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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an 08. 2023

헤어질 결심 리뷰

마침내 사랑이 눈을 뜨는 순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서론. 이 글을 마무리한 지금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다. 분명 <헤어질 결심>은 지금 내가 이 글 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많은 장면과 영화 속 요소들을 이야기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글의 흐름과 문맥을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물론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나의 능력의 한계일 것이다. 만약 지금 여기서 놓친 것들을 통해 다시 시작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글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장면이나 요소가 없다고 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글에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부 비속어들을 순화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경우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으니 이 점을 유의하며 읽어가기를 추천한다. 


1. 두 가지 장면(혹은 대사)에서 시작하고 싶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해준의 대사. "살인사건이 좀 뜸하네. 요즘 날씨가 좋아 그런가." 이 대사를 할 때 해준과 수완은 살인사건을 대비하듯이, 아니 오히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듯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장면. 임호신의 핸드폰을 복구한 뒤 서래와의 문자 내역을 살펴보던 해준은 이런 내용을 발견한다. "어차피 난 곧 죽을 목숨. 철썩 엄마 오래 못 산다니까. 그 새낀 내가 어딜 가든 쫓아오잖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것을 넘어 기다리는 것만 같은 임호신. 한쪽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이상한 대사들에 대한 해답은 다음 대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포로 이사한 뒤 정안이 해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살인이랑 폭력도 같이 있어야 행복하잖아." 이 대사는 단지 해준에게만이 아닌 박찬욱의 세계를 관통하는 대사처럼 들린다. 박찬욱의 영화는 언제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영화에서 죽음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인간의 운명이자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이때 그 안에서 인물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닌 죽음을 향해 스스로 질주해가는 자들처럼 보인다. 무슨 의미인가? 박찬욱의 영화에는 언제나 '파탈(The Fatal)'이 등장한다. 그것은 때로는 팜므파탈이기도 하고 혹은 옴므파탈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지나면서 이 파탈에게 유혹당한 자들이 그들보다 더 먼 곳으로 넘어간다. 유혹하는 자와 유혹당하는 자 사이 관계의 역전. 몇 가지 예시. <복수는 나의 것>에는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미. 류에게 처음 동진의 딸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자는 제안을 한 인물. 하지만 어느 순간 류는 영미보다 더 멀리 나아가고 영미는 그런 류를 따라간다. 팜므파탈에서 옴므파탈로의 전환. <올드 보이>에서 미도는 자신도 모르게 팜므파탈이 된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이우진이라는 진짜 옴므파탈이 존재한다. 팜므파탈이라는 가면의 옴므파탈. <친절한 금자 씨>에서 금자를 유혹한 옴므파탈은 백 선생이다. 하지만 자신이 유혹한 금자는 더 큰 팜므파탈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옴므파탈을 넘어서는 팜므파탈. <박쥐>에서 태주와 상현은 서로에 대한 팜므파탈이자 옴므파탈이다. <박쥐>의 플롯은 이 관계가 지속적으로 뒤집히며 만들어진다. <스토커>에서는 인디아 앞에 찰리라는 옴므파탈이 나타난다. 그러나 찰리는 인디아에게 거절당한다. <아가씨>에서 숙희와 백작은 히데코 앞에 팜므파탈과 옴므파탈로 등장한다. 그리고 히데코 역시 숙희와 백작의 팜므파탈이다. 이렇게 박찬욱의 세계에서 유혹하는 자와 유혹당하는 자의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이다. 이때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마지막에 파탈이 되는 쪽은 어느 쪽인가? 잠시 팜므파탈에 대한 정성일의 표현을 인용하고 싶다. "팜므파탈은 할리우드 서사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단순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윤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윤리적 자리를 고수하기 때문에 동시에 서사 안에서 사라진다. 팜므파탈은 그럼으로써 남자의 징후가 된다. (전형적인 영화 이론에 따르면) 팜므파탈을 거절함으로써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결말에 이르러 스스로를 상상적 서사에서 상징적 세계로 도약시킨다."1) 결국 팜므파탈은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윤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의 팜므파탈과 옴므파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인물들 중 영화의 끝에서 파탈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더 멀리 나아가는 자들이다. 다시 한번 예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는 모순된 인물이다. 스스로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도 류에게 납치를 제안할 때는 (영미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그런 자본의 이동은 화폐의 가치를 존나게 극대화하는 길이고 그건 좆도 죄가 아니야"라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인 명분을 만들어 낸다. 그런 영미에게 유혹당한 류는 납치가 끝난 뒤에도 자신의 윤리를 밀어붙이며 영미보다 더 먼 지점까지 나아가며 영미를 유혹(혹은 능가)한다. <박쥐>에서 상현의 죽음은 성직자의 윤리와 뱀파이어의 윤리를 모두 포기하고 인간으로서 지니는 하나의 윤리, 즉 죽음이라는 윤리를 태주에게 선사한다.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헤어질 결심>에는 명백한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당연히도 서래. 그렇다면 여기 옴므파탈은 어디 있는가? 혹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지만 서래에게 유혹당하는 해준은 서래의 옴므파탈이 아니다. 차라리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영화 중 팜므파탈의 서사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헤어질 결심>은 서사는 곧 팜므파탈인 서래의 서사이자 그녀의 윤리를 따라가는 해준의 변화에 대한 서사이다. 첫 장면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이야기하던 해준은 마지막 장면에서 목놓아 울면서 서래를 찾아 헤맨다. 첫 장면의 해준은 어떻게 마지막 장면의 해준이 된 것일까? 서래는 해준을 과연 어떻게 바꾼 것이며 어디로 데려온 것일까?


2. 해준은 형사이자 남편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철저히 수행한다. 영화의 초반부, 특히나 서래를 만나기 이전까지 해준은 거의 기계와 같을 정도로 차가운 인물로 묘사된다. 물론 여기에는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박찬욱이 박해일을 해준의 역할로 선택한 것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자신의 윤리에 충실한 인물. 어떤 감정이나 욕망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윤리가 더 우선인 인물. 그렇기에 죽은 사람이 간 길이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가야만 하고 자신을 죽이려 한 용의자에게도 가혹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준에게는 부재한 자리가 하나 있다. 그는 가장이면서 남편의 자리에 있지만 아버지의 자리에 있지는 않다. 분명 해준과 정안에게는 자식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극 중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 어떤 자리보다 큰 윤리가 요구되는 자리.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 그런 자리를 박찬욱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다. 이때 해준과 아이를 갈라놓은 것은 무엇인가? 해준의 아이는 현재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그건 해준이나 정안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원해서이다. 바꿔 말하자면 해준의 아이는 학생이라는 자리의 윤리를 철저하게 지키는 중이다. 아버지와 같은 선택. 이 둘은 모두 가정에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회적 지위를 선택하고 그 자리를 지킨다. 그렇기에 해준은 가장이지만 아버지가 아니고 해준의 아이는 학생이지만 자식이 아니다. 이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준의 가정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불안정한 상태이다. 아니 오히려 가정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이 남아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해준의 욕망에 대한 억압이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베드신. 이 장면에서 정안과 섹스를 하는 해준에게서 보이는 것은 섹스의 쾌락이 아닌 남편의 자리에 대한 윤리와 그에 대한 권태이다. 그런 해준의 눈앞에는 자신의 욕망에 자리 잡은 서래의 환상이 나타난다. 욕망이 억압을 비집고 나오는 순간. 그러한 불완전한 억압을 해준은 자신의 철저한 직업윤리로 대체하고 있다. 억압을 위한 윤리. 불완전한 그의 억압이 강해질수록 욕망과 윤리 사이의 간극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그의 욕망은 타자의 침입에 대하여 더욱 취약한 상태에 놓일 것이다. 극 중에서 서래가 중국인으로 설정된 것은 이러한 서래의 타자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용의자라는 타자. 그리고 중국인이라는 타자. 이 타자가 지금껏 해준이 만나왔던 용의자들과 가장 다른 점은 둘 사이에 언어라는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서래의 한국말은 해준만큼 유창하지 않다. 그리고 간혹 어려운 표현을 쓸 때는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해준과 서래 사이의 언어적 계급의 차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해준의 언어와 서래의 언어의 차이. 해준은 자신의 언어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안다. 다르게 말하면 해준은 자신의 욕망을 언어로 숨길 수 있다. 그에 반해 서래는 간혹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 미숙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무엇이 나타나는가? 해준과 다르게 서래는 자신의 언어에서 종종 자신의 욕망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해준과의 첫 대화.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마침내. 이 이상한 표현. 여기서 이미 서래는 자신의 욕망을 여실히 드러냈다. 미처 억압하지 못한 욕망의 잔해. 그런 서래를 보며 해준이 말한다. "마침내. 저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이 말의 번역본. "저보다 자기 마음을 더 솔직하게 표현하시네요." 해준이 서래에게 매혹된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하여 솔직한 그녀의 태도일 것이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자. 서래는 어떻게 팜므파탈이 되었을까? 이 질문을 오해하면 안 된다. 서래는 처음부터 팜므파탈로 해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다. 해준과 서래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들의 관계는 명백하게 형사와 용의자이다. 극 중에서 서래는 총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첫 번째로 중국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두 번째로는 부산에서 자신의 남편 기도수를, 마지막으로 이포에서 철성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여기서 서래가 해준을 만난 것은 두 번째 살인, 자신의 남편 기도수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이다. 세 가지 살인 사건의 차이는 무엇인가? 해준의 관점에서 첫 번째 살인은 자신의 관할이 아니다. 해준의 한국의 형사이고 그 사건은 중국인 서래가 중국에서 저지른 일이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의 서래는 해준에게 완전한 타자이다. 그 타자가 한국에서 살인을 저질러 용의자로 나타났다. 형사와 용의자의 대면. 하지만 두 인물은 곧 그러한 범주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이제 두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윤리가 아닌 욕망이다. 세 번째 살인은 서래가 이포에서 해준을 만난 뒤 저지른다. 다시 말해 이포에서의 첫 만남에서 해준과 서래는 형사와 용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래가 스스로 그 관계 안으로 들어선다. 그제야 서래는 진정한 팜므파탈이 되어 나타난다. 이 도식을 뒤집어보자. 서래의 관점에서 세 살인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 번째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 그때 어머니는 자신을 죽이고 한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 딸의 정체성과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는 선택. 두 번째로는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 기도수는 한국으로 밀입국한 자신을 받아주고 결혼해준 남자이다. 그러나 결혼 이후 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그를 살해한다. 기도수의 학대는 아내를 향한 학대인 동시에 타자를 향한 학대이다. 아내와 타자의 자리를 포기하는 선택. 세 번째 살인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제3자에 대한 살인이다. 여기서 서래는 어떠한 자리도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 해준과 마주한 용의자라는 자리에 자처해서 들어간다. 이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살인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윤리를 저버렸다. 딸의 윤리, 간호사의 윤리, 중국인의 윤리, 아내의 윤리, 그리고 타자의 윤리까지. 그럴 때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것은 그녀의 욕망이다. 오로지 욕망으로만 움직이는 존재. 한 마디로 욕망의 윤리학.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환대받는 것. 중국인에서 밀입국자, 밀입국자에서 한국인, 한국인에서 한 사람의 사랑이 되기까지.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해준에게 잉크처럼 스며들고자 한다. 해준은 자신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타자에 대하여 대답해야만 한다. 낯선 자의 외침. 타자의 메아리. 그녀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신의 자리로 회귀할 것인가?



3. 해준은 두 가지 살인 사건을 담당한다. 구소산에서 일어난 기도수 살인 사건. 다른 하나는 질곡동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그리고 해준은 두 사건 모두 해결은 하나 범인은 잡지 못한다. 두 가지 사건. 두 번의 반복. 두 명의 인물. 홍산오와 송서래. 해준에게 있어 두 인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두 사건의 반복 속에서 해준이 마주하는 실패는 무엇인가? 먼저 서래를 따라가 보자. 서래가 처음 조사를 다녀간 후 해준과 수완은 간병을 하는 서래를 몰래 감시한다. 수완이 자리를 비우자 해준은 홀로 차 안에서 망원경으로 그녀를 훔쳐본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다른 동사를 사용했다. 감시에서 관음증으로의 전환. 불길한 징조이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관음증은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가장 대표적으로 <올드 보이>). 그리고는 곧 해준의 환상이 시작된다. 서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 같은 해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박찬욱은 인물의 환상을 스크린 위에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감독이다. 여기서 핵심은 환상 그 자체가 아닌 이 환상이 관음증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환상이 진행되는 동안 해준의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된다. 환상 속의 해준.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 해준. 욕망과 윤리에 따른 자아의 분열. 이때 경찰 해준이 지켜보는 것은 서래만이 아닌 서래와 함께 있는 또 다른 자아이다. 다시 말해 해준은 서래를 훔쳐보면서 동시에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타자화. 여기서 시선의 권력은 분명 경찰 해준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억압의 성공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해준은 두 가지 자아를 모두 거부하지 않는다. 처음 환상에서 깨어날 때는 환상 속의 자신을 거부하는 듯이 놀라는 모습이지만 서래에게 전화를 걸 때 다시 한번 환상이 진행된다. 그리고 해준은 그 안에서 서래와 함께 있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조용히 훔쳐본다. 여기서 해준은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준은 욕망과 윤리가 자신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해준은 아직 모른다. 스스로 타자화시킨 존재가 자신 안으로 들어온 이상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반드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자. 송서래를 조사하던 중 질곡동 살인사건의 용의자 중 한 명인 이지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해준은 곧장 수완과 함께 그를 잡기 위해 출동한다. 그러자 서래 역시 그 장소로 몰래 따라간다. 관계의 역전. 이번에는 서래가 해준을 훔쳐본다. 이때 서래가 훔쳐보는 대상은 물론 경찰 해준이다. 자신의 윤리를 철저히 따르는 해준. 이지구와 추격전을 벌이던 해준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이지구가 칼을 꺼내 저항하자 해준은 철장갑을 끼며 대응한다. 이 순간 서래는 차를 타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여기서 서래는 무엇을 보는가? 무자비하게 용의자를 때리는 경찰. 자신이 보았던 다정한 해준이 아닌 한없이 냉정하고 폭력적인 해준. 그때 서래가 보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아는 인물의 이면이 아니다. 자신을 대하는 해준과 타인을 대하는 해준, 서래는 그 간극 자체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해준에게 있어 단순한 용의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관음증. 그 사이에서 차이는 무엇인가? 해준은 관음증 속에서 자기 자신을 타자화시켰다. 즉 서래를 사랑하는 해준은 경찰 해준이 아니다. 그러나 서래의 관음증에는 환상이 없다. 따라서 서래의 사랑에서 해준은 그저 경찰 해준이 아닌 인간 해준이다. 둘의 사랑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해준에게 있어 용의자 서래와 여자 서래는 공존할 수 없다. 두 인물이 한 명의 남자와 여자로서 만나기 위해서는 경찰 해준, 혹은 용의자 서래가 사라져야만 한다. 물론 해준은 경찰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해준이 서래와 만나기 위해서는 서래가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경찰 해준이 해야 할 일은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아닌 서래에게서 용의자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그녀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 범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범인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범인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경찰 해준의 윤리는 무너지게 된다. 그건 자신의 윤리와 욕망이 공존할 수 있다는 해준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윤리의 붕괴. 믿음의 붕괴. 이 붕괴는 해준의 환상에서도 나타난다. 이지구를 조사한 뒤 홀로 서래의 집을 찾아가 훔쳐보는 해준. 분명 이것은 감시가 아닌 관음증이다. 여기에는 경찰 해준이 아닌 서래를 욕망하는 남자 해준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잠도 잘 자고 일어날 수 있다("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하는 거야"라고 말하던 해준을 떠올려보자). 잠시나마 윤리의 억압에서 벗어난 상태. 그리고 해준의 관음증은 계속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훔쳐보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시선을 즐기고 있다. 관음증과 노출증. 이 상황에서 시선의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한 장면을 살펴보자. 서래가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것을 해준이 지켜본다. 자고 있는 그녀의 담배에서 떨어지는 담뱃재를 해준의 환상이 재떨이로 받아준다. 그리고 해준이 말한다. "우는구나. 마침내." 이 장면에서는 마치 해준이 서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말한 것처럼 연출되었지만 실제 해준은 서래의 옆이 아닌 차 안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환상을 경유한 시선 안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소타자의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어떤 모습? 마침내 잉크처럼 퍼진 슬픔이 몸을 지배하는 모습. 그래서 그토록 기다린 눈물이 마침내 흐르는 모습. 이 순간 서래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닌 도덕의 범주 안으로 들어온 한 명의 평범한 여인이 된다. 해준이 탐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해준이 어떠한 도덕적 가책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러면서 자신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고도 다가갈 수 있는 존재.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해준이 잠자리에 들 때 카메라는 해준 몰래 지그시 웃고 있는 서래를 보여준다. 서래가 운다는 생각은 오로지 그녀를 도덕의 범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해준의 환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 환상에서 주도권을 가진 쪽은 해준이 아닌 서래이다. 해준이 어떤 환상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던 서래는 그 자체로서 온전히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서래의 웃음은 마치 해준의 이러한 환상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불완전한 환상. 해준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그가 지키고자 했던 윤리와 욕망의 공존도 실패할 것이다. 그러니 해준은 선택해야 한다. 다시 윤리의 자리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꺼이 윤리를 포기할 것인가?


4. 이제 질곡동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해준은 홍산오와 어떻게 만나는가? 서래를 지켜보며 잠을 푹 잔 후 출근한 해준의 사무실에 서장이 와있다. 아침인사를 한 해준에게 서장은 구소산 사건을 종결시키고 질곡동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윤리의 명령일까? 이상한 점은 해준에게 이 명령을 하는 서장이 이 장면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해준이 부산을 떠나 이포로 갔을 때조차 마찬가지이다. 해준에게 윤리의 명령은 사람의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장의 명령은 무엇인가? 이 명령에서 요점은 서장의 의도가 아닌 해준이 받아들이는 명령의 의미이다. 구소산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서래는 공식적으로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리. 해준이 그토록 바라는 서래의 자리. 분명 해준은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명령이 도착했다. 그러니 이 명령은 윤리의 명령이 아닌 윤리를 가장한 욕망의 명령이다. 욕망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할 때 해준이 해야 할 일은 재빠르게 윤리의 자리로 돌아가 욕망을 숨기는 것이다. 질곡동 사건은 그 억압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수완은 이를 거부한다. 수완은 서래를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 없다. 타자에 대한 거부감. 회식 자리에서 홀로 남은 해준에게 수완의 환상이 귓속말로 속삭인다. "물론 엄마를 죽인 게 남편을 죽인 증거는 아니죠. 근데 형이 이런 말 한 적이 있잖아요.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 해준이 갈등하는 순간 서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서래의 집 거실에서 수완이 자고 있고 집은 난장판이 되어있다. 해준과 우리는 얼마 뒤 이것이 수완이 아닌 서래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래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경찰이 술 먹고 여자 집에 오면 폭력 아닌가요?" 이 순간은 서래가 용의자가 아닌 피해자의 자리에서 해준을 마주하는 첫 번째 순간이다. 수완이 서래를 용의자의 자리로 밀어낼 때 서래는 그 폭력을 고발하며 자신이 받은 고통을 해준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해준과 서래가 생각하는 피해자의 자리는 같은 자리가 아니다. 해준에게 있어 용의자와 피해자의 자리는 공존할 수 없다. 서래가 피해자의 자리로 옮겨 간 순간 살인 용의자의 자리는 곧바로 사라져야 한다. 피해자는 오로지 피해자여야만 한다. 그러나 서래는 언제나 자신이 타자의 자리에서 받아온 고통을 말해왔다. 중국에서 밀입국할 때, 남편에게서 학대를 받을 때 고통받던 순간. 서래의 살인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래에게 살인 용의자와 피해자의 자리는 함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해준은 그 고통에 대해서 듣지 않았다. 인식의 간극. 언젠가 그 간극이 깨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번에는 해준이 서래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이스크림만으로 저녁을 때운 서래에게 자신이 아는 "단일한" 중국 음식을 해주기 위해 자신의 집에 그녀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서래는 해준이 벽에 붙여둔 미결 사건들의 사진들을 발견한다. 해준의 고통. 경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 그 자리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질곡동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건을 살펴보던 서래는 홍산오의 여자친구 중 오가인에게 주목한다. 홍산오가 죽을 만큼 사랑한 여자. 그래서 그토록 싫어하는 감옥에도 가줄 수 있는 여자. 해준은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지나쳤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가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해준과 서래가 이 대화를 하는 동안 박찬욱은 해준이 홍산오를 쫓는 장면을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마치 서래가 해준의 수사를 돕는 듯한 장면. 서래는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 해준이 놓친 사실. 홍산오는 오가인이 결혼했다는 사실에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인을 향한 홍산오의 사랑은 윤리를 뛰어넘는 욕망이다. 마치 해준을 향한 서래의 욕망처럼. 해준은 철저하게 윤리의 자리에서만 홍산오를 바라보았기에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서래는 윤리가 아닌 욕망의 시선에서 그를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동시에 서래의 지적은 당연히도 해준 본인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욕망의 윤리를 실현하기. 그것을 위한 첫 번째 시험. 홍산오가 막다른 옥상에서 멈췄을 때 총을 든 해준이 다가가 말을 건다. "너 돈 때문에 범이 죽인 거 아니지? 내가 다 알아보고 왔어. 너 한 달 감옥 사는 동안 범이가 오가인을 건드렸어. 맞지?" 그 말을 들은 홍산오가 등을 돌려 해준과 마주 본다. "사실 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거든. 근데 남편이 여자를 때려. 나 그 남편 새끼 죽이고 싶어 미치겠다 아주." 홍산오에게 서래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는 해준. 경찰과 용의자가 아닌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자 하는 해준. 홍산오의 대답. "여자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랑 왜 자요? 나도 쓰레기이지만." 해준이 맞장구치며 대답한다. "그러니까. 아니 네가 왜 쓰레기야? 넌 가인이 진짜 사랑하잖아. 너 가인이 때문에 다 포기한 거 아니야 씨발." 그 순간 해준의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이 발사되고 홍산오의 다리를 맞춘다. 이것이 해준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윤리를 넘어 욕망의 자리에서 홍산오를 마주하고자 했던 해준의 시도는 실패했다. 욕망이 바깥으로 스며 나올 때 윤리가 다시 한번 나타나 욕망을 억압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해준과 홍산오의 자리는 경찰과 용의자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홍상오가 가장 기피하는 자리. 그러자 감옥에 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남자는 해준이 규정한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욕망의 자리로 들어선다.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던 홍산오는 해준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가인이한테 "나 너 때문에 고생 꽤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이렇게 좀 전해주세요." 그때 옥상 밑에서 오가인이 찾아와 홍산오를 말린다. 그 모습을 본 홍산오는 말을 바꾼다. "안 전해 주셔도 되겠네." 그리고 해준의 눈앞에서 자살하는 홍산오. 그렇게 홍산오는 오가인의 남자로 떠난다. 하지만 해준은 실패했다. 이 실패는 단순히 해준 본인의 실패를 넘어 홍산오의 저항에 의한 실패이다. 어떤 저항? 만일 홍산오의 유언을 해준이 가인에게 직접 전했다면 해준은 홍산오의 욕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산오는 이를 거부하고 본인의 죽음을 오가인 앞에서 보여줌으로써 자신만의 방식으로 욕망을 실현시켰다. 홍산오의 욕망은 홍산오만을 위한 것이다. 거기에 해준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해준의 실패. 그의 실패는 곧 서래의 실패이다. 윤리를 넘어 욕망의 얼굴로 마주하는 것. 서래는 해준이 자신의 가르침을 홍산오에게서 실현시키기를 기대했다. 그가 경찰의 자리에서 벗어나다고 한들 그에게는 아직 남편의 자리가 남아있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자리를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의 가르침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첫 번째 실패는 곧 두 번째 실패의 예고가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5. 해준은 서래의 실체를 언제 알게 되는가? 서래의 부탁으로 월요일 할머니를 대신 간병하던 해준은 서래와 같은 기종인 할머니의 핸드폰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다. 기도수가 죽은 날 138층에 기록되어 있는 층계 기록. 거기서부터 해준은 다시 시작한다. 송서래의 예상 행적을 그대로 재현하는 해준. 그리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해준의 환상이 함께 다시 나타난다. 이 환상이 이전의 환상과 다른 점은 욕망의 자리가 아닌 윤리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환상에서는 경찰의 자리에 있는 해준이 욕망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경유해 소타자인 서래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욕망이 아닌 윤리의 자리에서 대타자인 서래를 지켜본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해준이 보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대타자는 절대 주체의 환상의 영역에 속해있지 않다. 서래와 해준을 따라가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두 인물을 분리하지 않고 마치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길을 갔던 것처럼 하나로 합친다. 해준의 운동은 곧 서래의 운동이 되고 그 운동은 곧 재현의 운동이다. 정확히 말하면 해준이 욕망하는 여자 서래가 아닌 용의자 서래를 재현하는 운동. 그리고 마침내 서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간 해준은 핸드폰에 적힌 층계 기록을 확인한다. 선명하게 적혀있는 138층. 더 이상 용의자가 아닌 범인이 된 서래. 그래서 서래가 기도수를 밀었던 순간 해준은 가해자 서래가 아닌 피해자 기도수와 하나가 된다.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윤리의 자리에서 이 여자를 추방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의 자리에서 그녀를 환대할 것인가? 집으로 돌아온 서래 앞에 낯선 모습의 해준이 먼저 와서 앉아 있다. 서래가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해준이 자리를 옮기고 휴대폰에 쓰인 층계 기록을 보여주며 묻는다. "높은 데 무섭다면서요. 왜 그렇게 맞으면서, 무슨 가축처럼 몸에 낙인까지 찍혀가면서도 경찰에 신고를 안 해요? 왜 경찰을 안 믿어요?" 서래의 대답. "중국 돌려보낸다고...(협박했어요)" 이 대화에서도 해준은 여전히 서래가 타자의 자리에서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준이 다시 묻는다. "그래서 남편한테 협박 편지를 보냈어요?" 그때 서래의 플래시백이 화면에 나타나고 해준도 우리처럼 이 장면을 바라본다. 관객과 같은 위치에 자리한 해준. 플래시백은 환상이 아닌 재현이다. 기억의 재현. 서래는 환상 속에서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다. 협박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서 서래가 답한다. "언젠간 올 편지였어요. 뇌물 다 진짜니까." 그 후 기도수가 출입국 외국인청에 보낸 편지와 수완의 방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대답한다. 절망한 해준이 묻는다. 여기서부터 서래가 몰래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계산하기를 바란다.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들 다 지우고 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그 말을 들은 서래가 일어나 해준을 뒤에서 안으며 말한다. "우리 일을 그렇게 얘기하지 마요." 해준의 대답.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서래는 모든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어간다. "내가 품위 있다고 했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나는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이 순간 오버 더 숄더로 해준을 찍던 카메라가 줌 인 하며 클로즈 업으로 해준의 얼굴에 다가간다. 그리고 나오는 대사. "완전히 붕괴됐어요." 무엇이 붕괴되었는가? 경찰의 윤리. 경찰의 자부심. 이 말은 곧 욕망을 포기하고 윤리를 선택한 해준의 결단이다. 윤리와 욕망이 공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해준의 믿음도 함께 붕괴됐다. 이제 해준에게 서래는 더 이상 매혹적인 여성이 아닌 한 명의 범인일 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신 스스로 잡기를 포기하고 놓친 범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다. 그녀는 범인이지만 범인의 자리에 갈 수 없다. 해준이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타자.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해준. "할머니 폰 바꿔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은 이 말을 남기고 서래를 떠날 때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이때 뒤로 물러나면서 동시에 위로도 올라가기 때문에 카메라가 끝까지 뒤로 갔을 때는 바닥이 아닌 천장이 프레임에 잡힌다. 그래서 프레임 안에 홀로 서 있는 서래는 상당히 불안정한 구도로 찍혀있다. 하지만 이것이 쇼트의 끝은 아니다. 서래가 소파에 앉아 프레임에서 사라지자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하강의 움직임을 본 적이 있다. 해준이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서래를 훔쳐보던 순간, 그래서 마침내 서래가 운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잠자리에 들던 순간. 해준의 환상이 끝날 때 그의 환상을 비웃듯이 웃고 있는 서래를 비추던 움직임. 이 운동의 주인은 서래이고 그건 곧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은 서래라는 의미이다. 소파에 앉은 서래는 인터넷 사전에서 붕괴의 뜻을 검색한다. 붕괴:무너지고 깨어짐. 그 뜻을 깨달은 서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첫 번째 하강 운동에서 웃고 있던 서래는 이제 진정으로 울고 있다. 이 눈물은 어떤 눈물인가? 서래는 이미 해준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그때의 눈물은 자신이 누군가의 사랑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기쁨의 눈물이라면 이번 눈물은 다시 한번 타자의 자리로 추방되었다는 절망의 눈물이다. 슬픔에 빠진 서래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펜타닐이 들어있는 용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엄습해 오는 불안. 하지만 서래는 죽음을 거부한다. 펜타닐의 시점에서 서래를 바라보던 쇼트는 곧 이포에서 수면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온 해준의 쇼트와 디졸브 된다. 전혀 다른 시공간의 중첩. 여전히 해준의 뇌에서 사라지지 않은 서래. 추방당한 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 유령을 맞이할 차례이다.


6. 해준은 정안이 살고 있는 이포로 옮겨온다. 이포라는 공간. 이 지명은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가상의 지명이다. 이상한 선택. 해준이 원래 살던 곳의 지명은 실제로 있는 지명인 부산이다. 분명 박찬욱은 실재하는 다른 지명을 쓸 수 있었음에도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실재와 가상.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부산과 이포 사이에는 물리적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준은 부산에서 일하면서도 어느새 이포에 가 있고 두 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두 공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해준에게 부산은 경찰로서 일하는 공간이고 이포는 남편으로서 존재하는 공간이다. 경찰의 공간과 남편의 공간. 한 마디로 윤리의 공간.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이포로 해준이 옮겨오기 전까지 이포에서의 장면은 오로지 정안과 해준의 집만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남편의 공간을 이포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설정했는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다. 경찰 해준은 분명 자신의 직업윤리를 충실히 따른다. 경찰의 자리를 지키는 데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반면 남편 해준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윤리를 지키려 하나 그 윤리에는 사랑이 부재하는 상태이다. 공허한 윤리. 이건 정안 역시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보기에 해준을 위한 여러 행동들(이를테면 담배를 끊게 하기 위해 도라지 말랭이를 구하거나 중년 남성 우울증 극복을 위해 자라 진액을 추천하는 것들)은 그를 진정 사랑해서 한다기보다는 그저 남편의 자리를 공고히 유지하기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정안을 연기하는 이정현이 박해일 못지않게 차갑고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공허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자리를 현실의 어떠한 욕망도 개입하지 못하는 가상의 공간에 위치시켜야 한다. 허상의 윤리. 혹은 윤리라는 허상. 허나 이제는 그러한 윤리의 도피가 불가능하다. 경찰의 윤리가 팜므파탈에게 무너졌다. 그러자 해준은 경찰의 자리를 남편의 자리가 있는 이포로 가져온다. 욕망으로부터의 도피. 윤리라는 방어선. 무너진 경찰의 윤리를 남편의 윤리로 둔갑하기. 더욱 강한 억압. 억압이 강해질수록 해준은 피폐해져 간다. 그런 해준을 옆에서 바라보는 정안도 함께 지쳐간다. 집에서 석류를 따며 대화하던 중 정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당신 이포 와있어서 난 정말 행복한데..." 이에 해준이 힘없이 대답한다. "행복해 나도." 그러자 정안이 반박하듯이 대답한다. "당신은 살인이랑 폭력도 같이 있어야 행복하잖아." 이 대사 직후 서래가 철성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철성은 자신의 엄마에게 사기를 친 임호신을 찾기 위해 서래를 폭행하며 난동을 부린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해준을 행복하게 하는 살인과 폭력. 하지만 해준과 경찰은 이 폭력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서래가 겪고 있는 폭력은 타자의 자리에서 겪고 있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서래는 끊임없이 한국 사회에 자신을 환대해줄 것을 요청하는 중이다. 하지만 서래가 한국에 정착하는 방법은 기도수나 임호신 같은 부패한 남성들과 함께하는 것뿐이다. 그건 환대받지 못하는 자리이다. 여전히 타자에 자리한 서래. 그 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폭력. 해준이 무관심한 폭력. 그러나 서래는 그 폭력에 그저 당하기만 하지 않는다. 자신을 때리려고 하는 철성을 포크로 찔러 저항하는 서래. 지금의 서래는 과거 기도수에게 학대당했을 때와 같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감내하는 연약한 타자가 아니다.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자의 자리 자체에 익숙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해준이 일하는 경찰서에 찾아가 화재경보기를 울린 뒤 밖에 나와있는 해준을 훔쳐보는 서래. 그리고 해준이 그랬듯이 자신의 스마트 워치에 그날 본 것을 녹음한다. 뒤바뀐 관음증. 그러나 그녀의 관음증은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드라마에서 본 상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한다. 부산에서는 그저 드라마 속의 대사를 따라 하는 정도에 그쳤다면 이제는 드라마 속 상황을 현실에서 재현하고자 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어떤 욕망? 타자의 자리에서 해준을 탐하는 욕망. 반복해서 되뇌이자. 서래가 지금 있는 자리는 해준이 마주해보지 못한, 혹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여기서 시선의 권력은 오로지 서래의 몫이다. 타자의 자리에 대한 향유. 그렇다면 서래는 이제 환대받기를 포기한 것일까? 하지만 아직 팜므파탈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 해준에게 아직 남아있는 윤리. 남편의 윤리를 넘어서게 하는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이포에서 해준과 서래는 서로의 아내와 남편을 함께 만난다. 남편 해준과 아내 서래. 그 만남에서 서래는 자신이 이포에 온 이유를 드라마 때문이라고 말한다. 드라마라는 환상. 재현이라는 욕망.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가공된 환상인 드라마가 현실에서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기반인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어야 한다. 서래는 자신의 욕망을 가로막는 그 윤리를 만난 것이다(서래가 본 드라마는 정안이 일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다. 정안은 그 드라마가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포라는 공간은 해준과 정안에게 있어 오로지 윤리만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그곳에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발현하고자 하는 팜므파탈이 도착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수산시장에서 산 생선을 손질하던 해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대신 받은 정안이 해준에게 전하는 말. "축하해. 살인 사건이야." 이포에서 일어난 첫 번째 살인 사건. 윤리로만 작동하는 곳에 찾아온 욕망의 외침. 마치 서래는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아내라는 윤리를 포기한 것처럼 해준에게도 남편이라는 윤리를 포기하고 욕망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생존이라는 욕망을 위해 남편을 죽였던 여자는 이제 사랑이라는 또 다른 욕망을 위해 다시 한번 남편을 죽이고 자신의 탐하는 남자를 유혹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팜므파탈. 욕망의 윤리를 실현하는 자. 그런 서래에게 해준이 질문한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 질문에 서래가 맞받아 치듯이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7. 서래는 호미산으로 해준을 초대한다. 호미산은 어디인가? 서래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외조부 계봉석의 산. 비록 최종적으로는 재판에서 지면서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산.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호미산을 해준과 서래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로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이 허용하지 않는 관계. 그러나 욕망에 한하여 가장 진실된 관계. 그곳에서 피의자 서래가 경찰 해준을 부른다. 눈이 내리는 밤, 함께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 햇빛이 창창한 대낮에서 홀로 힘겹게 암벽 등반을 해야 했던 구소산과 대비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정상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외조부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신세를 한탄하며 서래가 하는 말.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하고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 마디라도 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죠." 그러자 해준이 화를 낸다. "지금 농담할 땝니까?" 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다. 여전히 욕망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해준. 그런 해준을 보며 서래가 중국어로 말한다. "날 떠난 다음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죠?" 그리고 마지막은 한국말로 끝맺는다. "마침내." 끊임없이 욕망에 눈 뜨도록 인도하는 팜므파탈. 이번에는 해준이 말한다. "지난 402일 동안 당신을... 당신이... 그렇다고 해서 난 경찰이고 당신이 피의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또다시 윤리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해준. "내가 서래 씨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죠? 아니 안 궁금하댔나?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윤리 앞에서 꼿꼿하게 욕망을 지키는 여자. 해준의 윤리적 자부심을 붕괴시킨 여자. 그러고는 서래의 어머니와 외조부의 유골을 뿌리는 해준. 서래는 자신의 어머니와 외조부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 순간 카메라가 서래의 시점 쇼트로 전환된다. 서래는 절벽 끝에서 유골을 뿌리고 있는 해준의 등 뒤를 보고 있다. 불안한 쇼트. 분명 이전에도 서래의 시점 쇼트가 등장한 적이 있음에도 우리는 이 쇼트에서 어떤 불안을 느끼게 된다. 어째서? 우리는 서래가 이미 자신의 남편을 산 정상에서 밀어 죽인 것을 알고 있다. 그때와 같은 상황. 만약 여기서 서래가 해준을 죽인다면 지금껏 영화에서 우리가 보았던 팜므파탈의 서래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녀가 실현했다고 믿어왔던 욕망의 윤리도 거짓이 되어버린다. 제발 그를 죽이지 마세요. 우리는 배반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불안은 해준과 관객인 우리가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해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까지 타자의 자리에 있는 서래만을 지켜보았다. 그 타자가 울타리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오고 있다. 스스로 안다고 자부했던 타자를 마주해야 할 때의 공포. 해준은 죽음을 예감하듯 슬며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여기는 구소산이 아닌 호미산이다. 해준을 미는 대신 뒤에서 껴안는 서래. 그리고는 해준이 바다에 버리라고 했던 할머니의 핸드폰을 건네준다. 깜짝 놀란 해준이 왜 버리지 않았냐고 묻자 서래가 답한다.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무너진 해준의 윤리를 복구시키는 서래.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부산에서 서래가 마주했던 상황. 자신의 윤리가 붕괴되자 서래를 추방했던 해준. 뒤집어 말하면 서래가 해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준의 윤리가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준은 경찰의 윤리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그 윤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매혹적인 여자라도 서래는 피의자이고 자신은 경찰이어야 한다. 그러자 서래는 자신의 욕망을 내던지고 해준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간다. 윤리의 세계. 그 세계에서 자신은 피의자의 자리에서만 해준을 만날 수 있고 해준에게 기억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해준을 한 명의 남자로서 마주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것이 서래가 한국이라는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서래에게 산이라는 공간은 생존이라는 욕망의 장소가 된다. 구소산에서는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죽였다면 호미산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세계에 환대받기 위한 선택을 한다. 영화의 초반부, 해준이 서래를 조사할 때 서래가 했던 말. "공자님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서래는 인자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산에서 생존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는 여자이다. 해준에게 휴대폰을 건넨 뒤 해준의 립밤을 바르는 서래. 이어지는 한 마디. "난 해준 씨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이윽고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두 사람.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키스 신. 이 키스에서는 분명 해준과 정안의 섹스 신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는 서래.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고자 했던 팜므파탈은 해준의 피의자로 자신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의 승리일까? 집으로 돌아온 해준은 이주임과 집을 떠나는 정안을 마주한다. 호미산과 달리 이곳은 눈이 오지 않았다. 해준은 호미산에서 경찰의 자리를 지켜냈지만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의 자리가 사라져 있다. 우리는 이미 해준과 정안의 관계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윤리라는 허상으로 유지되었던 관계. 정안은 이제 그런 공허한 자리를 지킬 생각이 없다. 윤리를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는 아내. 정안이 이혼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임호신에게서 걸려온 두 번의 전화라는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그때 정안이 해준을 의심하면서 했던 말. "혹시 네가 죽였냐? 둘이 같이 죽였냐?" 이전에 정안이 해준에게 한 말을 기억하자. "당신은 살인이랑 폭력도 같이 있어야 행복하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살인사건이 생기지 않았던 곳에서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니 정안의 시선에서 이 살인사건은 해준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저지른 사건처럼 보일 것이다.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남편 해준과 달리 살인사건만 일어나면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행복해 보이는 경찰 해준. 마치 남편의 자리를 버리고 경찰의 자리를 선택한 것만 같은 상황. 정안은 더 이상 그런 남편의 자리를 지켜줄 생각이 없다. 그렇게 남편 해준의 윤리가 무너진다. 아니 어쩌면 남편의 자리와 경찰의 자리는 처음부터 공존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윤리로 작동하던 이포는 이제 윤리가 사라졌다. 억압이 사라진 그 빈자리에 이제 욕망이 자리 잡을 때이다.


8.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랬듯 철성의 어머니에게 펜타닐 4알을 먹이고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위치 추적 앱을 통해 서래를 따라가며 전화를 건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자 돌아오는 서래의 대답. "나한테 고맙다고 하셔서요." 무슨 의미인가? 서래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삶이라는 고통의 윤리에서 벗어나 죽음이라는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을 철성의 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실현한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넘어서 타인의 어머니의 욕망에까지 도달하는 팜므파탈. 그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철성의 어머니는 철성이 임호신을 살인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윤리적 경계선이었다. 그 경계선이 사라지는 순간 철성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임호신을 죽이겠다는 욕망뿐이다. 즉 서래는 해준뿐만이 아니라 철성과 철성의 어머니에게도 그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도록 인도한 것이다. 그 결과 (그녀가 의도한 결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정안 역시 윤리를 벗어나 욕망의 길에 들어선다. 한 남자를 넘어 한국 전체의 팜므파탈이 되고자 하는 여자. 그런 서래에게 해준이 다시 한번 임호신이 가지고 있었던 음성 파일에 대해서 물어본다. 어떤 내용이 들어있었냐는 질문에 서래가 대답한다.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해준이 당황하며 되묻는다. "내가요?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이 녹음 파일에 들어있는 내용을 알고 있다. 해준과 서래가 부산에서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 그 대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서래가 범인인 것을 알고 난 후 자신의 무너진 윤리를 고백하며 그녀와 결별하는 해준. 분명 그 대화에서 해준은 사랑한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서래가 오해할만한 표현을 쓴 것도 아니다. 해준은 자신이 윤리를 선택했으며 서래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왜 서래는 해준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일까? 그 대화 이전까지 해준은 분명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래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해준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닌 윤리라는 이름 뒤로 자신의 사랑을 숨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윤리에 억압당하는 욕망. 서래는 바로 그 욕망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니 해준이 욕망을 포기하고 윤리를 선택했다는 내 앞선 표현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서래가 그때 흘린 눈물은 자신이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아닌 해준이 윤리를 선택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마음 안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흘리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최초로 환대받은 순간. 해준은 그 순간을 언어를 통해 숨기고자 했지만 서래의 불완전한 한국어는 오히려 언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운전하던 서래가 차를 멈춘 뒤 중국어로 말한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는 서래. 해준이 언어로 자신의 진실을 숨긴 것처럼 서래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감정적 진실을 뒤로 숨긴다. 감정적 미결 상태. 이어서 서래가 다시 말한다. "해준 씨, 바다에서 건진 전화 그거 다시 버려요. 더 깊은 바다에 버려요."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는 서래. 분명 그녀는 호미산에서 그 휴대폰을 통해 재수사해서 자신을 피의자의 자리에 보내라고 말했다. 왜 그녀는 선택을 바꿨는가? 서래는 해준에게 휴대폰을 주며 구소산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준은 여전히 임호신 사건에 관해서 질문하고 있다. 두 사건에서 서래의 차이점. 구소산 사건에서 서래는 자신의 남편을 직접 죽였지만 임호신 사건에서는 임호신이 아닌 고통받는 철성의 어머니를 죽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던 사건의 반복. 서래에게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닌 생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윤리적 결단이다. 그것이 타자들의 윤리이고 타자들의 연대이다. 하지만 해준은 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경찰 해준에게 있어 살인은 어떤 이유에서 이든 살인이다. 오히려 해준에게 있어 생존이라는 이름 하에 일어난 구소산 사건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죽음이라는 이름 하에서 벌어진 임호신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의 어머니를 죽여야만 했던 서래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전히 타자를 이해할 생각이 없는 해준. 타자의 윤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한국. 서래는 이러한 해준을 보며 슬퍼하는 것만 같다. 이 슬픔에는 자신이 피의자의 자리에서 구소산 사건의 윤리적 책임을 짊어진다고 해도 결국 해준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이 포함되어 있다.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타자의 자리. 서래는 결국 그 자리에 영원히 남아있기로 결심한다. 전화를 끊고 해변에 내리는 서래. 카메라는 노을이 지는 해변을 바라보는 그녀를 등뒤에서 찍는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누구든지 <박쥐>의 마지막 일출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태주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뱀파이어 상현. 일렁이는 죽음의 그림자. 서래는 산이 아닌 바다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리고 바다는 지혜로운 자들의 공간이다. 죽음이라는 지혜가 발현될 순간. 서래는 해변 어딘가에 양동이로 구덩이를 판다. 그리고 술을 마신 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오면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해준이 서래의 차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미 자리를 떠난 상황이다. 차에서 서래의 휴대폰을 발견한 해준은 임호신이 말한 음성 파일의 정체를 알게 된다. 자신과 서래의 마지막 대화. 사랑을 숨기고 싶었으나 사랑을 고백한 대화. 그제서야 해준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에 눈을 뜬다. 사랑이라는 욕망. 이제 해준은 경찰의 자리가 아닌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자리에서 그녀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바닷물이 서래가 있는 구덩이까지 밀고 들어왔다. 서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서래는 더 이상 피의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의 미결 사건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다. 호미산에서 서래가 한 말. "난 해준 씨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이 미결 사건은 해준이 이전에 겪었던 사건들과 달리 사진이나 음성 파일과 같은 물질적 형태가 아닌 해준의 뇌 속에, 심장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서래의 마지막 가르침.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욕망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욕망이라는 이름의 죽음. 이것이 서래가 한 사람에게 온전히 환대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결의 사랑. 규정되지 않는 존재로서 사랑받는 것. 자신의 윤리를 실현시킨 팜므파탈은 언제나 그랬듯이 서사에서 사라져야 한다. 해준은 바닷물이 밀려오는 만조의 바다에서 서래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를 찾고 있다. 욕망의 윤리가 실현되고 있는 순간. 이 욕망은 단순히 그녀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존재자의 생을 긍정하는 것이다. 영화의 첫 대사. "살인 사건이 좀 뜸하네." 해준은 아무렇지 않게 살인과 죽음을 얘기했다. 그런 그가 이제 한 사람의 생을 목놓아 외치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해준을 넘어 박찬욱 영화의 윤리적 도약이라고 믿는다. 언제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영화에서 드디어 삶을 찬양하고 욕망하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헤어질 결심>이 보여주는 사랑은 단순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넘어 삶에 대한 사랑이다. 죽음을 넘어 삶으로 향하는 박찬욱. 그러니 서래는 단순히 해준에 대한 팜므파탈이 아닌 박찬욱의 필모그래피 전체에 대한 팜므파탈이다. 자신의 과거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박찬욱. 이 도약이 여기서 일시적으로 그칠지 아니면 더 먼 지점까지 나아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헤어질 결심>이 지금까지 박찬욱이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윤리적 영역을 개척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1) 미스테리아 37호에 수록된 '붉은 드레스의 망령이 입을 연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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