축되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 홈 무비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