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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pr 11. 2023

어떤 여자들 리뷰

길이 꾸는 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기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광활한 대지를 통과하는 기차를 켈리 라이카트의 카메라는 이 기차가 프레임을 빠져나갈 때까지 멀리서 조용히 바라본다. 이 기차는 오직 이 오프닝에서만 나올 뿐 이후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이런 오프닝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웬디와 루시>의 오프닝도 철로를 지나가는 화물 열차들을 바라보며 시작한다. <믹의 지름길>의 오프닝은 서부를 통과하는 에밀리 일행의 행렬, 즉 (남성적) 서부극의 운동이다. <어둠 속에서>의 첫 번째 쇼트는 물을 배출하는 댐의 운동이다.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 역시 미시시피 강을 통과하는 화물선 한 척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시작한다. 이렇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은 지나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막을 연다. 이때 켈리 라이카트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것은 자본의 흐름, 자본주의의 운동이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이 운동에서 한 걸음 떨어져 이러한 자본의 운동에서 소외된 이들의 운동을 담아낸다. <웬디와 루시>에서 선로 위의 화물 열차들의 운동은 몽타주로 분할되어 나타나지만 다음 쇼트에서 루시와 함께 숲길을 걷는 웬디의 운동은 원 테이크의 트래킹 쇼트 안에서 표현된다. <퍼스트 카우>에서도 화물선을 찍은 오프닝 쇼트 다음에는 개와 함께 산책하는 여성의 운동이 나온다. <어둠 속에서>에서 댐을 찍은 첫 쇼트 직후 나오는 쇼트는 그 댐을 파괴하고자 하는 조쉬와 데나의 모습이다. <올드 조이>에서 두 남자는 정치 뉴스가 흘러나오는 자동차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안식처로 도피한다. <초원의 강>의 엔딩에서 코지는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총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남성의 세계를 빠져나간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로드 무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렇게 소외된 타자들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타자들의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타자들은 존 웨인이 아니다. 그들의 길은 역사와 세계 안에 자리잡지 못한다. 그들이 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만이 남겨진 길 위에서 홀로 방황하는 것이 전부이다. <초원의 강>에서 코지를 태운 차는 남성의 차로 가득 찬 도로를 외로이 주행한다. 그녀는 언젠가 체포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로드 무비도 끝날 것이다. <올드 조이>에서 마크와 커트의 여행도 집으로 돌아오며 끝을 맺는다. <웬디와 루시>에서 웬디는 루시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퍼스트 카우>에서 잠시 휴식을 위해 눈을 붙인 쿠키와 킹 루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타자들의 길에 인물들을 위한 희망 같은 것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운동은 지속될 것이고 역사와 세계 안에 소외된 타자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카메라를 통한 연대에 있을 것이다. <퍼스트 카우>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쿠키와 킹 루, 여자를 이어주는 것은 켈리 라이카트의 카메라이다. <믹의 지름길>의 엔딩에서 떠나가는 원주민의 모습을 카메라는 에밀리의 시점이 되어 바라본다. 이 연대가 가능한 것은 그녀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철저하게 개인의 모습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켈리 라이카트의 인물들은 어떤 범주에서든 타자로서 세계에 존재하지만 켈리 라이카트는 그녀의 인물들을 그러한 범주를 넘어선 하나의 개인으로 바라본다. <초원의 강>에서 코지와 리는 범죄자라는 타자로서 여정을 함께하지만 이후 코지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타자로서 리와 작별한다. <어둠 속에서>에서 조쉬와 데나는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 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차이로 인해 비극을 맞이한다. <믹의 지름길>에서 원주민과 에밀리는 모두 백인 남성의 세계에서 타자이지만 둘 사이에는 명확한 간극이 존재한다. 즉 켈리 라이카트의 인물들은 서로 간의 연대를 통해 주류 사회에 맞서는 인물들이 아니다. 한 개인의 삶은 하나의 범주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언어는 존재를 지시할 수 있으나 존재와 합일이 될 수는 없다는 라캉의 지적을 떠올려보자). 켈리 라이카트는 인물들이 지니는 그러한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한다. 대신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자신의 카메라 안에 담아내면서 이들을 이어준다. 카메라를 통한 연대. 영화라는 이름의 연대. 이 연대에는 오직 존재만이 필요할 뿐 다른 행동이 필요 없다. <어떤 여자들>은 이러한  연대의 방식을 형식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각자의 서사를 지니고 있고 켈리 라이카트는 이 서사를 하나의 단일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부터 이 여성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켈리 라이카트가 무엇을 통해 단절된 서사들을 연결하는지를 따라갈 것이다.


2. 먼저 세 개의 에피소드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여기서는 영화 속의 여러 디테일은 잠시 건너뛰고 대략적인 서사만을 정리할 생각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로라는 자신의 고객 풀러의 지속되는 무리한 요구에 지친 상황이다. 그러던 중 풀러가 인질글을 벌이게 되고 로라는 풀러와의 협상에 투입된다. 로라는 풀러의 요구대로 그의 앞에서 사건 파일을 읽어준다. 그 후 풀러는 건물 밖으로 도주하지만 로라는 경찰에게 그의 도주로를 알려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 지나는 새로 지을 집 앞마당에 쌓여있는 돌더미가 거슬린다. 그래서 돌더미 주인인 알버트에게 가서 판매를 요구한다. 알버트는 원치 않지만 결국 마지못해 돌더미를 팔고 지나는 곧 돌더미를 앞마당에서 치운다. 세 번째 에피소드. 목장을 운영하는 제이미는 우연히 들으러 간 법률 수업에서 만난 베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베스는 결국 물리적 거리의 한계로 인해 수업을 그만둔다. 그러자 제이미는 베스를 직접 만나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법률 사무소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베스와 만나지만 서로 간의 어색한 기류만이 흐를 뿐이다. 두 인물은 그렇게 헤어진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영화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나란히 병렬되어 있을 뿐이다. 영화가 연결되는 유일한 순간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제이미가 로라의 법률 사무소에 잠시 들렀을 때 계단을 올라가는 로라를 제이미가 바라보는 때이다. 그렇다고 켈리 라이카트가 세 에피소드를 정확한 챕터로 분리한 것도 아니다. 켈리 라이카트는 이 인물들을 분리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에피소드 속 여성들을 어떤 식으로든 연결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의 연결을 막고 있는가? 단순한 물리적 거리나 사회적 억압이 아니다. 세 개의 에피소드를 다시 상기해 보자. 세 에피소드의 공통된 서사는 무엇인가? 로라는 풀러와 갈등을 겪는다. 지나는 알버트의 돌더미를 치우면서 알버트와 어색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제이미는 베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지만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즉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타자와 갈등을 겪고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켈리 라이카트는 주인공들을 타자의 자리에 가져다 놓지 않았다. <어떤 여자들>이 다른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과 지니는 차이점은 여기에서 온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타자의 위치에서 주류 사회와 대치되어 왔다. 다시 떠올려보자. <초원의 강>에서의 코지, <올드 조이>의 마크와 커트, <웬디와 루시>에서 웬디, <믹의 지름길>의 에밀리, <퍼스트 카우>의 쿠키와 킹 루. 모두 남성적 세계에서 타자로 존재하며 타자로서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떤 여자들>의 주인공들은 여성이지만 타자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켈리 라이카트가 그들을 타자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들은 자신이 마주하는 인물들을 타자로서 마주한다. 로라에게 다가오는 풀러라는 타자. 지나가 마주하는 알버트라는 타자. 베스와 제이미라는 그들 각자의 타자. 이 차이는 무엇을 생산하는가? 다른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이 타자로서의 로드 무비라면 <어떤 여자들>은 타자를 향한 로드 무비이다. 남성적 세계로부터의 도피나 저항이 아닌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타자들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원심력에서 구심력으로의 전환. 말하자면 다른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하던 역할, 카메라만이 할 수 있었던 역할을 인물들 스스로가 행한다. 달리 말하면 세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되지 못하고 병렬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영화 속 여성들이 자신들의 곁에 있는 타자들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인물들에게 각자의 이웃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과 먼저 연대하기를 요청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의 실천. 카메라를 통한 연대에서 인물을 통한 연대로의 전환. 혹은 스스로 카메라가 되기를 자청하는 인물들. 거기서부터 켈리 라이카트는 다시 시작한다.



3. 영화는 왜 로라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의 오프닝 자체가 그러한 질문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를 찍은 뒤 카메라는 로라가 살고 있는 마을의 풍경을 한 쇼트씩 담아내다가 집 안에 있는 로라를 보여준다. 마치 기차에서 내려 마을을 둘러보다가 로라를 선택한 것만 같은 카메라. 집 안에서 로라와 그의 남편은 이제 막 섹스를 마치고 옷을 입고 있다. 이때 남편은 화면 오른쪽 화장실에 있고 로라는 화면 왼쪽 침실에 있다. 켈리 라이카트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서로 간의 애정이 아닌 관계에 대한 피로와 권태만이 보일 뿐이다. 이 장면이 왜 중요한가? 이다음에 등장하는 지나와 제이미의 에피소드는 이러한 설정 쇼트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로라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지나는 숲에서 조깅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이미의 첫 번째 쇼트는 자신의 목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한 뒤 거기서 서사가 고전적으로 흘러가려고 할 때마다 영화를 중단시키기 위해 또 다른 서사를 침투시키는 것만 같다. 달리 말하면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이들의 서사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남성의 화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여성의 서사.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왜 세 명의 인물들 중 하필 로라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오프닝에서 켈리 라이카트는 로라가 결혼 생활에서 느끼는 권태와 고독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와 라이언은 곧 이별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로라는 남성적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인물이다. 켈리 라이카트 세계와 가장 어울리는 인물. 이건 지나와 제이미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지나는 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가장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제이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목장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켈리 라이카트는 세 명의 여성들 중 로라에서 시작해야만 영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 같다. 어째서? 반복해서 말하겠다. <어떤 여자들>은 타자를 향한 로드 무비이다. 타자에서 다가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그건 곧 자신이 속한 세계를 등지고 나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 명의 여성들 중 그 길에 가장 먼저 들어선 인물이 로라이다. 그녀는 어떤 타자와 마주하는가? 출근한 로라의 사무실에 자신의 고객 풀러가 와있다. 풀러는 자신이 지급받은 피해보상에 만족을 못하고 그녀에게 법적인 투쟁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다. 로라는 이미 법적으로 가능성이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만 풀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문제로 인해 아내와 불화까지 겪고 있다. 풀러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에게는 그 당시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타개해 나갈 법적인 지식과 자신을 지원해 줄 법조인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실제 받은 피해보다 턱없이 모자란 금액을 받고 상황이 종결되었다. 여기서 요점은 풀러의 무지가 아니다. 법은 이미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풀러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법 바깥의 고통. 법과 지식의 계급성. 그런데 그런 풀러가 지금 법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사 로라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타자의 타자. 타자의 메아리. 로라는 그런 풀러를 데리고 상해 전문 변호사를 찾아간다. 물론 그녀의 목적은 상황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로라는 풀러에게 그 변호사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법의 자리에서 풀러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풀러가 요구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로라가 풀러에게 상해 전문 변호사를 소개하자 풀러가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이제 준비해야죠.” 로라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로라는 상황을 종결짓고 싶어 하지만 풀러는 그럴 생각이 없다. 무엇을 준비하려는 것인가? 투쟁할 준비. 싸워나가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준비. 풀러는 로라에게 법정 다툼을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로라에게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법 바깥에서 느끼는 고통. 오로지 타자의 자리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고통. 그럼에도 로라는 또다시 법의 입장을 설명할 뿐이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 변호사와의 만남을 가진 후 로라는 차에서 남편과 통화한다. 이 대화에서 로라의 남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권태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때 풀러가 아내에게 욕을 하면서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로라가 지켜본다. 아내의 차는 무심하게 풀러를 떠난다. 그리고 풀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로라의 차에 탑승한다. 그러면서 로라의 대화는 중지된다. 이때 두 인물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단순히 변호사와 고객이라는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로라는 남편으로부터 사실상 이별을 통보받는다. 풀러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가족을 떠난다(혹은 버림받는다). 그러면서 비로소 가족을 떠난다는 같은 고통을 지닌 인간으로서 서로를 마주한다. 고통의 교집합. 타자를 이해하는 첫걸음. 하지만 켈리 라이카트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차를 타고 가던 중 풀러가 아내를 저주하며 말한다. “아내가 고속도로에서 굴렀으면 좋겠어요. 남은 일은 총을 사서 모두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로라는 그에게 도로 한복판에서 내리라고 한다. 단순하게 그가 상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로라가 한 말. “저는 변호사예요.” 로라는 다시 한번 풀러와 그녀의 관계를 변호사와 고객으로 끝내고 싶어 한다. 그녀가 생각할 때 변호사는 사건을 변호하는 것일 뿐 타인이 몸부림치고 상스러운 말을 뱉어나가며 표현하는 고통을 들어주는 직업이 아니다. 잠시 가까워지는 것 같았던 둘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좁아지지 않는다. 그러자 풀러가 최후의 수단을 쓴다. 어느 어두운 밤, 풀러는 총을 들고 빌딩에서 인질극을 벌인다. 풀러는 자신의 변호사 로라를 데려오라고 요구하고 경찰은 그녀를 협상에 투입한다. 건물 안은 인질극이 벌어지는 곳 치고는 너무 평화롭다. 심지어 인질로 잡혀있는 경비원조차 평온해 보인다. 그리고 풀러는 로라에게 자신의 사건파일을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이 이상한 요구.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돈을 요구하지도, 사건의 재해결을 바라지도 않는다. 풀러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는 사건파일에서 자신이 한 말은 빼고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대신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했던 말을 읽어달라고 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사건파일을 다시 읽는다고 해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거나 사건의 표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대신 풀러는 로라에게 사건 자체를 다시 직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건 안에 내재된 자신의 고통을 다시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라가 사건파일을 읽는 순간이 풀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첫 번째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건 이후 남겨진 존재자. 우리가 로라를 경유하여 풀러를 만난 첫 번째 방식. 켈리 라이카트는 이 패러다임을 뒤바꿔 버린다. 사건 이후가 아닌 사건 안의 존재자. 그 안에서 존재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 이 호소를 위해 풀러는 로라를 위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고통의 퍼포먼스. 로라가 파일을 모두 읽은 뒤 풀러가 다시 한번 물어본다. “말해줘요, 이제 어쩌죠?” 로라의 대답. “자주 해요.” 하지만 그건 풀러가 원한 대답이 아니다. 그는 이전과 같이 사건에 대해서 질문한다. 로라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대답한다. 그것이 변호사 로라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고 그것이 풀러와 로라 사이의 절대적 간극이다. 로라가 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변호사라는 그녀의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풀러를 구원해 줄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결국 풀러는 인질을 풀어주고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간극 앞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절대적 간극. 그러면서 그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무효화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하지만 로라는 경찰에게 그가 도주한 곳을 알려준다. 곧 그는 체포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이 인간 로라가 인간 풀러를 위해 내린 첫 번째 선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풀러는 지속적으로 사건을 무효화하거나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때마다 변호사 로라는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인간으로서 풀러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 모든 고통을 긍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 물리치료를 받고 아내에게 잘해주는 것. 구원 대신 삶을 선물하는 것.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이 난다.


4. 지나가 갑자기 등장한다. 나는 영화를 보며 받았던 인상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조깅을 하며 등장하는 지나의 모습을 영화는 그저 첫 번째 에피소드 끝에 병렬시킨 것 마냥 이어 붙였다. 지나는 새 집을 짓기 전 가족들과 함께 야영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녀는 새로 지을 집 앞에 있는 사암 돌더미를 치우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사암의 주인인 알버트에게서 돌더미를 사고 앞마당에서 치워버린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난다. 이 에피소드는 세 개의 에피소드 중 서사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무엇이 서사를 단순화하고, 더 나아가 중단시키는가? 다르게 말하면 이 에피소드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당연히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인 지나를 중심으로 서사를 파악하고 따라간다. 하지만 지나는 이상하게 에피소드 안에서 힘을 못쓰는 느낌이 든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로라는 분명 서사 안에서 확실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힘으로 서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지나가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서사가 끝나 버린다. 켈리 라이카트는 이 서사를 자신이 직접 중단시킨다기보다는 정말로 더 이상 진행할 서사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끝내는 것만 같다. 나는 여기서 지나를 연기한 배우가 미셸 윌리엄스라는 사실에 주목해보고 싶다. 미셸 윌리엄스를 켈리 라이카트의 페르소나라고 말하는 것에는 약간 망설임이 따르지만 적어도 켈리 라이카트의 전작인 <웬디와 루시>와 <믹의 지름길>에서 미셸 윌리엄스가 주인공으로서 켈리 라이카트 세계에 잘 동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웬디와 루시>에서 자신의 애완견 루시를 찾아다니기 위해 방황하던 웬디. <믹의 지름길>에서 서부극의 운동을 거부하던 에밀리. 전형적인 켈리 라이카트적인 인물. 세계 앞의 타자. 이 작품들에서 켈리 라이카트는 미셸 윌리엄스가 영화 속에서 만들어내는 운동을 계속해서 따라간다. 타자의 운동. 타자의 로드 무비. 그런데 <어떤 여자들>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지나의 운동은 그러한 타자의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나의 운동은 그간 미셸 윌리엄스가 저항해 온 남성적 세계의 운동과 유사하다. 자신이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타자의 세계를 침입하는 운동. 누가 보더라도 서부극의 운동. 인디언의 세계를 침입하는 백인의 운동. 그 운동을 몸소 재현하는 지나. 이 괴리는 왜 발생하는가? 다르게 말하자면 켈리 라이카트는 왜 미셸 윌리엄스를 그녀의 대척점에 가져다 놓았는가? 미셸 윌리엄스가 그동안 보여왔던 운동은 타자의 운동이다. 그러나 다시 반복. 켈리 라이카트의 타자는 철저히 개인의 범주 아래 머물러 있다. 이들의 연대는 언제나 개인과 개인의 연대일 뿐 어느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범주 아래의 연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범주 하에서 시작한 연대는 이후 무너지네 된다(<초원의 강>과 <어둠 속에서>를 다시 떠올려보자). 모든 개인은 그 자체로 다른 개인에 대한 타자이다. 언어의 범주를 넘어서는 개인의 총체성.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셸 윌리엄스가 그동안 켈리 라이카트 영화에서 만들어낸 운동은 타자의 운동이다. 하지만 <어떤 여자들>은 타자의 로드 무비가 아닌 타자를 향한 로드 무비이다. 타자라는 주체와 타자의 타자. 이 괴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로드 무비에서는 주인공의 여정에 어떠한 형태로든 새로운 인물이 개입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여정에 타자가 침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삶에 주인공이 침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켈리 라이카트는 이러한 로드 무비의 운동에 대한 반성을 담아내고자 한다. 어떤 반성? 타자의 운동이 균열 내는 또 다른 타자의 삶. 마치 그것이 자신이 비판하는 서부극의 운동과 다를 것이 없다는 듯한 성찰.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에서 켈리 라이카트는 미셸 윌리엄스의 지나가 만들어 내는 운동을 그러한 성찰의 시점에서 바라본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지나가 남편 라이언과 함께 알버트의 돌더미를 사기 위해 알버트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따라가 보자. 알버트가 지나와 라이언을 집으로 맞이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던 중 지나가 본론으로 들어가 알버트에게 사암을 팔 생각이 있는지 물어본다. 처음 알버트는 그 주제를 거부하듯이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결국 사암을 지나에게 넘기기로 한다. 여기서 알버트의 표현을 유의해야 한다. 지나는 알버트에게 사암을 팔아달라고(sell) 요청했다. 그런데 알버트는 그냥 주겠다고(give) 말한다. 이후에도 지나가 알버트에게 돈을 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알버트의 인심이 아니다. 알버트는 왜 사암을 팔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사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형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있어 사암은 단순한 돌더미가 아닌 자신의 추억과 삶이 담긴 기호로서 작용한다. 기억의 표상. 추억의 기표. 왜 여기에 집착하는가? 그의 육체가 늙어가고 있다. 죽음이 서서히 그의 삶에 드리워지고 있다. 그렇기에 사암은 알버트의 상실한 젊음과 추억을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런데 그런 사암을 지나가 없애고자 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암을 판매하기를 요청한다. 이때 사암은 하나의 상품이 되고 이것이 가지는 가치는 자본의 거래를 통해 결정된다.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 구매와 판매. 자본의 운동. 켈리 라이카트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그 운동을 지나는 몸소 실현하고 있다. 그러니 알버트가 지나에게 사암을 판매하지 않고 그냥 주겠다고 한 것은 사암의 가치가 돈의 논리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무가치해 보이는 돌더미에 담긴 추억과 삶. 그것을 돈의 논리로 평가하지 말라는 호소. 이 거래를 중지시킴으로써 알버트는 사암에 깃든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 거래에서 주인은 지나가 아닌 알버트이다. 자본의 운동을 거부하는 움직임. 하지만 지나는 알버트의 호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알버트와의 만남 후 돌아가는 차에서 하는 말. “그럴 가치를 거의 못 느꼈어. 자신이 사용 안 한다는 거 아실 줄 알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그 안에 담긴 알버트의 추억과 삶을 보지 못한다. 그녀에게 사용하지 않는 사암은 어떤 추억이 담겨 있던 그저 돌더미일 뿐이다. 자본의 논리. 모든 존재의 상품화. 곧이어 지나가 말한다. ”그걸 잘 쓸 곳을 생각해 내야 해. 그러면 갖는 게 그렇게 안쓰럽진 않을 거야.“ 지나에게 있어 이 거래는 알버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상품의 가치가 없는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 전형적인 자본주의식 운동. 그것이 자본주의의 유일한, 혹은 위선적인 배려이다. 얼마 뒤 지나는 트럭을 가지고 사암을 치운다. 알버트는 그 모습을 집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 지나는 그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알버트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끝난다. 이 이상한 결말. 왜 이렇게 끝나야 하는가? 만약 지나를 따라갔다면 얼마든지 서사를 더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가 퇴장하자 영화는 더 진행할 서사가 없다는 것처럼 에피소드를 끝낸다. 그렇기에 나는 이 서사의 주인을 지나가 아닌 알버트라고 말하고 싶다. 그럴 때 이 서사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자의 로드 무비가 아닌 세계 앞에서 쓸쓸히 사라지는 타자의 서사가 된다. 서부극의 대척점. 서부극에 저항하는 서사. 아이러니하게도 이 서사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알버트가 저항을 포기하고 퇴장했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인가? 만약 알버트가 지나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서부극의 플롯이 됐을 것이다. 침략하는 백인과 저항하는 인디언. 하지만 알버트는 자신의 자리를 조용히 내준다. 그러자 서부극의 서사가 작동하지 못하고 끝나버린다. 저항하지 않는 저항. 서사를 중단시키는 저항. 그의 유일한 저항은 무가치해 보이는 사암에 자신의 표상을 남기면서 세계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 몸을 던져 저항하는 대신 세계의 부조리를 몸소 드러내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세계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버트의 자리는 사라져야 한다. 켈리 라이카트는 지나의 서사가 아닌 알버트의 서사를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알버트의 서사가 끝나자 켈리 라이카트도 에피소드를 끝낸다.



5. 제이미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난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알버트에 의해 중단되자 켈리 라이카트는 즉각 다른 인물에게로 눈을 돌린다. 제이미는 앞의 두 인물들과 달리 목장에서 홀로 지내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학교법 수업을 듣기 위해 야간 학교에 방문한다. 하지만 그녀는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른 이들이 모두 수업을 하며 열심히 필기를 하고 질문도 던지지만 제이미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수업에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분 상승과 같은 목표를 위해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대신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를 향한 발걸음. 하지만 이 수업에서도 제이미는 고독하다. 앞자리에 함께 앉은 노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만 뒷자리에 앉은 제이미는 인지조차 못한다. 그런 수업에 또 다른 타자가 들어온다. 수업의 강사를 맡은 베스. 그런데 베스는 강사치고는 무언가 허술하고 어색해 보인다. 그녀는 수업을 위해 가져온 자료를 읽을 뿐 학생들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자리에 남아있는 제이미에게 베스가 말을 건다. 그런 베스를 위해 제이미는 자신이 아는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 우리는 제이미가 이 수업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니 제이미와 베스 사이에 학생과 강사라는 도식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타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고독함이 두 인물을 이어준다. 타자들의 연대. 식당에서 베스는 자신이 왜 리빙스턴에서 벨프리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얘기한다. 베스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던 중 벨프리의 위치를 가까운 벨그레이드로 착각하여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벨프리에서의 수업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강사임에도 학교법을 잘 모른다. 그녀는 오로지 일자리만을 바라보고 온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를 벨프리로 이끈 것은 그녀가 처한 계급적 상황이다. 계급의 연대. 그런 베스에게 제이미가 자신이 일하는 목장에 놀러 올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하나의 거래이다. 어떤 거래? 베스는 제이미에게 강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제 제이미의 얼굴을 보여주면 서로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 개인과 개인의 만남. 제이미는 이 거래를 통해 자신의 고독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베스는 이 거래를 거부한다. 그녀는 아침에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제이미는 베스의 얼굴을 봤지만 베스는 제이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볼 생각이 없다. 베스는 제이미와 달리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머나먼 벨프리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벨프리는 그저 하나의 일자리에 불과하다. 만남의 부등가 교환. 첫째 날은 그렇게 지나간다. 둘째 날, 영화는 첫째 날과 똑같은 리듬으로 시퀀스를 구성한다. 제이미가 일하는 목장. 야간 학교에서의 수업. 그리고 제이미와 베스의 식사. 이 일정한 리듬을 통해 켈리 라이카트는 베스가 제이미의 삶에 만들어낸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표현한다. 타자가 만들어낸 리듬. 고독한 일상의 균열. 하지만 곧 이 리듬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두 번째 수업 후 식사에서 베스는 자신을 대체할 강사에 대해서 물어본다. 물리적 간극에 한계를 느끼는 베스. 하지만 제이미는 그럴만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설령 알았다고 할지라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녀의 고독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존재는 베스가 유일하다. 그렇게 셋째 날이 밝았다. 제이미는 여느 때처럼 목장에서 일하고 학교로 향한다. 다만 이번에는 트럭이 아닌 말을 타고 갔다. 베스는 이 날 수업에 지각을 했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영화는 이전과 달리 베스가 수업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건 제이미가 베스를 바라보는 시점과 동일하다. 제이미는 수업하는 베스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대신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있다. 어떻게? 베스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식당으로 향하는 제이미. 베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삶과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제이미. 베스를 잠시 망설이지만 곧 말에 올라탄다. 누군가는 이 말이 지금까지 영화에서 등장했던 자동차와 대치된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세 에피소드에서 모두 인물들은 누군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여기서의 자동차는 오프닝 쇼트에서 등장했던 기차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운동. 그 운동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이때 자동차 안의 인물들이 수평으로 앉았던 것과 달리 말 위의 베스와 제이미는 앞 뒤로 앉아 있다. 세계의 운동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의 운동. 그래서인지 뒷자리에 앉은 베스가 앞자리에 앉은 제이미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아름답다. 식당 직원들조차 이 말을 배척하기는커녕 물을 주며 환대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베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차에 타야 한다. 베스는 그렇게 또다시 떠난다. 그리고 넷째 날. 제이미는 여느 때처럼 목장에서 일한 후 학교로 간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베스가 없다. 물리적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우정. 제이미는 곧장 자신의 트럭을 타고 베스가 사는 리빙스턴으로 향한다. 베스가 떠나왔던 길. 그 운동을 몸소 재현하는 제이미. 날이 밝은 뒤 제이미는 베스가 일하는 곳을 수소문하며 다닌다. 그리고 나타나는 이상한 장면.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베스를 수소문하던 제이미 뒤로 첫 에피소드의 로라가 등장한다. 그녀는 제이미와 인사하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지만 카메라는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제이미의 시점 쇼트로 보여준다. 아마도 대부분은 여기서 리빙스턴이 로라가 사는 지역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가 다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우리는 왜 로라가 이 장면에 나와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로라의 등장은 영화적 잉여에 불과하다. 하지만 켈리 라이카트는 그러한 관성적 논리를 거부하는 감독이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이 장면에서 로라가 나오게 한 것은 논리가 아닌 운동이다. 어떤 운동? 제이미의 운동. 타자를 향한 타자의 운동. 켈리 라이카트가 세 에피소드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운동. 그 운동을 처음으로 실현하고 있는 인물이 제이미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병렬시키면서 세 인물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 연결을 위해서는 제이미가 실현하고 있는 운동이 있어야 한다. 연결의 순간. 인물의 연결과 서사의 연결. 아직 로라는 이 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걸 인지하고 있는 것은 관객인 우리와 켈리 라이카트의 카메라뿐이다. 카메라를 통한 연대.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연대. 그곳에서 제이미는 베스의 근무지를 알아내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곧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 만남은 낭만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두 인물 사이에는 어떠한 우정의 기류도 흐르지 않는다. 둘은 정말 짧은 대화만을 나눈 뒤 인사조차 하지 않고 헤어진다. 베스와 제이미는 물리적 간극을 극복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들을 갈라놓고 있는가? 제이미는 베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갔지만 베스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벨프리에 갔을 뿐이다. 잠시 제이미가 베스를 자신의 말에 태워주었지만 그게 전부이다. 제이미는 베스를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로 초대했지만 베스는 끝내 거절했다. 이것은 베스가 처한 계급적 상황이 만들어낸 간극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다른 방식을 지닌 존재 사이의 필연적 간극이다. 타자와의 절대적 간극. 개인은 언제나 타자이며 그 간극은 극복 불가능하다. 제이미는 그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제이미의 운동을 무의미한 실패로 치부하고 싶지 않다. 그 여정을 통해서 제이미는 타자와의 간극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이미가 고독했던 것은 자신이 타자에게 먼저 다가갔기 때문이 아닌 베스와 같이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베스에게서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함으로써 진정으로 타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 베스와의 만남 후 제이미는 다시 벨프리로 돌아간다. 그녀가 운전하고 있는 트럭에는 그녀 홀로 있다. 그녀는 여전히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하기에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트럭은 자본주의의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의 것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장면. 긴 운전에 지친 제이미는 졸음운전을 하게 되고 차는 도로를 벗어나 길 옆 평원으로 새어간다. 이윽고 울타리를 뚫고 나서야 멈추는 차. 건조하게 찍힌 이 장면은 앞서 베스와 제이미가 말을 탔던 장면 못지않게 신비롭고 아름답다. 일상의 탈선. 세계에 균열을 내는 운동. 오프닝 쇼트에 나왔던 기차는 큰 사고가 있지 않는 한 탈선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 두 에피소드에서 인물들도 아무런 문제 없이 차를 운전한다. 그러나 제이미가 만들어낸 운동, 탈선은 잠시 일상과 세계에 신비로운 균열을 일으킨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켈리 라이카트가 담아내고자 하는 영화적 감각일 것이다.


6. 이제 마지막 에필로그에 대해서 얘기할 때이다. 에필로그에서는 앞서 등장했던 세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다시 차례로 등장한다. 로라는 교도소에 있는 풀러를 면회한다. 분명 재소자와 면회자의 신분임에도 둘 사이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밝다. 이전에 식사 제안이 거절당했던 것과는 달리 로라와 풀러는 함께 셰이크를 마신다. 풀러에 의하면 아내는 결국 풀러를 떠나 새로운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남자도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이건 아이러니라기보다는 풀러에게 주어진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인다. 어떤 가능성? 풀러의 아내는 그 남자가 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에도 그를 받아들였다. 그건 풀러 역시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있는 신분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타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로라가 실현하고 있다.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것. 이전에는 풀러를 오로지 고객으로만 대하고자 했던 변호사 로라는 이제 풀러가 재소자라는 신분에 있음에도 그를 환대하였다. 그 거대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것. 그건 타자와의 간극을 극복하고 메우는 것이 아닌 그 간극 자체를 긍정하고 온전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면. 지나는 자신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야영장에 친구들을 초대했다. 이전과 달리 숙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지나는 그런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해 준다. 그리고 잠시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옆에는 알버트로부터 받았던 사암 돌더미가 놓여있다. 그녀는 사암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전처럼 돌더미로 쌓아놨다. 그건 사암에 담긴 알버트의 흔적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비로소 타자를 받아들이는 지나. 철저하게 서부극의 서사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충실하던 그녀의 변화. 거래는 무효화되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알버트의 흔적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지나는  알버트의 서사를 물려받고 또 다른 주인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제이미는 언제나처럼 목장에서 일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떠한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 인물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원래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혹시 로라나 지나와는 다른 계급적 맥락에 처한 그녀의 상황이 그녀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에필로그가 등장하기 전 쇼트는 제이미의 트럭이 도로를 벗어나는 쇼트이다. 이때 제이미는 졸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가정해보고 싶다. 앞서 에필로그에 등장한 로라와 지나의 장면들은 혹시 꿈이 아닐까? 누가 꾸는 꿈인가? 제이미가 꾸는 꿈. 켈리 라이카트와 영화가 꾸는 꿈. 그리고 그들이 빚어낸 길이 꾸는 꿈. 어떤 길? 타자를 향한 길. 제이미가 걸어갔고 만들어낸 길. 영화는 의도적으로 로라와 지나가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필로그의 두 인물들의 변화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영화가 바라는 소망처럼 보인다. 제이미가 바라고 켈리 라이카트가 바라는 변화. 그런 의미에서 제이미는 그러한 꿈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운동의 주인이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지금 그녀의 일상이 고독해 보일지라도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등장했던 제이미와 로라의 연결은 영화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다. 카메라가 없더라도 서로 연결되고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켈리 라이카트는 비로소 카메라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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