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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pr 15. 2022

최선의 삶 리뷰

비록 그것이 최선일지라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시작하기 전 당부의 말. 언제나 그렇듯이 이 글에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대부분의 장면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읽기 전 먼저 이우정의 <최선의 삶>을 감상하기를 추천드린다. 또한 나는 아직 임솔아 작가가 쓴 동명의 원작을 읽지 못한 상태이다. 아쉽게도 두 작품을 비교하는 파트는 이 글에는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글의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다.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생략하기도 하고 순화하기도 했지만 어떤 대사들만큼은 다른 언어로 대체할 때 그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와 여운을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그 표현 그대로 글에 담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글을 읽는 도중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1. 영화는 뒤돌아보며 시작한다. 기차 안에서 졸고 있는 강이. 그런 강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플래시백. 우리는 아직 이 기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졸음에 고개를 떨군 강이의 얼굴은 상당히 지쳐있는 모습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이 이야기의 끝부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이 프롤로그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필연적으로 왜 이 지점이 영화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오프닝의 앞과 뒤의 차이. 말해야 할 이야기와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영화에서 이 장면이 다시 나오는 순간은 강이가 아람이를 떠나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강이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은 이 순간이 처음이 아니다. 이 쇼트에서의 강이에게는 이미 수많은 사건들이 쌓인 상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 장면이 서사의 전환점이 될 때 이 선택이 지니는 다른 선택과의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이가 이 선택의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프롤로그가 끝난 후 강이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때는 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던 시절이었다". 폭력과 권위의 시대. 학생으로서, 그리고 여학생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부조리들. 영화는 그 당시 자료 화면들을 푸티지로 보여주며 그 시대상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이것이 강이의 일탈에 대한 강이 스스로의, 혹은 이우정의 합리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시대의 반작용(혹은 부작용)으로 나오게 된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강이는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덩어리와 개인. 강이와 소영, 그리고 아람은 분명 덩어리이기 이전에 각각의 개인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덩어리처럼 뭉쳐 다닌다. 무엇이 이들을 뭉치게 만드는가? 한국이라는 사회. 학교라는 사회. 그 사회의 억압과 폭력. 소녀들은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분명한 목표 앞에 소녀 개인의 신분이나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회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이들은 덩어리로서 뭉쳐다닐 수 있다. 이때 이 덩어리를 뭉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쪽은 언제나 소영이다. 강이의 말. "소영이 개입하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어째서? 소영이 강이, 아람과 다른 결정적인 한 가지. 계급의 차이. 가난한 강이와 아람과 달리 소영은 부잣집 딸이다. 선생님들이 소영을 아끼는 것도 이 덩어리에서 유일하게 소영이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소영은 자신의 계급적 배경을 이용해 일탈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먹질도 정당방위가 되고 2주일의 징계도 1주일로 줄일 수 있다. 여기서 강이와 아람은 소영에게 덩어리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탈을 함께 할 또 다른 개인들. 부르주아를 위한 서민.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왜 꼭 덩어리를 이루어야 하나요? 대답은 단순하다. 소영에게는 자신의 일탈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존재가 필요하다. 소영 개인의 일탈은 소영의 문제가 되지만 소영과 덩어리의 일탈은 덩어리의 문제가 되고 그때 책임은 하층민인 강이와 아람에게 넘어간다. 뒤집어 말하면 강이와 아람 역시 일탈의 대한 책임을 소영 덕분에 덜 수 있다. 두 계급의 상생. 이 상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덩어리라는 집단. 사회 바깥의 사회. 강이는 이 덩어리라는 사회의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 어떤 규칙? 소영이 정하는 규칙. 부르주아가 정한 규칙. 그런 소영이 어느 날 강이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신이 가출을 할 예정이니 함께 가출하자는 내용의 문자. 강이는 문자를 본 후 말한다. "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이건 무슨 의미인가? 강이는 문자를 보기 직전 아버지에게 집이 작다며 한탄을 한다. 가난에 대한 탄식. 계급에 대한 절망. 강이는 이 절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탈을 하는 것이다. 그런 강이에게 부잣집 딸인 소영의 문자는 일종의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질 것이다. 강이는 그렇게 덩어리와 함께 집을 나온다.


2. 집을 나온 소녀들은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떠돈다. 그런 소녀들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남자는 세 소녀들에게 먹을 것을 사먹으라며 용돈을 주고 자신이 운영하는 스티커사진 가게에서 사진도 찍게 해준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바다로 가서 빙수 가게를 차리자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무언가 불안한 호의.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자본을 소유한 남자와 노동을 요구받는 소녀들. 그리고 성인 남자와 여학생이라는 관계. 비대칭적인 경제 권력과 젠더 권력. 언제 저 남자가 소녀들에 대한 태도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 다시 한번. 지금은 "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는 시절이다. 그러한 폭력이 사회 바깥이라고 없으란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 남자의 진짜 의도를 아직까지는 알지 못한다. 남자의 제안을 받은 뒤 아람과 소영은 따로 나가 놀고 강이는 남자와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다. 남자는 이름을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강이의 이름을 수첩에 적는다. 이름이라는 표상. 집단 사이로 새어나오는 개인의 표상. 이 순간 강이는 남자와 덩어리의 일부가 아닌 한 명의 주체로서 마주하고자 한다. 덩어리에서 분리된 개인.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강이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서도 남자와 강이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는 유지된다. 남자와 강이가 주체 대 주체로서 마주하지 않는 이상 강이는 계속 덩어리의 일부에만 종속된다. 집단 속의 개인. 그때 강이의 이름은 하나의 주체에 대한 표상이 아닌 덩어리를 대표하는 표상으로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이 드러난다. 남자의 집에서 자던 중 소영은 남자의 이상한 손길을 느낀다. 영화는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소영은 분명 그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여기서 남자의 위선은 확실히 나타난다. 어떤 위선? 남자는 타자의 영역에 있는 소녀들을 제도와 질서 안으로 구원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시대는 "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여학생으로서 겪어야 했던 부조리들을 강이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위선은 곧 제도와 질서의 위선이며 시대의 위선이다. 이때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가 소영을 성적으로 추행하는 장면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가? 왜 굳이 관객이 그 장면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드는가? 이 장면에서 이우정의 관심은 단순히 그 위선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다. 소녀들은 제도와 질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덩어리를 이루어 집 바깥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폭력을 집 밖에서도 똑같이 경험한다. 여기서 소녀들은 거대한 절망을 마주한다. 어떤 절망?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 지금 속한 제도와 질서를 벗어나도 폭력은 어디에나 편재한다는 절망. 그래서 소녀들은 다시 도망친다. 도망치기 전 아람은 (강이의 설명처럼)남자의 지갑을 훔친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아람이는 그저 덩어리의 일부로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안 후 소녀들을 뒤쫓는다. 그리고 소녀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남자는 곧장 강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이는 남자가 소녀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강이는 지금 남자에게 있어 덩어리를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강이는 자연스럽게 덩어리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마치 소영이 자신의 책임을 떠넘길 존재가 필요하듯이. 그리고 남자와 다시 마주하자 강이는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 순간 강이는 덩어리의 일부로서 자신이 아닌 이강이라는 소녀 자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는 덩어리가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나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일 뿐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세요. 울면서 호소하는 소녀. 남자는 이때 비로소 자신이 적은 이름의 뜻을 알게 된다. 덩어리의 표상이 아닌 주체의 표상. 그 표상을 보자마자 남자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이 소녀를 떠나보낸다. 이제 다시 소녀들은 방황해야 한다. 이 시대의 공간에는 소녀들을 위한 곳이 없다. 소녀들에게는 점차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떠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거나.



3. 소영은 강이에게 뜬끔없는 질문을 던진다. " 꿈이 뭐야?" 강이는 대답을 회피하고 소영에게  질문을 되묻는다. 소영의 꿈은 슈퍼모델이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물이 아파트 복도에서  대화를 나눌  1층에서 아람은 자신들의 몸을 맡길 매트리스를 들고 나타난다. 강이와 소영은 위에서 아람을 내려다본다. 하나의 분리. 어떤 분리? 계급이라는 분리. 미래와 이상을 말하는 부르주아와 당장의 생존을 선택하는 하층민 사이의 장벽. 그리고  경계에 속한 강이. 누군가는 아람을 내려다보는 강이와 소영의 시점 쇼트에서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체육 시간에 꾀병으로 교실로 도망쳐  강이와 소영은 운동장에 있는 아람과 눈을 마주친다. 같은 구도. 그러나 다른 시선.  번째 시점 쇼트가  소녀를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게 해주는 결집의 쇼트였다면  번째 쇼트는 덩어리 안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간극의 쇼트이다. 물론  쇼트가 나올  있는 것은 소녀들이 이전에 만난 남자를 통해 덩어리로 살아갈  없다는 좌절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덩어리는 그때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건 아람과 소영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영은 자신의 꿈을 위해 모델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때의 소영은 물론 덩어리에 소속된, 제도와 질서 바깥의 소영이다. 폭력으로 가득  학교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영.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소녀를,  덩어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소영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콘테스트를 마친  소녀들은 자신들과 같이  밖을 떠돌아다니는 또다른 남자 덩어리와 어울려 논다. 오락실에서 놀던  아람은 무리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아침 얼굴이 엉망이   다시 나타난다. 아람의 말에 따르면 같이 놀던 남자들이 자신이 벗을 때까지 때렸다고 한다. 여기서 아람이 겪는 폭력은 이전에 학교와 사회에서 당한 폭력과는 다른 것이다. 학교에서의 폭력이 여학생의 신분으로 당해야 하는 폭력이라면 이때의 폭력은 여자인 동시에 하층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폭력이다. 게다가 그런 폭력에서 조금이나마 자신을 보호해주던 제도와 질서를 아람은 스스로 버렸다. 그것을 아는 듯이 그날  아람은 자신을 때린  남자와 다시 만나러 나간다. 강이가 걱정하자 아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떻게  좋을  있냐?" 좋지 않은 것까지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 하층민의 비극. 아람은  운명을 스스로 체화한 것처럼 강이에게 말한다. "어린 것아. 사랑하면 싸우는 거야". 여기서는  비상식적인 변명을 폭력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아람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안다. 그렇기에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렇게라도 합리화하고자 한다.  가지 극단. 부르주아의 길과 하층민의 . 강이는  사이에 속해 있다. 그때까지 강이는 소영의 곁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소영의 곁에 있으면서도 계속 아람을 상기시키고 걱정한다. 말하자면 강이는  덩어리를 유지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소영과 아람은 이미 갈라진 상황이다. 강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덩어리는 머지않아 해체될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덩어리가 해체되는가에 있다. 소영은 모델 콘테스트에서 떨어진 것을 알게   실망스럽게 걸어간다. 그런 소영에게 강이는 "아람이는 괜찮을까?"라고 물으며 다시 한번 아람이를 상기시킨다. 그러자 소영이 대답한다. "불결해. 진짜 더럽지않냐?" 언뜻보면  말은 남자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아람에 대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을 한 바로 다음 강이는 소영의 바지에 묻은 피를 발견한다. 여학생의 몸으로서 흘릴 수밖에 없는 . 이때 중요한 것은 지금 소영에게는 생리대가 없다는 것이다. 소영은 지금 자신이 가장 기본적인 몸의 욕구조차 채울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앞에서 아람을 힐난하듯이  말은 사실 그런 아람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대사를 통해 우리는 덩어리 사이의 균열을 더욱 명백하게 알게 된다. 처음 소녀들이 덩어리로  밖에 나왔을  거기에는 계급적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와 사회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연대만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 바깥에서도 편재하는 폭력을 마주한  소녀들 사이의 계급적인 간극이 명확해지고  사이는 분열된다. 강이는 소영의 바지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자 소영은 자신의 카드를 주며  바지를 사오라고 한다. 이제 민주적으로 보였던 소녀들의 관계는 경제 권력을 기반으로 비대칭적으로 변한다. 소영은 덩어리에게 집을 제공할  있을 정도의 자본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집조차도 소영 본인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집에 아람은 길고양이  마리를 데려온다. 소영은 당장 내쫓으라고 말하지만 아람은  고양이가 아프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소영은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라고 하지만 아람은 고양이가 안락사될 것이라며 다시 한번 거부한다. 여기서 고양이가 덩어리의 메타포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영은  고양이를 제도와 질서로 회귀시키고자 하고 아람은  안으로 회귀하는 순간 고양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사실상 소영은 덩어리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람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또다른 폭력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당하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남자들과 어울리며 돈을 벌고자 한다. 그래야만 돈을 벌어  덩어리를 유지시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덩어리에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람이 아닌 소영이다. 소영이 마음만 먹으면 덩어리는 곧장 해체될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른들이 구축한 제도와 질서로부터 도피한 소녀들의 세계에는 이제 어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가 작동한다.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의 생성. 소녀들이 밖으로 나온 이후 강이는 계속해서 소영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준다. 그리고 아람은 자신만의 노동을 이어간다. 여기에 경제권력을 쥐고 있는 소영까지.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가정( 이룰  있는 최소한의 단위). 어른의 논리가 덩어리를 지배하는 이상 소녀들의 세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때  과정을 왜재하는 제도와 질서가 덩어리에 침입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시 기억해보자. 소녀들이 집을 나오기 이전부터 소녀들 사이에는 계급의 논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소영에게 있어 덩어리는 그저 자신의 일탈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소영이 토대를 만들고 강이와 아람은 덩어리에 들어간 대가로 감면된 처벌을 받는다. 전형적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거래 관계. 소녀들이 마주하는 또다른 절망. 도피하고자 했던 세계의 논리가 사실 자신들의 세계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절망. 이건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세계에는 없다는 절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절망을 마주하는 순간 소녀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실체가 사실 지금 살고 있던 세계의 답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완벽한 절망.  이상 소녀들이 도피할 곳은 없다. 이제 오로지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있다. 단지 언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4.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단순히 이상한 걸 넘어 서사의 논리를 비약하는 듯한 장면. 그래서 갑자기 영화에 침입하는 것만 같은 장면. 강이와 소영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름밤의 매서운 더위가 두 소녀를 괴롭히고 있다. 잠을 자던 강이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 입 먹는다. 그때 더위에 지친 소영이 일어나 상의를 벗는다. 강이는 이 모습을 뒤에서 몰래 지켜본다. 이때부터 두 소녀 사이에 이상한 성적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굳이 이상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전까지 영화가 두 소녀에 대해 어떠한 성적인 묘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이는 소영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여준다. 그리고 다시 자려고 하는 순간 소영이 말한다. "너도 벗어". 옷을 벗은 채 누워 있는 두 소녀. 여기서 두 소녀가 옷을 벗도록 한 것은 더위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위를 식혀줄만한 경제력의 부재. 그러니까 이 장면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은 두 소녀 사이의 성적 욕망이 아닌 소녀들이 처한 계급적 상황이다. 영화는 이때까지만 해도 명백하게 계급적 텍스트를 따라 진행된다. 옆으로 누운 강이의 시선에는 소영의 뒷모습이 보인다. 강이는 그대로 잠이 든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강이는 소영과 눈을 마주친다. 이때 은연 중에 흐르던 두 소녀의 성적 긴장감은 현실화되고 영화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뀐다. 서로의 몸을 만지는 소녀들. 이윽고 이어지는 입맞춤까지. 카메라는 이 움직임들을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다. 이 순간 이제까지 서사를 이끌던 계급적 맥락은 한순간 성적인 맥락으로 비약한다. 하지만 <최선의 삶>은 퀴어 영화가 아니다. 이우정은 이 장면을 마치 꿈처럼, 영화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찍었다. 왜 이 장면이 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무엇이 이전까지의 계급적 맥락을 성적인 맥락으로 비약하도록 만들었는가? 지금 소녀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이들의 경제력은 어른들의 사회에서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들을 덩어리로 뭉치게 만들어 주던 이상마저 무너진 상황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들의 육체뿐이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통해 일하는 아람처럼. 강이와 소영은 바로 이 육체에 매혹된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전부. 지금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 이를 통해 강이와 소영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계급적 절망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통해 서사의 맥락 역시 단숨에 바뀌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강이와 소영의 욕망은 곧 자신을 타자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건 영화의 시작부터 그랬다. 소녀들이 가고자 하는 자리. 가출 청소년이라는 타자의 자리. 사회 바깥에 있는, 제도와 질서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리. 그러나 그 욕망을 쫓아 온 현재 소녀들은 그 욕망의 실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강이와 소영은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육체를 통해서라도 그 욕망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다. 성소수자라는 타자. 그 타자의 자리에 대한 향유.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욕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은 뒤 소영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아람에게는 악의적일지라도 강이와는 가깝게 지내던 소영은 이제 강이 역시 악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이유를 물어보는 강이에게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는다. 서로의 몸을 만진 손. 그러다 갑자기 강이에게 소리친다. "씨발!" 소영은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소녀들은 이제 바닥까지 떨어졌다. 욕망하는 자리에 갔으나 욕망하는 대상은 거기에 없다. 그 악순환의 반복과 함께 이어지는 전락. 소영은 이 지긋지긋한 전락에 지쳤다.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영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싼다. 자본의 후퇴. 그건 강이와 아람 역시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덩어리는 무너진다. 집으로 돌아온 강이. 여기서 관객은 두 가지 기대를 품을 수 있다. 소영의 부모처럼 딸의 모든 과오를 품어주는 포용적인 부모. 혹은 아람의 부모처럼 딸의 일탈을 폭력적으로 꾸짖고 질책하는 강압적인 부모. 하지만 강이의 부모는 이 두 가지 기대에서 모두 벗어난다. 강이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온 강이를 아주 담담하게 맞이한다. 그리고는 강이를 정화하듯이 나뭇가지로 몸을 털어내고 불상 앞에서 감사기도를 한다. 무언가 어색한 거리. 강압적이지도 친밀하지도 않은 듯한 거리. 이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돌아온 딸에게 꽃을 선물하는 아버지. 그리고 딸에게 말한다. "사랑한다 강이야". 다시 함께 앉은 밥상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고기를 잔뜩 올려주며 딸의 귀가를 반겨준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묻는다. "좋니?" 강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다행이다"라고 대답한다. 분명히 아버지는 딸을 환대했음에도 어째서인지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이 거리 안에서 딸은 무엇을 느끼는가? 분명 가족 구성원의 일부로서 환영 받았으나 동시에 그 안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애매한 자리. 이건 강이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속한 위치 그대로이다. 사회 구성원의 일부, 학교 구성원인 학생이라는 신분, 그러나 그 안에서 가출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는 타자. 강이가 가족에게 바란 것은 자신을 포용적으로 대하든 강압적으로 대하든 완전한 가족 구성원 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이의 부모가 딸과 거리를 두는 것은 딸 스스로가 그 거리를 극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강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가정에 가출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평화로운 가정에는 가출 청소년이라는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강이의 부모가 환대한 존재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딸이지 불량한 가출 청소년이 아니다. 그러니 딸이 가정에 환영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덩어리의 부산물을 털어버리고 평범한 가정의 딸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부모와 딸 사이에서 생기는 거리감은 오로지 딸의 몫이다. 타자와의 거리. 타자로서 겪어야 하는 거리감. 이 외로운 싸움. 누구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비정한 현실. 하지만 아직 더 큰 절망이 남아있다. 청산되지 않은 관계. 떠나갔던 덩어리와의 재회. 덩어리 바깥에서 만나는 소영과 아람. 이건 강이의 상상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5. 학교에서 만난 소영은 이미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다. 이제 소영에게 강이와 아람은 안중에도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청산해야 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그러니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소영의 태도는 더욱 악의적으로 변한다. 여기서도 덩어리의 작동 방식은 그대로 나타난다.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짊어질 존재. 이 덩어리와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소영은 이제 적극적으로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다. 그것을 선언하듯이 소영은 강이에게 말한다. "그날은 더워서 우리가 미쳤던거야. 그러니까 정신차리자". 자신의 몸에서 덩어리를 지워나가는 소영.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다는 것은 자신을 도피하도록 만들었던 폭력과 권위 역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폭력은 소영과 아람에게 향한다. 자신의 비싼 립스틱을 자랑하면서 강이에게 폭력적으로 바르고 술집에서 일하던 아람을 힐난하면서 소영은 이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계급의 폭력. 소영은 이제 제도와 질서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해도 용인되는 부르주아. 그 사실을 강이와 아람에게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이 현실을 마주했을 때 두 소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람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갈뿐이다. 이미 하층민의 길에 익숙해진 이상 부르주아의 방식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그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강이이다. 커져가는 간극. 그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강이. 끝까지 덩어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이. 학교 운동장에서 강이는 아람에게 묻는다. "우리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힘들겠지?" 왜 이토록 강이는 덩어리에 집착하는가? 우리는 강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타자. 학교는 여전히 폭력과 권위로 가득 차 있고 가족마저 자신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주던,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곳이라고 믿었던 덩어리마저 계급의 논리로 해체되었다(물론 아직 강이는 이미 어른들의 논리가 덩어리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강이는 이 덩어리가 계급의 논리를 뛰어넘고 다시 복원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온전히 자유로운 세계. 오로지 소녀들만을 위해 세계. 그 세계에 대한 갈망. 이 말을 들은 아람이 말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무엇을 한다는 것일까? 다음 날 소영이 강이와 아람에게 함께 오락실에 가자고 제안한다. 불길한 제안.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된다. 오락실에서 소영은 강이를 노래방 부스 안으로 부른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낸다. "너 왜 우리 이간질해?" 강이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도 이해할 수 없다. 이우정은 소영과 아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장면을 더 따라가보자. 어리둥절하게 있는 강이에게 소영이 말한다. "주제에. 읍내동 사는 주제에". 그리고는 소영이 강이를 때리더니 두 소녀는 싸우기 시작한다. 이때 이우정은 갑자기 cctv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바라본다. 노래방 부스 안에서 싸우는 강이와 소영. 이 모습을 오락실 주인이 cctv를 통해 본 뒤 찾아오자 소녀들은 급하게 도망간다. 물론 이우정은 이미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논픽션의 시선을 개입시켰다. 하지만 첫 장면의 자료 화면들은 서사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방식이었던 것에 비해 이 장면에서 시선의 변화는 서사 안에서 갑자기 이루어진다. 여기서 이우정은 마치 시선에 대한 주도권을 오락실 주인에게 넘긴 것만 같다. 어째서? 이우정의 시선과 cctv 시선의 차이. 이우정은 지금 벌어지는 폭력이 계급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락실 주인에게 이 싸움은 그저 불량한 청소년들이 일으키는 소란에 불과하다. 시선의 간극. 오락실 주인의 시선은 곧 이 소녀들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이다(이우정은 <최선의 삶>에서 한국사회의 시선을 성인 남자의 시선으로 환유한다. 이전의 스티커사진 가게 사장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이 간극 사이에서 무엇이 나타나는가? 한국사회는 이 소녀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소녀들 사이에서 강이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금 강이에게는 이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줄 어른의 존재가 없다. 강이의 부모도, 학교 선생님들도 강이를 구해주지 못한다. 아니 구해줄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이 소녀는 그저 덩어리의 일부, 불량한 청소년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표류하는 강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이는 아람에게 소영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아람의 대답. "난 그냥 네가 시키는대로 했지". 강이가 시킨 일? 강이는 아람에게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했을 뿐이다. 이어지는 아람의 말에 따르면 소영은 아람에게 대뜸 미안하다고 말한 뒤 계란찜을 선물했고 아람은 그것으로 마음이 풀렸다고 말한다. 아람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혹은 (소영의 표현대로 말하자면)어떤 이간질을 한 것일까? 아람이 들어주려 한 강이의 부탁. 다시 예전의 자유로운 덩어리로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소영이 다시 강이와 아람에게 돌아와야 한다. 이때 소녀들 사이의 집합관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아람과 소영이 만났을 때 아람은 강이와 이룬 덩어리를 대표해서 소영을 만나는 것이다. 이 덩어리 입장에서 소영은 타자로서 마주한다. 이걸 소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람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은 아람을 덩어리의 일부로 끌어들인 강이의 존재이다. 소영에게 있어 강이, 아람과 함께 이루었던 덩어리는 청산해야할 과거에 불과하다. 그 덩어리를 지우기 위해서는 세 소녀가 더 이상 덩어리의 일부가 아닌 각각의 개별적 주체들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강이는 지금 그 덩어리를 다시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덩어리의 표상.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 이 만남에서 아람의 정체성은 덩어리의 아람과 주체로서의 아람으로 분리된다. 그러니 소영이 계란찜을 선물하며 미안하다고 말한 아람은 강이가 데려다 놓은 덩어리의 아람이 아닌 더 이상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학생의 아람이다(실제로 이 장면 이후 소영과 아람은 한 번도 대면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람은 곧바로 강이를 버리고 평범한 여학생으로서 소영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분열되는 정체성. 소영이 말하는 강이의 이간질. 소영은 자신 앞에 덩어리의 아람을 보낸 강이에게 분노한 것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 그 과거를 억압하기 위한 폭력. 하지만 과거의 유령은 억압하면 할수록 더 명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회귀와 억압. 그 폭력의 악순환. 이우정은 그 다음 시퀀스에서 그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쉬는 시간 도중 소영이 강이에게 다가와 방과후에 만나자고 말한다. 그런 강이에게 아람이 문자를 보낸다. "강이야, 지면 안돼. 지면 끝이야 알지? 맞는거 봤지?" 여기서 중요한 건 아람이 강이의 편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아람은 지금 덩어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강이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홀로 남은 강이. 고독한 소녀. 그 후 영화는 학교 뒤편에서 홀로 서성이며 소영을 기다리는 강이를 멀리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지켜본다. 이 고독한 소녀는 대걸레 막대를 바닥에 내리 찍으며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프레임에는 오직 그녀를 둘러싼 여백만이 소녀의 숨통을 조이는 듯이 남아있다. 도래하고야 말 순간에 대한 불안. 그리고 다음 장면. 강이의 얼굴에는 이미 소영에게 당한 폭력의 상처가 남아있다. 강이는 어느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져 있다. 이어서 소영의 목소리가 나온다. "난 이제 이강이랑 못 논다. 선택해. 나야? 이강이야?" 확실하게 선언하는 소영. 이우정은 오락실에서의 장면과 달리 폭력의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공터에 외로이 앉아있는 강이를 롱쇼트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녀의 고독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강이가 의지할 덩어리를 없다. 소영이 덩어리를 버리고, 아람조차도 덩어리를 떠났다. 이 외로운 상황에서 소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6.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망설이던 강이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밥솥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모에게 강이는 나지막이 말한다. "도와주세요". 마치 그동안 못 먹었던 밥을 몰아서 먹는 것만 같은 딸. 그러면서 강이는 덩어리의 자신을 속죄하며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주기를 부모에게 간청한다. 다음 날 강이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학교에 찾아간다. 교무실에는 그동안 학교의 타자로 떠돌아 다니던, 강이와 아람, 소영을 포함한 수많은 덩어리들이 모여있다. 강이는 여기에 왜 왔는가?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당했던 폭력의 실체를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나와있다. 더 이상 사회 바깥에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사회와 동화되고자 하는 움직임. 소영과 같은 선택. 그러나 선생님들은 강이를 구원해 줄 생각이 없다. 선생님은 상처로 가득한 강이의 얼굴을 앞에 두고도 소녀를 질책하기에 바쁘다. 그들의 눈에 강이는 그저 제도와 질서 바깥을 떠돌아 다니는 덩어리에 불과하고 그녀가 당한 폭력은 단지 불량한 청소년들끼리의 싸움에 그치지 않는다. 강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또다시 마주한다. 한국사회의 민낯. 어른들의 부조리. 부르주아인 소영과 달리 모든 질책이 자신에게 넘어오는 절망. 학교와 어른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강이를 환대해주지 않는다. 그런 강이에게 아람이 제안을 한다. "같이 가자". 어디로? 다시 한번 서울로. 하지만 이번 여정은 다르다. 이번에는 자본을 소유한 소영 없이 하층민인 강이와 아람 단 둘이서만 떠나야 한다. 이 새로운 덩어리에서의 주권은 노동을 할 수 있는, 해본 경험이 있는 아람이 지니고 있다. 노동이라는 자본. 하지만 소녀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은 자신의 육체를 통한 노동 뿐이다. 성적인 육체. 아람은 이미 익숙한 이 노동에 강이는 경멸을 표한다. 그건 단순히 술집에서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난 강이에게 아람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농담을 하고는 배에서 수박을 꺼낸다. 수박을 자를 방법을 고민하던 아람은 강이의 가방에서 식칼을 꺼낸다. 그러면서 말한다. "칼은 누굴 죽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보호하려고 있는 거지". 우리는 강이가 이 칼을 처음 꺼낸 순간부터 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소영을 향하는 칼. 그 칼을 아람은 수박을 자르기 위해 사용한다. 강이는 이 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때의 수박은 단순히 아람의 성적 농담을 위한 대상을 넘어 아람의 세계에 대한 환유로서 작용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수박을 아람이 강이의 칼로 자르고 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아람은 지금 강이의 칼에 담긴 의미를 바꾸며 동시에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아람의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성적으로 공격하려 오는 대상에게 자신의 육체를 내주어야 한다. 칼로 수박을 자르듯, 자기 자신을 해쳐야만 하는 세계. 그건 강이가 꿈꾸는 덩어리가 아니다. 이 절망을 마주한 강이는 아람의 덩어리를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장면으로 돌아온다. 강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두 번째 귀가. 이 귀가는 첫 번째와 어떻게 다른가? 첫 귀가에서 덩어리가 강이를 떠났다면 이번에는 강이가 덩어리를 떠난다. 예전의 자유롭고 행복했던 덩어리를 복원시키고자 했던 강이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제 강이는 집 바깥에는 자신을 위한 덩어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는 이제서야 기차에 앉아있는 강이의 곁에는 왜 아무도 없는지, 강이의 지친 얼굴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두 번째로 돌아온 딸을 보자 어머니는 차분했던 이전과 달리 딸을 때리면서 상당히 격하게 대한다. "어딜 들어와. 나가 죽어. 나가 죽어 이년아!" 물론 이 말은 철저한 반어법이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리는 어머니. 어쩌면 딸이 그토록 원했을지도 모를 반응. 다시 마주앉은 밥상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다. "왔으니까 된거야". 이 말을 들은 뒤에야 딸은 진정으로 가족에게 환대받는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있다. 덩어리를 지우는 일. 진정으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워야 하는 과거. 강이의 어머니는 딸을 절에 데려간다. 어머니가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강이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소영과 싸우던 날 나는 소영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소영 또한 나를 이기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한 쪽의 기도가 강해질수록 다른 한 쪽의 기도는 짓밟힌다. 기도도 기도끼리 싸움을 한다. 어떤 기도가 욕망대로 이긴다면 어떤 기도는 무참히 지게 되어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딸은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딸이 더 이상 가출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소영을 이기고자 하는 기도. 밭에서 스님과 함께 꽃을 따던 중 강이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아무리 따도 줄지를 않아 강이야. 매주 따는데. 그렇게 따는데. 왜 줄어들지를 않는거야!" 왜 줄어들지 않는가? 꽃을 따더라도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 강이를 집 밖으로 끌어들이는 뿌리. 소영이라는 뿌리. 그래야만 딸은 덩어리를 완전히 지워내고 평범한 가족 구성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딸이 교화하는 법. 딸이 회개하는 법. (아마도)다음 날 강이는 한동안 떠나있던 학교에 찾아간다. 이번에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확실하게 자신이 학교의 타자임을 보여주는 강이. 학교는 수능이 끝난 뒤 축제의 분위기로 들떠있다. 그곳에서 강이가 소영을 부른다. 그리고 질문한다. "나한테 왜 그랬어?" 그러나 소영은 이 질문을 무시한다. "뭐가? 뭐라는 거야?" 울먹이며 칼을 들고 소영에게 다가가는 강이. 그러다 손에서 칼을 떨어뜨린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강이는 지금 소영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대답할 수 있는 기회. 마지막 우정의 흔적. 하지만 소영은 이 기회마저 무시하며 강이를 조롱한다. "병신". 이 말을 들은 뒤 강이는 결국 뒤돌아가는 소영을 잡아채 칼로 찌른다. 쓰러지는 소영. 도망치는 강이. 이우정은 이 장면을 마치 목도하는 것처럼 롱쇼트로, 고정된 카메라로 찍었다. 강이는 결국 뿌리를 뽑아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며 교복 입은 소영,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 소영을 죽인다. 그러니까 강이의 이 살인은 소영에 대한 복수를 넘어 한국사회에 대한 10대 타자의 마지막 저항이다. 계급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고발. 소영이 부인한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동시에 여기에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덩어리의 흔적을 지우는 행위이자 자신을 영원히 한국사회의 타자로 위치시킨다는 역설이 담겨있다. 타자에서 또다른 타자로. 그것이 소영의 폭력이 다른 소녀들에게 대물림 되지않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이는 아람의 집에 전화를 건다. 집을 나갔던 아람은 다시 돌아와있다. 그런 아람에게 소영이 묻는다. "왜 그랬어?" 소영에게 한 것과 다른듯 같은 질문. 아람의 대답. "차에 치인 고양이를 또 만났는데 수술을 해야됐어. 고양이 살리려고 그랬다고. 근데 결국엔 죽었어. 그게 다야. 우리 돈 그 정도 밖에 없었잖아".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강이는 전화를 끊는다. 아람도 강이와 같은 절망을 마주했다. 하층민이라는 절망. 고양이를 돌보기에는 너무 가난한 현실. 아람의 세계가 지닌 한계. 결국 소영도 강이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강이는 그것을 질문한 것이 아니다. 강이는 소영에게 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아람에게도 왜 자신을 버렸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내가 홀로 소영을 기다릴 때, 너는 왜 곁에 있지 않았니? 왜 우리를 함께 묶어주던 우정을 버린거니? 강이는 결국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와 TV앞에 앉은 딸과 어머니. 이전과 달리 어머니는 밝은 분위기로 딸에게 말을 건다. 그때 강이는 TV에 등장한 소영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본 강이는 처음에는 살살 웃더니 곧 통곡을 한다. 어머니는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영은 자신의 말대로 꿈을 이루어 가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두고 강이에게 남은 일말의 죄책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강이가 다시 한번 마주하는 소영과의 계급적 간극을 더 주목하고 싶다. 강이가 소영을 죽였다고 한들 살인자로 낙인찍힐 강이와 달리 소영은 사람들에게 배우를 꿈꾸던 소녀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부르주아의 힘이다. 자신의 모든 윤리적 책임을 하층민에게 떠넘길 수 있는 존재. 이제 그 책임은 언제나 그랬듯이 강이에게 넘어간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강이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화면은 거기서 멈춘다. <최선의 삶>도 거기서 멈춘다.

 


7.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영화의 에필로그. 카메라는 다시 논픽션의 시선으로 강이의 동네를 둘러본다. 이어지는 강이의 내레이션.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이도 그랬다. 아람이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이우정은 강이에게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주고 영화를 마친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모두 질문할 것이다.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까? 누군가는 이를 명백한 일탈 행위에 대한 강이와 이우정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에, 그 사회에서, 그것이 강이가 선택할 수 있는, 이우정이 찍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믿고 지지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분명 이우정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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