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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30. 2022

아네트 리뷰

조소의 심연, 조소하는 자의 심연, 그리고 심연의 조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문득 이런 궁금함이 들었다. 왜 하필 뮤지컬 영화일까? 왜 갑자기 영어로 영화를 찍은 것일까? 왜 이번에는 드니 라방이 없을까? 무언가 레오스 카락스 답지 않은 것들이 한데 합쳐져 다가왔을 때의 당혹감. 이런 질문은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를 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질문들이다. 물론 레오스 카락스는 이미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뮤지컬 장르의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홀리 모터스>에는 뮤지컬 장면이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네 번째 영화인 <폴라 X>에서 이미 드니 라방 없이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그러니 <아네트>를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적 전환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진정한 전환점은 물론 <홀리 모터스> 일 것이다. 대신 레오스 카락스는 <아네트>에서 스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와 대척점에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대척점? 하나의 대칭을 이루는 반대항. 레오스 카락스 필모그래피와의 대칭.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홀리 모터스>와의 대칭. 두 영화는 하나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지점에 머물러 있다. 영화적 정반합. 자신의 과거와 대항하며 만들어낸 안티테제의 변증법.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전작들, 특히 <홀리 모터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경유해야 할 것 같다. 레오스 카락스는 21세기가 시작되고 12년이 지나서야, 그가 네 번째 장편 영화인 <폴라 X>를 만들고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의 다섯 번째 장편 영화인 <홀리 모터스>를 완성했다. 그 공백 기간 동안 그에게 정확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레오스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에서 그 간극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간극? 20세기의 레오스 카락스와 21세기 레오스 카락스 사이의 간극. 그건 어떤 간극인가? 그 간극에는 무엇이 있는가? 레오스 카락스는 1986년 드니 라방과 함께 '사랑 3부작'(<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을 만들었다(<폴라 X>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랑에 관한 영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동력으로 운동하는 드니 라방의 육체에 관한 영화. <나쁜 피>를 본 사람이라면 데이빗 보위의 음악에 맞춰 길 위를 춤추며 달려가는 드니 라방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는 운명에 대한 저항. 해소될 수 없는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운동.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불꽃놀이에 맞춰 드니 라방과 줄리엣 비노쉬가 춤추는 장면 또한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보인다. 감정의 운동. 육체를 매개한 감정의 운동. 그러한 운동의 끝에서 드니 라방은 비극을 맞이한다. 그 비극이란 드니 라방의 사랑이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서 나타나는 거대한 간극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랑이 메울 수 없는 간극. 그 간극을 뛰어넘고자 할 때 발생하는 비극. <소년, 소녀를 만나다>에서 여주인공을 구하려는 드니 라방의 시도가 여주인공을 죽게 하는 역설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레오스 카락스는 사랑 3부작에서 이러한 감정의 비극을 서사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랬던 레오스 카락스가 <홀리 모터스>에서는 그 방법론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무엇보다 <홀리 모터스>에는 어떠한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가 진행되고자 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곧장 그 서사를 멈추고 새로운 서사를 투입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의 육체. <홀리 모터스>에서 서사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드니 라방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서사이다. 이때의 육체는 특정 인물을 연기하는 육체가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 그 자신의 육체이다. 광인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며,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육체. 사랑 3부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찬 드니 라방의 육체는 이제 어떤 감정도 없이, 더 정확히는 어떤 감정이든 들어올 수 있는 순수한 육체로 변한다. 이 변화는 마치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13년 간 겪은 공백의 결과처럼 보인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한 질문. 무엇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그럴 때 레오스 카락스는 많은 시네아스트들이 그러하듯이 메타 영화라는 방법론으로 돌아섰다. 질문의 영화화. 그렇기에 인물을 찍는 대신 배우를 찍고, 서사를 만드는 대신 서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찍는다. 레오스 카락스는 그 방법론을 <아네트>에서도 밀어붙인다. 하지만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향한다. <아네트>에는 드니 라방이 없다.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 영화이다. 게다가 모든 장르를 담아내고자 했던 <홀리 모터스>와는 다르게 <아네트>는 뮤지컬이라는 확고한 장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낸 안티테제. 두 개의 테제가 충돌할 때 이 변증법의 결과물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나는 이제부터 이 대칭과 충돌의 선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2. 먼저 <아네트>의 줄거리를 거칠지만 간단히 정리해보자. 스탠드 업 코미디언인 헨리와 오페라 배우 앤은 결혼을 하고 딸 아네트를 낳는다. 그 후 앤은 오페라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는 반면 헨리는 코미디언으로서 계속 전락을 거듭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헨리는 요트 여행에서 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그 사건으로 앤의 영혼이 딸 아네트에게 들어가고 아네트는 엄마 앤과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 실력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헨리는 생전 앤과 친했던 지휘자 친구와 함께 딸 아네트를 데리고 투어를 다니며 돈과 명성을 쌓아 올린다. 그러다가 지휘자 친구가 앤의 과거 연인이며 아네트의 진짜 아버지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헨리는 지휘자 친구를 수영장에 빠뜨려 죽인다. 그 모습을 본 아네트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에서 노래하는 대신 아버지의 살인 사실을 알리고 헨리는 감옥으로 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숙해진 아네트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 헨리를 면회하고 아버지와의 절연을 선언하면서 떠난다. <아네트>의 줄거리는 이게 전부이다. 굳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아네트>가 이 평면적이고 관습적으로 보이는 서사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네트>는 서사적으로 다층적인 영화가 아니며 따라서 서브 텍스트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영화. 그렇다고 <아네트>가 이러한 고전적인 서사에 찬가를 보내는 영화도 아니다. 이상할 정도로 평면적인 서사는 분명 레오스 카락스가 <홀리 모터스>에서 보여주었던 끊임없이 발산하고 불투명한 서사와 정반대 지점에 있다. 레오스 카락스는 그것을 첫 장면에서부터 확실히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들려오는 레오스 카락스의 내레이션.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집중해주십시오. 노래나 웃음, 박수, 울음, 하품, 야유, 방귀는 부디 머릿속에서 해주십시오. 이제 침묵을 유지하시고 쇼가 끝날 때까지 숨을 멈춰주십시오. 숨 쉬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십시오." 이 내레이션을 듣는 순간 누구든지 <홀리 모터스>의 오프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장 안에서 죽어있는 관객들. 마치 영화를 외면하는 것만 같은 관객들을 레오스 카락스가 비밀통로를 통해 마주하고 그 사이를 아기와 개가 유유히 활보하는 오프닝.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탄식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탄식? 영화(좀 더 정확히는 레오스 카락스 자신이 추앙하는 고전 영화의 아름다움) 앞에서 눈 감고 죽어있는 관객에 대한 탄식. <홀리 모터스>는 그 관객들을 죽음에서 깨우고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생각하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기 위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리무진과 드니 라방의 육체. <홀리 모터스>를 밀고 나아가는 동력은 이러한 영화 자체의 역동성이다. 그런데 전작에서 그렇게 관객을 깨우고 싶어 했던 레오스 카락스가 이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에게 죽을 것을 요청한다. 마치 자신의 전작을 부정하는 듯한 선언. 레오스 카락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영화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관객처럼 죽을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내레이션이 끝난 후 화면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준비하는 레오스 카락스와 스파크스의 모습이 이어진다. 준비를 마친 뒤 레오스 카락스는 자신의 딸 나스탸를 곁에 부른 후 마이크를 통해 말한다. "자, 시작해도 될까?(So, may we start?)" 이 말을 시작으로 스파크스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뮤지컬이 시작된다. 녹음을 하던 러셀 마엘과 론 마엘이 노래를 부르며 걸어 나가고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먼 헬버그가 대열에 참여해 노래를 이어 부른다. 그리고 노래를 마치면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는 각각 헨리와 앤이 되어 영화 속으로 떠난다. 분명 이 장면은 영화 전체, 아니 레오스 카락스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입체적이고 역동감 넘치며 배우의 활력으로 가득 찬 장면일 것이다. 영화와 배우의 역동성이 결집된 오프닝.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이 오프닝 이후 영화에는 이러한 역동성을 지닌 뮤지컬 장면이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영화 내내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어지나 이 장면들은 단지 대사를 노래로 옮겨 부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나 후반부로 갈수록 헨리가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거의 강박적이라는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아네트>에 대한 비판 중에는 이러한 강박적인 노래의 사용과 주연배우인 아담 드라이버의 부족한 노래 실력에 관한 언급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레오스 카락스가 <아네트>에서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믿는 쪽이다. 어떤 전략? 자신이 대항하고자 하는 <홀리 모터스>에서 더욱 멀어지기 위한 전략. 반복해서 말하겠다. <홀리 모터스>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배우의 육체를 바라보는 영화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몸. 무엇이든 찍을 수 있는 카메라. 그러나 <아네트>에서 배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강박적으로 소화한다. 바꿔 말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배우들이 소화하고 있는 한 가지 배역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것만 같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홀리 모터스>와 <아네트>의 공통점은 두 영화 모두 영화에 관한 영화, 즉 메타 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에 위치시키는가에 있다. <홀리 모터스>는 영화 바깥의 시선에서 영화를 찍는 행위를 바라본 작품이라면 <아네트>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의 심연에 몸소 뛰어들어 만든 작품이다. 시선의 차이는 곧 태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홀리 모터스>에서 레오스 카락스는 (비록 묵시록적으로 보이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씨네필로서 영화와 배우의 아름다움에 찬가를 보낸다면 <아네트>에서는 영화감독이라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소하고 냉소한다. <아네트>를 이끌어가는 동력과 정조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자학과 조소이다. 영화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영화를 찍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영화는 아름답지만 영화를 찍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레오스 카락스. 어쩌면 <아네트>가 아름답지 않게 보이는 것은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헨리는 두 번의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가진다. 첫 번째 공연은 보란 듯이 성공하지만 두 번째 공연은 실패한다. 이후 다시는 공연을 하지 못한다. 첫 번째 공연과 두 번째 공연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연을 하는 헨리와 공연을 하지 않는 헨리 사이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 헨리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노래로 대사를 말하며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레오스 카락스는 이 모습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런 헨리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뮤지컬의 인공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오로지 스탠드 업 코미디를 할 때뿐이다. 오히려 그가 공연을 할 때는 관객들이 노래하고 헨리는 그런 관객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헨리 맥헨리를 연기하는 아담 드라이버는 한 배역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언 헨리와 앤의 남편 헨리.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굴레 안에서 자유분방한 코미디언 헨리와 달리 그의 아내 앤의 직업은 오페라 배우이다. 뮤지컬 안에서조차 뮤지컬을 하는 앤(여기서는 뮤지컬과 오페라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긴 논의는 하지 않도록 하자). 말 그래도 뮤지컬을 완전히 체화한 인물. 심지어 그런 앤을 동경하는 지휘자 친구조차 오페라 무대에서 지휘하는 인물 아닌가. 헨리와 앤은 여기서부터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인물들이다. 온 힘을 다해 영화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남자와 온몸으로 영화를 체화하는 여자. 레오스 카락스의 분열된 자아. 영화 내에서 헨리와 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슈퍼스타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만 사랑의 양태는 전혀 다르다. 앤이 사랑받는 것은 무대에서 관객들을 대신해서 죽어주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관객들은 앤의 죽음을 통해 또 하나의 삶을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다(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던가?). 배우를 통해 체험하는 타자의 세계와 삶. 우린 이미 그것을 <홀리 모터스>에서 오스카를 연기하는 드니 라방을 통해 지켜보았다.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배우의 육체. 현실에서 배우가 사라진다고 해도 스크린 위에서 배우가 연기한 인물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스크린 위에서 영원불멸의 형태로 남아있는 배우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관객을 위해 대신 삶을 살고 죽어주는 배우. 도식적으로 보자면 앤은 <홀리 모터스>의 오스카와 같은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반면에 헨리는 어떠한가? 헨리와 앤의 차이는 단순히 저속한 유머를 기반으로 하는 코미디 공연과 고상하고 품격 있어 보이는 오페라의 차이가 아니다. 첫 번째 공연 도중 관객들이 헨레에게 왜 코미디언이 되었는지를 묻자 헨리는 돈이나 명예, 여자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의 적개심을 없애기 위해. 웃기는 게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 대사는 물론 정치적인 의미나 존재론적 의미, 혹은 레오스 카락스의 개인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우선 이 대사를 오직 헨리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해석하고자 한다. 헨리는 공연 도중 관객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코미디언이 되었느냐고 묻자 "아니 아니. 아시다시피 나는 심연을 동정해"라고 대답한다. 관객들이 심연이 뭐냐며 웅성거리자 헨리는 마이크로 머리를 치며 "A, B, Y, S, S"라고 한 글자씩 가르쳐준다. 물론 관객들이 심연의 사전적인 의미를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심연이 어떤 메타포인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는 그저 심연의 철자만을 알려주며 그 질문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끈질기게 질문하자 헨리는 결국 "죽지 않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며 대답한다. 이 말이 끝나고 난 뒤 갑자기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더니 헨리가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본 관객들은 당황하지만 한 남자는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아는 듯이 박장대소한다. 이 쇼트를 보는 순간 누군가는 이것이 킹 비더의 <군중>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오마주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레오스 카락스가 <군중>을 자신의 영화로 끌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홀리 모터스>의 첫 장면. 극장 안에서 죽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관객들. 그 관객들 앞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가 <군중>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군중>은 그저 현대의 관객들이 외면하고 있는 고전 영화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레오스 카락스는 <아네트>에서 <군중>을 더 깊이 끌고 온다. 단순히 영화 바깥에서 소리로만 들려오던 <홀리 모터스>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직접 오마주하고 심지어 (너무나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 영화 중간에 그 마지막 장면을 직접 삽입까지 했다. <군중>의 마지막 장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웃던 주인공 존과 메리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서서히 줌 아웃하며 그와 함께 웃고 있는 객석의 수많은 관객들을 보여주며 영화를 마친다. 이 장면의 핵심은 영화가 자신이 군중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오던 주인공을 조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네트>는 이 장면을 정반대로 비튼다. 이번에는 모든 관객이 당황하는 사이에서 오직 한 남자만이 웃고 있다. 대신 레오스 카락스가 오마주 한 것은 인물을 향한 조소의 정서이다. 무엇을 조소하는가? 총을 맞고 죽은 연기를 하던 헨리는 번쩍 손을 들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고는 말한다. "봤지? 나도 죽어". 이때 헨리가 죽는 연기를 한 것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웃기는 것이 살아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진실. 진실이라는 심연. 헨리 본인이 동정한다는 심연. 철저하게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심연. 여기서 헨리는 니체의 말대로 심연을 죽음과 직결시킨다. 자아의 죽음. 심연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 이전의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헨리가 조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 자체이다. 이 순간 그의 조소가 향하고 있는 것은 그의 아내(가 될) 앤과 뮤지컬이다. 앤은 오페라에서 관객들을 대신해서 죽어주며 배우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이때 죽는 것은 앤이 연기하는 인물의 죽음임과 동시에 앤 이라는 자아의 죽음이다. 배우로서 마주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 이후 배우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만을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지는 장르가 뮤지컬 아닌가. 노래와 춤으로 배역을 강조하는 장르. 자유로운 코미디언 헨리의 눈에 그것은 자아의 죽음에 불과하다. 여기서 헨리는 앤과 그녀의 오페라, 그리고 그녀가 몸소 상징하는 영화를 조소한다. 영화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조소하는 코미디언. 그렇기에 헨리는 죽음이라는 심연을 동정한다고 말하고 레오스 카락스가 관객에게 죽을 것을 요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배우가 죽을 시간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죽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헨리가 코미디언을 하는 이유를 다시 상기해보자. "웃기는 게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코미디를 하는 게 뮤지컬의 배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뛰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어쩌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헨리가 아닌 헨리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아담 드라이버일지도 모른다. 오프닝에서 마리옹 꼬디아르와 함께 직접 배역에 뛰어들었던 배우의 반항. "나는 죽음으로 가득 찬 뮤지컬이 싫어요. 나는 자유롭게 살아있으면서 코미디를 하는 신의 유인원 헨리 맥헨리가 좋아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조소와 반항. 혹은 그것을 위해 창조된 인물. 레오스 카락스는 이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레오스 카락스가 그를 조소할 차례이다.


4. 두 번째 공연을 하기 전 헨리와 앤은 결혼을 하고 딸 아네트를 낳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봉제인형 아네트. 인형술사의 조종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마리오네트 인형. 아직 인간 아네트는 스크린에 등장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아네트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자유로운 코미디언 헨리가 아닌 언제나 타자를 연기하고 죽어야 하는 앤의 운명. 감독의 조종을 받는 배우의 운명. 그건 앤과 결혼한 헨리 역시 더 이상 코미디언이 아닌 앤의 남편이라는 뮤지컬 배역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아네트가 인간이 아닌 봉제인형으로 등장한 것은 헨리를 향한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이다. "넌 절대로 너의 배역에서 벗어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레오스 카락스. 아마 그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싫어도 나는 영화를 찍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게 나의 운명이야". 그런 헨리가 두 번째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앤의 남편이 된 헨리가 말이다. 어째서인지 그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첫 번째 공연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극장 관객석에 앉아있던 첫 공연의 관객들과는 달리 두 번째 공연에는 객석 대신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과 술잔이 놓여있다. 마치 헨리의 코미디를 즐기는 대신 지켜보고 평가하려는 듯한 관객. 이 차이는 단순히 계급적 차이라기보다는 첫 공연에서의 관객들과 달리 헨리가 자유롭게 지휘할 수 없는 관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연출이다. 마치 앤의 세계에서 넘어온 듯한 관객들. 물론 관객들은 헨리의 유머에 반응하지만 뮤지컬을 통해 그와 소통하지는 않는다. 헨리는 첫 번째 유머에서부터 실패한다. "여기서 웃기라니. 가스실에서 오럴 섹스받으면서 웃으라는 것도 아니고". 관객들은 이 유머에 웃는 대신 야유를 보낸다. 이 실패의 이유에는 물론 가스실이라는 민감한 단어의 사용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헨리가 이전에 앤과 했던 오럴 섹스를 유머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 유머 속에서 앤은 헨리의 유머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때 헨리와 앤은 뭐라고 했는가? "우린 서로를 너무 사랑해요(We love each other so much)". 거의 강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반복한 구절. 헨리가 앤을 조소한 것은 동시에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앤의 세계를 조소하는 것이다.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 하지만 이건 관객에게 용납되지 않는 유머이다. 더 정확히는 두 번째 공연에서의 관객이 용납하지 않는 유머이다. 지금 헨리의 자리는 단순히 코미디언이 아닌 앤의 남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제 헨리가 웃겨야 하는 대상은 오페라의 세계, 앤이 뮤즈로 존재하는 세계의 관객이다. 코미디의 세계와 앤의 세계, 헨리와 앤이 각각 뮤즈로 존재하는 세계. 첫 번째 공연에서 헨리의 코미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앤의 세계 바깥에서 앤과 앤의 세계를 조소했기 때문이다. 영화 바깥에서 영화를 조소하기. 그런데 레오스 카락스는 헨리를 뮤즈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철저하게 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을 자신의 딸 아네트가 보여주고 있다. 헨리는 그것에 저항하듯이 코미디를 이어나간다. "내가 사실은 오늘 아침에 내 와이프를 죽였어". 이 말은 들은 관객들은 웃는 대신 당황한다. 헨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앤을 너무 세게 간지럽히는 바람에 그녀가 웃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헨리가 앤을 간지럽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여기서 앤은 오럴 섹스 때와 마찬가지로 헨리의 코미디를 위한 대상으로 취급된다. 헨리는 자신의 뮤즈에 반항하기 위해, 혹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영화라는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앤을 향한 조소를 넘어 그녀를 직접 살해한다. 자신의 세계, 코미디의 세계를 상징하는 웃음으로 오페라를 살해하는 헨리. 더 강렬한 조소. 더 격렬한 저항. 이 코미디를 보고 관객들이 분노하며 야유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뮤즈를 모욕했기 때문이 아닌 오페라 배우로서 앤의 정체성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배우의 일. 관객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일. 끊임없이 타자의 삶을 체화하는 일. 그런 앤을 헨리는 웃음을 통해 살해함으로써 그녀를 자신의 세계 안에 복속시키고 동시에 타자가 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대신 죽어주는 여자의 죽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남자. 앤의 세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저항. 그러나 다시 한번. 여기는 앤이 신성한 뮤즈로 존재하는 앤의 세계이다. 헨리의 이러한 전복의 시도는 당연하게도 실패로 끝난다. 야유하는 관객들을 뒤로하고 나가는 헨리.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대를 빠져나갔지만 이윽고 다시 무대로 돌아와 관객과 싸운다. 뮤지컬을 하면서 말이다. 이때의 헨리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관객들을 지휘하는 코미디언이 아닌 그저 자신의 뮤지컬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 한 명의 배우에 불과하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이제 더 이상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드라이버는 이제부터 앤의 남편이라는 영화 속 배역을 인공적으로, 강박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완전히 앤의 세계로 종속된 헨리. 레오스 카락스는 이렇게 코미디언 헨리를, 영화 만드는 것을 경멸하는 자신의 자아를 조소한다. 이제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5. 헨리는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방식, 코미디를 통한 저항이 아니다. 오히려 앤의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앤에게 저항한다. 헨리와 앤, 그리고 아네트는 함께 요트 여행을 떠난다. 한밤중 바다에 나왔을 때는 폭풍우가 요트를 집어삼킬 듯이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앤은 사라진 자신의 남편 헨리를 찾아 나선다. 갑판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헨리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상태이다. 그러더니 헨리는 갑자기 앤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앤은 빗속에 오래 있으면 자신의 목이 망가져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한다. 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지금 헨리가 원하는 것이다. 노래를 상실하는 것. 오페라 배우라는 자아를 상실하는 것. 그때 앤은 더 이상 관객을 대신해 죽을 수 있는 배우가 아닌 오직 헨리의 남편이라는 정체성만이 남게 된다. 헨리는 오페라처럼 앤과 빗속에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는 곧 그녀를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아마 이 장면에서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레오스 카락스가 경애해 마지않는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떠올렸을 것이다. <선라이즈>에서 배를 타는 장면은 두 번 등장한다. 그리고 배를 타는 순간은 곧 죽음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한 번은 도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남자가 아내를 호수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거역하지 못하며 실패한다. 다른 한 번은 배가 폭풍우를 만나 뒤집히고 남자는 가까스로 살아 돌아오지만 아내는 찾지 못한다. 분노한 남자가 자신을 유혹한 도시 여자를 죽이려고 할 때 아내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다. <아네트>는 이 두 장면을 하나로 합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남편. <선라이즈>에서의 살인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르나우는 남자가 도덕적 경계선을 넘으려는 순간마다 그를 제지하면서 마지막에 일출을 선물한다. 그러나 <아네트>에서 헨리는 이 경계선을 넘어선다. 이 순간 헨리는 자신을 창조한 감독의 영화적 뮤즈와도 같은 <선라이즈>를 조소한다. 뒤틀린 뮤즈. 창조자에 대한 저항. 심연 안에서의 저항. 배우로서 죽음을 거듭하던 앤을 헨리는 실제로 죽이면서 더 깊은 심연으로 빠뜨린다. 죽음이라는 심연. 그리고 심연의 죽음. 그러나 심연 밑에는 언제나 더 깊은 심연이 남아있다. 앤은 죽었으나 헨리는 이전의 자유로운 코미디언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가 조소한 자신의 창조자, 레오스 카락스가 앤의 유령을 보낼 것이다. 도덕의 경계선을 넘은 대가는 언제나 유령이 되어 되찾아온다. 그리고 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딸 아네트에게 물려주며 그를 괴롭히겠다고 선언한다. 이제 인형 아네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목소리로 뮤지컬을 이어나가야 한다. 아네트는 언제 노래를 부르는가?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일 때.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이 홀로 빛날 때. 그때 아네트는 어머니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노래라는 명령. 배역이라는 운명. 앤의 뮤지컬은 그렇게 죽지 않고 헨리의 곁에 남아있게 된다. 딸의 뮤지컬을 보았을 때 헨리는 앤의 뮤지컬과 달리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딸의 기적에 매혹되어 지휘자 친구와 함께 아네트를 무대에 세우며 전 세계에 투어를 다닌다. 물론 이것이 아네트에 대한 착취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앤의 뮤지컬을 죽음이라고 조소하던 헨리가 이제는 자신의 딸 아네트를 죽이고 있다. 이건 단순히 돈이나 명성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헨리는 자신이 조소하던 뮤지컬에 매혹된 것이다. 그건 곧 자신의 조소가 실패로 끝났다는 의미이다. 코미디가 실패하자 더 강한 방식으로 뮤지컬을 조소하던 헨리의 눈앞에 아네트가 노래하는 기적이 나타나 그를 매혹시킨다. 마치 영화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헨리 앞에 영화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반박하는 것만 같은 레오스 카락스. 헨리가 조소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더 강하게 그를 조소한다. 그 사이에서 봉제인형 아네트는 헨리와 앤, 그리고 레오스 카락스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런 아네트를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인물은 지휘자뿐이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투어 도중 헨리가 클럽에 갔을 때 지휘자가 아네트를 돌봐준다. 그때 지휘자는 헨리와 앤이 불렀던, 자신이 작곡한 노래 "We love each other so much"를 가르쳐 준다. 이건 아네트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명령에 따르는 인형이 아닌 한 명의 제자,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아네트는 어느 순간부터 헨리 대신 지휘자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헨리는 아네트가 자신과 앤의 노래 "We love each other so much"를 부르는 것을 목격하고 지휘자가 그 노래를 아네트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것은 지휘자가 아네트의 진짜 아버지이고 아네트를 지휘자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필이면 아네트의 소유권을 제기하는 사람이 지휘자이다. 어째서인지 지휘자라는 인물은 레오스 카락스의 또 다른 자아인 것만 같다(게다가 이 지휘자는 극 중에서 이름이 있지도 않다). 지휘자라는 자리. 헨리 자신이 코미디 무대에서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상실한 자리. 지금의 헨리는 감독이라는 지휘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배역에 불과하다. 그런 헨리에게 아네트의 친부라고 주장하는 지휘자가 나타나 아네트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아네트가 생물학적으로 누구의 딸인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레오스 카락스 본인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에 대한 묘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지휘자가 아네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곧 헨리 역시 아네트와 같은 마리오네트 인형이며 자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이다. 헨리가 자신과 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래가 사실은 지휘자가 작곡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마치 자신의 창조자를 만난 것만 같은 피조물. 이 순간 헨리는 이제껏 잊고 있던 자신의 자리를 깨닫게 된다. 뮤지컬 배역이라는 자리. 끊임없이 노래와 춤에 복속되어야 하는 운명. 아네트의 아버지로서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이를 잊어버린 헨리에게 레오스 카락스가 다시 상기시킨다. "너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너의 운명이야".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앤을 죽인 것처럼 헨리는 한 번 더 살인을 저지른다. 앤이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지휘자를 수영장에 빠뜨려 죽이는 헨리. 여기에는 어떤 조소의 감정도 없다. 오로지 지휘자에 대한 경멸, 영화와 감독에 대한 경멸만이 헨리를 움직인다. 이 살인을 통해 지휘자와 동시에 코미디언 헨리 역시 죽는다. 더 이상 헨리의 살인은 코미디나 조소가 아니다. 헨리에게는 살인자라는 배역이 주어졌다. 그 모습을 아네트가 지켜보았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죽이는 현장. 영화를 경멸하는 자아는 영화를 사랑하는 씨네필로서의 자아와 영화를 지휘하는 감독으로서의 자아를 차례로 죽인다. 공존할 수 없는 자아들(그러고 보니 이 세 명의 자아는 오프닝 때를 제외하면 단 한순간도 한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렇게 헨리를 조소하면서 자신을 조소해 나간다. 이제 아네트의 마지막 공연만이 남아있다.


6. 아네트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에서 노래를 거부한다.  대신 노래가 아닌 생생한 증언의 목소리로 아버지의 실체를 폭로한다. "아빠는 사람들을 죽여요". 이건 비유도, 코미디도 아니다. 헨리는  그대로 살인자이다.  순간 봉제인형 아네트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는 . 이때 아네트의 증언은 인형이라는 자신의 운명과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헨리가 아네트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한 것은 아네트를 노래하는 인형이라는 배역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건 아네트가 인간이   있는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 헨리 본인이 그토록 조소했던 죽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배역으로 남아있는 앤처럼 아기 아네트로 남기를 딸에게 강요하는 아버지. 딸이 평생 인형으로 남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폭력. 딸은 그것을 거부하며  명의 주체, 하나의 인격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헨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 살인자의 배역을 소화해야 한다. 앤을 죽이고 지휘자를 죽이고, 그리고 아네트의 자아를 죽이려고  살인자. 죽지 않기 위해 무대 위에서 자신을 죽였던 코미디언은 이제 죽지 않기 위해 살인을  죄로 감옥에 간다. 이건  영화를 경멸하던 자아가 영화에 심취하며 발생한 비극이기도 하다. 그때 분열되어 있던 레오스 카락스의 자아는 헨리와 동일시된다. 영화에서 레오스 카락스가 자신의 자아를 부여했던 앤과 지휘자는 모두 영화에서 죽었다. 그렇기에 코미디언은 감독이 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자아는 영화를 경멸하더라도 영화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감독이라는 배역. 삶의 운명. 그러니 헨리를 심판하는 것은 레오스 카락스 자신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런 자신의 자아를 레오스 카락스가 심판할  가장 먼저 심판해야  죄목은 헨리가 영화를 경멸했다는 것이다. 헨리가 심문을 마치고 교도소에 수감될  그를 둘러싼 관중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1 살인이든  아래이든 그건 상관없어".  미묘한 문장. 이어지는 노래. "우리의 종교였던 그녀는 이제 우리를 위해 죽을  없어". 지금 관중들은 단순히 헨리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위해 죽어주던 배우, 앤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지휘자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헨리의 죄목은 1 살인이 아닌  아래, 배우라는 앤의 자아를 살인한 죄가  것이다. 앤은 영화 속에서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있으나 오페라 배우는 아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레오스 카락스는 법정 장면에서 다시 한번 앤의 유령을 등장시킨다. 오페라를 경멸하던, 영화를 경멸하던 헨리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속에서 저항의 대가를 치른다. 시간이 흐른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헨리에게 그의  아네트가 면회를 온다. 헨리의 눈에는 아직 아네트가 봉제인형으로 보인다. 그런 아네트에게 헨리가 말을 건다. "많이 변했구나, 아네트". 그때 화면 밖에서 인간이  아네트가 대답한다. ". 변했어". 그제야 헨리는 인형이 아닌 인간 아네트를 마주한다. 이어지는 쇼트. 후경에 있던 인간 아네트는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 아네트와 나란히 프레임에 담긴다. 그리고는 인형을 의자에서 치우고 자신이  자리에 앉는다. 이제 아버지가 바라보는, 눈에 담고자 하는 인형 아네트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딸이 침묵을 깨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도 변했어. 그래도 여기 있으면 안전하잖아?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그렇지?" 아버지가 대답한다. "그래, 맞아". 딸이    묻는다. "여기서는 사람도  죽이고 그치? 농담이었어". 아버지처럼 코미디를 해보는 . 자유롭게 연기했던 자신의 과거를 보는 헨리. "근데 아빠는 이제 사랑할  없잖아?" 아네트가 말한다.  없는가? 영화를 찍는  외에는   있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묻는다. " 사랑하면  ?" 딸의 단호한 대답. " ". 아네트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은 자신이 아닌 봉제인형 아네트라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아네트가 헨리를 찾아온 것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금 헨리가 감옥에 있는 것은 앤을 죽인 죄이다. 영화를 경멸한 . 하지만 아네트를 죽이려고 , 아네트를 영원히 인형으로 봉인하고자  것에 대한 죗값은 치르지 않은 상황이다. 아네트는  죄에 대한 판결을 위해  것이다. 헨리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변론한다. 자신은 심연을 보지 않고자 했으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심연을 보았다고 말한다.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말하는 헨리. 그러자 아네트가 노래하기를 자신은 노래하지 않기 위해 불빛을 피해 다닌다고 말하며 노래를 해야만 했던 과거를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노래하도록 만든 아버지 헨리와 어머니 앤을 비난한다. 돈을 벌기 위해, 복수를 위해 자신을 이용한 아버지와 어머니. 헨리는 앤을 감싸지만 아네트는   사라지면 좋겠다고 저주한다. 노래하는 동안 헨리와 아네트의 노래는 화합하지 못한다. 둘은 그저 각자의 노래를 부를 뿐이다.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헨리.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난하는 . 떠날 시간이 되자 아네트가    헨리에게 말한다. "아빠는 사랑할  아무것도 없어." 헨리도 아네트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절대  아래 심연을 보면  ." 그리고 아네트는 떠난다. 카메라는 면회실에 갇혀 떠나가는 딸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헨리를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바라본다. 이건 아네트에게 지은 죄에 대한 아네트의 심판이다. 영원한 작별.  이상 노래하지 않겠다는 .  심판은 앤에게 지은 죄인 영화를 경멸한 죄가 아닌 영화를 찍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 죽인 자아에 대한 죗값. "영화감독은 살인자"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레오스 카락스. 아네트의 이러한 심판을 통해 영화 내내 헨리를 향했던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는 결국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영화를 찍어야만 하는 비극.  운명에 대한 자학. 그래서인지 심연을 보지 말라는 헨리의 마지막 당부는 마치 자신의 딸에게 건네는 메시지인 것만 같다. "너는 절대 영화를 찍지 마렴.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찍어야 해서 미안하구나." 아마도 오프닝에서 그가 자신의  나스탸를 출연시킨   말을 전해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네트가 떠나고 카메라는 이제껏  적이 없는 이상한 구도에서 헨리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헨리가, 혹은 아담 드라이버가 카메라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만 쳐다봐." 헨리의 마지막 저항.  이상 찍히지 않겠다는 선언. 배우가 자신의 배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영화는 끝나야 한다. 헨리는, 아니 아담 드라이버는 마치 카메라로부터 도망치듯이 구석에서 벽을 보며 얼굴을 숨긴다. <아네트> 끝날 때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아네트 인형을 보여주고 끝난다. 영화의 조소. 카메라의 조소. 영화라는 운명. 감독이라는 운명. 배우라는 운명. 레오스 카락스는 마지막으로  모든 운명에 대해 조소하며 영화를 끝낸다.  짓궂은 엔딩. 영화에 대한 경외로 시작한 영화는 영화를 찍는 자신에 대한 조소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가지 위안.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화면에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숲에서 행진하며 나온다. 함께 영화를 찍어준, 그리고 기다려준 모든 이들에 대한 작은 제의(祭儀). 행진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끝났어요. 그래서 말씀드려요.  가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낯선 사람을 조심하고, 좋은 관람이었다면 친구에게 말하세요. 친구가 없거든 낯선 이에게 말하세요. 오늘  모두  자요." 작별 인사를 건네는 <아네트>. 레오스 카락스는 죽음으로 가득  영화에게도 생명력이 있다면 그건 극장 바깥에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생겨난다고 믿는 것만 같다. 나는 <아네트>와의 만남을 나의 친구에게,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아마도 그것이 레오스 카락스를 위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어준 배우들을 위한, 그리고 <아네트> 만든 모든 이들에 대한 나의 가장  헌사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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