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Jun 29. 2023

위대한 독재자 리뷰

목소리의 존재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왜 하필 <위대한 독재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 찰리 채플린의 필모그래피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위대한 이름. 위대한 거장. 그의 영화 중 한 편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한 작품에 대한 비평을 넘어서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찰리 채플린이라는 영화인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기도 하다. 무슨 의미인가? 찰리 채플린은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아는 방랑자 캐릭터의 채플린으로 말이다. 이 캐릭터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쉽게 캐릭터에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관된 캐릭터라이징의 방법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채플린의 방랑자는 곧 채플린이 관객에게 다가서는 방식이자 동시에 비극을 체화하는 방법이다. 즉 관객과 채플린은 비극을 통해 서로의 교집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비극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신 코미디로 승화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채플린의 코미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채플린의 방랑자는 언제나 상황에 압도된다. 인물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행위의 결과는 언제나 의지와 불일치하고 그것은 곧 인물과 세계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 이 간극 사이에서 세계는 언제나 인물을 압도한다. 그리고 세계 앞에서 인물이 압도될 때 인물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표상이 된다. <서커스>에서 채플린은 자기도 모르게 스타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닌 그를 스타가 되게끔 만드는 상황 그 자체이다. <모던 타임즈>의 유명한 장면.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찰리 채플린. 누구나 이 장면을 보며 이것이 산업화 속 노동자에 대한 메타포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다. 그 순간 채플린의 육체는 상황에 대한 기호가 되고 그 안에서 인물의 의지는 부재하게 된다. 채플린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세계 앞에서 압도당하는 인물.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인물을 압도하는 세계를 창조한 자가 바로 인물 그 자신, 찰리 채플린이라는 것이다. 두 명의 채플린. 감독 채플린과 배우 채플린. 물론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인물은 많이 있다(동시대의 또 다른 위대한 영화 예술가인 버스터 키튼, 혹은 현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하지만 찰리 채플린에게 있어 이러한 분리는 단순히 역할의 분리가 아닌 찰리 채플린 자신을 타자화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의 타자화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채플린의 방랑자 캐릭터는 오로지 영화 안에서 타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방랑자는 단 한 순간도 세계의 중심에 제대로 머물지 못한다(여기서 중심은 내러티브가 아닌 세계의 문제이다). 그가 중심에 들어가는 순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그가 머무는 주변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 방랑자는 곧 이 중심에서 추방당한다(그런 의미에서 자크 타티의 영화는 채플린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영화일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는 이렇듯 주변이 중심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관찰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풍경이라는 것을 채플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곧 관음증의 문제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예술가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그의 방랑자가 당하는 상황은 영화를 보는 관객인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다. 채플린의 영화를 보다 보면 채플린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는 행동의 결과가 코미디로 이어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코미디를 생산하는 것은 인물의 무의지이다. 인물은 웃길 생각이 없는데 관객은 이 상황을 보면 웃게 된다. 우리는 이 방랑자 캐릭터를 보면서 그가 어떤 행동을 통해 우리를 웃길지가 아닌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코미디가 발생할지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채플린은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풍경을 창조해내는 예술가이다. 상황을 이끌어내는 코미디. 이 코미디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자 부르주아에 대한 그의 저항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웃는 대부분의 코미디 장면은 채플린을 괴롭히는 부르주아나 공권력에 대해서 통쾌하게 복수하는 장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코미디는 그가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채플린의 방랑자는 영화 안에서 철저한 타자이고 그래야만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이 방랑자 캐릭터를 통해 관객에게 한 걸음 다가서고 교집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만 활동하는 기호이자 관객에 대한 타자이기에 우리는 그의 비극을 보고도 연민 대신 코미디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관객과 채플린은 세계 앞에서는 함께 서있지만 영화 앞에서 채플린은 관객의 타자이다. 감독 채플린은 이 거리를 정확히 알고 코미디를 창조한다. 스스로 비극으로 뛰어드는 예술가. 가까이서 비극을 바라보고 멀리서 희극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이때 이 방법론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무성영화 시대에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왜 중요한가? 인물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없을 때 관객이 영화 속 인물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물의 육체와 그 육체에서 나오는 행위가 유일하다. 목소리는 단순히 인물의 특징을 넘어서 그 인물을 특정하는 존재론의 문제이다. 인물이 특정되지 않을 때 인물은 영화 속에서 표상으로만 남게 된다. 영화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은 영화에서 음향이 추가되는 순간 영화의 이차원적인 추상적 이미지가 삼차원적인 모사적 이미지로 변화되어 영화 예술이 지닌 추상적 예술성을 상실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즉 영화에서 소리의 등장은 영화를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환영적 예술에서 현실에 대한 자기복제로 퇴보시킨다고 그는 생각했다(「영화이론」, 토마스 엘새서, 말테 하게너,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면 왜 채플린이 유성영화를 초기에 거부하고자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루돌프 아른하임의 관점에서)방랑자에게 목소리가 부여될 때 그는 영화의 표면에서 활동하는 추상적 이미지의 지위를 상실하고 현실에서의 인물을 복제한 평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전락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채플린 영화 속 목소리의 존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채플린이 사운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 알려진 거부감은 단순히 무성 천국에 대한 향수 어린 헌신으로 기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목소리의 파열적인 힘, 목소리가 이물(異物)로서 하나의 근본적인 분열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기생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가 일반적인 인식보다 훨씬 더 깊이 알고 있음(또는 적어도 예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말의 도래는 인간이라는 동물에게서 균형을 떨쳐내 버리고, 그를 잃어버린 균형을 회복하려고 몸놀리고 고투하는 우스꽝스럽고 무능한 형상으로 만든다”(「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슬라보예 지젝, 주은우 옮김, 한나래). 육체에 대한 기생물로서의 목소리. 찰리 채플린은 그 목소리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대는 채플린의 편이 아니었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어갔다. 이제 그는 새로운 시대 앞에서 새로운 방법론 안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새로 써나가야 했다. 


2.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등장한 것은 <모던 타임즈>이다(<시티 라이트>에서도 시작 장면에 목소리가 잠시 등장하지만 그건 유성영화에 대한 조롱의 의미에서 쓰인 것이니 배제하도록 하자). 하지만 <모던 타임즈>는 부분적으로만 유성일 뿐 대부분의 장면은 무성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 목소리는 부르주아들의 것이다. 찰리가 초반에 일하던 공장의 사장은 영화 속 다른 노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 목소리로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그리고 찰리가 잠시 감옥에 갔을 때 교도소장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역시 음성을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하층민들을 규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음성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권력에 대하여 방랑자 찰리는 자신의 육체와 몸짓으로 저항한다. 그런데 그런 찰리가 극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소녀와 함께 취직한 식당에서 찰리는 군중들 속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런데 가사를 적어둔 소매가 날라가 버리는 바람에 찰리는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자 찰리는 음악에 맞춰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노래를 이어나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때 채플린이 노래하는 가사는 아무런 뜻도 없는 엉터리 가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채플린이 영화에서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시티 라이트>에서 처음 목소리가 나왔을 때와 같이 유성영화에 대한 조소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말의 내용이 아닌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부르주아에게만 주어지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방랑자. 이때 그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군중 속에서 노래할 때, 즉 스타가 되는 순간이다. 군중이 원하는 것. 스타의 목소리. 그들은 더 이상 스크린의 표면 위에서 기호로서만 존재하는 스타의 몸짓을 원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가진 스타. 스타에게 목소리가 부여되는 순간 그는 하나의 추상적인 표상을 넘어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관객들은 영화에서 스타의 몸짓이 아닌 스타 그 자체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채플린이 처음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스타라는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유성영화에 대한 자신의 패배선언이다. 이제 채플린의 방랑자는 스크린에서 약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호가 아닌 자신이 저항하고 조소하던 부르주아 계급의 위치로 옮겨간다. 그렇기에 <모던 타임즈>이후 더 이상 방랑자 캐릭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위대한 독재자>에서 찰리 채플린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모두가 알다시피 이 영화에서 찰리 채플린은 1인 2역을 소화했다. 유대인 이발사 찰리와 토매니아 독재자 힌켈.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가장 단순한 대답. 이전 영화에서와 같은 코미디의 메커니즘을 살리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몰락하는 독재자와 그 자리에 올라가는 이발사. 상황에 압도되는 인물. 아이러니의 코미디. 나는 이 대답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영화 속 찰리와 힌켈의 관점이 아닌 이들을 연기하는 찰리 채플린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그가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역할을 맡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 가장 단순하지만 확실한 대답. 영화 속에서 힌켈과 찰리는 만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프레임 내에서 공존할 수 없다. 이 연출은 마치 찰리 채플린이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분리시킨 것만 효과를 낸다. 찰리라는 자아. 힌켈이라는 자아. 혹은 그 인물들을 경유해 영화 속에서 존재하는 채플린. 왜 그래야 하는가? 찰리와 힌켈의 차이. 찰리는 영화에서 채플린이 무성영화에서 연기해 온 방랑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반면에 힌켈은 영화 속에서 스타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한 나라의 독재자만큼 완벽한 스타가 어디 있는가? 절대권력의 소유자. 이 인물 이외에는 어떠한 스타도 허용되지 않는 곳. 찰리 채플린이 원하지 않는, 그러나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리. 방랑자와 스타의 공존. 혹은 간극. 이 둘은 영화 안에서 각자 존재할 수는 있으나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할 수는 없다. 그건 채플린의 육체가 가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그가 영화인으로서 가지는 정체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둘 중 한 인물은 영화 내에서 반드시 밀려나게 되어있다. 그리고 채플린의 영화에서 언제나 밀어내는 쪽은 세계이고 밀려나는 쪽은 방랑자이다. 유성영화에 밀려나는 무성영화처럼. <위대한 독재자>는 마치 그렇게 밀려나는 방랑자를 영화 안에서 붙잡아 놓기 위한 투쟁의 연속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부터 그 투쟁의 과정을 쫓아가고자 한다. 



3. 힌켈은 목소리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처음 힌켈이 등장할 때 나오는 의미심장한 내레이션. “쌍십자의 표상 하에 자유는 배척되었고 연설의 자유는 억압되어 오직 힌켈의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독점한 자. 이윽고 힌켈의 연설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은 연설하는 힌켈이 아닌 그의 목소리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연설은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연설이 가능한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힌켈이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존재하는 자. 우리는 <모던 타임즈>에서 부르주아들만이 목소리를 독점한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목소리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지닌 힌켈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다. 여기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힌켈 자신이 아닌 절대권력 그 자체이다. 절대권력이 힌켈의 육체와 음성을 통해 표현되는 것. 이때 힌켈은 목소리의 주인이 아닌 노예이며 절대권력이 자신을 육화하기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주체와 객체의 전도. 그렇기에 힌켈은 목소리가 없으면 토매니아 국민들 앞에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스타로, 권력자로 만들어주는 목소리. 그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는 힌켈과 찰리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방식. 몸짓으로 존재하는 자. 세계에 저항하는 운동의 몸짓. 병원에서 퇴원한 후 자신의 이발소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박해하는 돌격대원과 싸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무성영화에서의 슬랩스틱이다. 그때와 차이는 무엇인가? 지금 찰리가 있는 곳은 유성영화이다. 추상화 될 수 없는 스크린. 현실의 모사품으로서의 영화. 이제 그가 저항해야 하는 세계는 추상화된 세계가 아닌 유물론적 토대를 지닌 모사적 세계이다. 돌격대원들과 싸우는 장면에서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돌격대원 두 명을 한나와 함께 물리친 후 찰리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훨씬 더 많은 수의 돌격대원들과 마주한다. 그게 왜 이상한가? 그 이전 채플린의 영화에서는 방랑자가 부르주아들에게 저항해도 부르주아들은 그에게 굳이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방랑자가 추방당하는 것이 전부였다. 무성영화에서 방랑자는 자신만의 운동으로 세계에 저항한 뒤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그리고 방랑자는 굳이 그 세계 안에서 머물고자 하지 않았다. 그건 방랑자가 가는 곳에 운동이 있고 운동이 있는 곳이 곧 세계였기 때문이다. 운동을 따라가는 영화. 하지만 그 방법론이 유성영화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곳은 토매니아 국가의 게토 지역이다. 유물론적 세계와 공간. 무성영화에서 방랑자가 특정 대상이 아닌 세계 자체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면 이제는 토매니아의 힌켈과 돌격대원들이라는 확실한 대상들과 싸워야 한다. 이곳에서 쫓겨나면 그는 갈 곳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 바깥에서는 어떠한 운동도 만들어낼 수 없고 그렇게 되는 순간 이 인물은 영화 안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채플린은 찰리가 홀로 싸우도록 두지 않는다. 찰리를 돕는 인물들. 한나와 슐츠. <모던 타임즈>를 본 사람이라면 한나를 연기한 폴레트 고다드가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가 도와주는 소녀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도움을 받던 대상에서 도움의 주체로. 무성영화에서 채플린의 방랑자는 자신이 연민을 가진 인물이 세계 안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자처했다면(그리고 자신이 할 일이 끝나면 세계 밖으로 추방당했다) 유성영화에서는 역으로 자신이 세계 안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게다가 한나와 함께 그를 도와주는 슐츠는 국가권력의 일부에서 스스로 내려와 찰리를 돕는 인물이다. 무성영화에서는 불가능한 풍경.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슐츠라는 인물을 영화 내에서 추상적 범주의 일부가 아닌 명백한 주체로 만들어주는 목소리의 힘이다. 그건 한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찰리 채플린은 목소리를 거부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그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더 이상 이 세계에서는 육체만으로는 견딜 수 없다는 깨달음. 밀려나지 않기 위한 연대. 한나와 찰리 모두 힌켈의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피신할 생각은 (아직은)하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인으로서의 의무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 그곳에 내가 있어야 영화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 영화의 어느 지점, 힌켈이 유대인 엡스타인과 대출 협상을 하기 위해 잠시 유대인에 대한 탄압 정책을 멈추라고 지시하자 그동안 찰리와 한나를 탄압하던 돌격대원들이 친절하게 그들을 대한다. 그 모습을 본 한나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한다. “저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를 괴롭히지 않고 예전처럼만 살게 해준다면. 다른 나라로 가지 않고 여기 머무를 수만 있다면. 난 떠나고 싶지 않아. 고생을 하고 박해를 받아도 여기가 좋은 걸. 떠나지 않아도 될지 몰라. 여기서 다시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장면은 마치 한나가 관객에게 연설을 하듯이 찍혔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나의 시선은 영화 안에서 브레히트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 안에서 추상화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어떻게? 힌켈이 연설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찍는 것은 힌켈의 목소리이다. 마찬가지로 한나의 독백에서 카메라가 찍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이고 동시에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녀의 소망이다. 욕망을 담아내는 카메라. 유물론적 세계 안에서 나타나는 유심론적 순간.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장면을 한번 더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엡스타인이 대출을 거부하자 힌켈이 다시 정책을 바꿔 유대인 탄압을 재개한다. 찰리 채플린은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목소리를 찍으며 나타냈다. 평화로워진 게토에서 한나와 데이트를 하러 나온 찰리가 힌켈의 배지를 사려고 하는 순간 힌켈의 연설이 방송을 통해 나온다. 국가의 목소리. 절대권력의 목소리. 목소리를 독점한 자. 영화는 연설하는 힌켈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질 들뢰즈의 지적. “감정 이미지는 클로즈업이며, 클로즈업은 얼굴이다.” 이미지로서의 얼굴. 화면의 추상화. 그 추상적인 얼굴을 영화 속에서 현존하게 만드는 목소리의 힘. 찰리 채플린은 연설하는 힌켈의 얼굴을 찰리와 디졸브 시켰다. 이 때문에 이 장면은 마치 힌켈의 목소리가 게토에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 힌켈이라는 자아가 찰리라는 자아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자아. 독재자와 이발사. 목소리를 독점한 자와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자. 공존의 불가능성. 아마도 찰리 채플린은 이 장면을 통해 스스로 질문했을 것이다. 어떻게 힌켈의 목소리를 찰리에게 넘겨줄 것인가? 


4. 영화에서 힌켈을 보다 보면 우리는 힌켈이라는 독자적인 인물이 아닌 찰리 채플린을 보는 것만 같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에서 힌켈은 종종 슬랩스틱 코미디 배우처럼, 무성영화에서의 방랑자처럼 보인다. 물론 가장 쉬운 대답이 있다. 이건 악랄한 독재자에 대한 풍자영화이다. 그러니 그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밀고 들어가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면. 내무부 장관 가비치가 힌켈에게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몽상을 심어주는 말을 하자 힌켈이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내 자신에게 겁이 나는군.” 이 의미심장한 대사. 마치 힌켈이 아닌 찰리 채플린이 힌켈의 육체를 빌려 말하는 것만 같은 대사. 그런 다음 갑자기 힌켈이 커튼 위로 올라간다. 마치 코미디를 재현하듯이. 이 순간 힌켈의 육체에 절대권력자 힌켈이 아닌 무성영화의 방랑자를 연기했던 채플린이 들어와 연기하는 것만 같다. 가비치가 나간 뒤 이어지는 유명한 장면. 지구본이 새겨진 풍선으로 발레를 하는 힌켈. “세계의 황제! 나의 세계!” 이 대사를 하고 난 뒤 풍선으로 발레를 하는 힌켈을 보며 어떻게 무성영화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던 채플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장면에서 중요한 점은 힌켈의 코미디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발레를 하던 중 끝내 터지고 마는 지구본 풍선. 일차적으로 이 실패는 끝내 이 독재자의 세계 정복 야망은 실패하리라는 암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실패는 힌켈의 육체에 찰리를 이식하려는 채플린의 시도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자아.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종종 무성영화에서의 찰리 채플린이 불쑥 등장하는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다. 두 개의 장면. 먼저 영화를 본 누구나 기억하는 푸딩 장면. 수용소를 탈출한 슐츠가 찰리의 집으로 찾아와 총통 관저 폭파 계획을 말하며 누군가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섯 개의 푸딩 중 동전이 들어있는 푸딩을 고르는 사람이 희생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다섯 명의 남자 모두 이에 동의하지만 정작 아무도 그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보는 누구든지 무성영화에서 채플린의 슬랩스틱을 떠올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장면에서 인물들은 무성영화처럼 아무런 대사를 하지 않는다. 채플린이 나타나는 순간. 목소리의 힘 아래 억압되어 있던 방랑자가 회귀하는 순간. 하지만 이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남자들은 곧 한나가 모든 푸딩에 동전을 넣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이 장면의 핵심은 코미디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있다. 무성영화에서 코미디의 주인은 방랑자 찰리가 아닌 찰리가 코미디를 만들어 내도록 이끄는 상황 그 자체이다. 다시 한번 반복. 무성영화에서 방랑자는 웃길 생각이 없다. 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웃게 된다. 인물의 무의지. 상황의 운동. 하지만 이 푸딩 장면에서 코미디를 만들어 낸 것은 한나라는 인물이다. 의지를 지니는 인물. 운동의 주인이 되는 인물. 이런 점에서 무성영화의 방랑자는 이 세계에 자리잡을 수 없다. 또 다른 장면. 나폴로니와 회담을 가지는 힌켈. 식사를 하던 중 나폴로니는 힌켈에게 오스테를리히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힌켈은 나폴로니에게 박테리아국의 군대를 먼저 국경 지대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두 인물은 이 간극을 한동안 좁히지 못하며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결국 가비치의 조언을 받아들인 힌켈이 조약에 서명하기로 약속하면서 두 인물은 다시 화해한다. 이 장면에서도 우리는 무성영화의 찰리 채플린을 잠시 보게 된다. 어떻게? 힌켈은 그 이전까지 코미디를 만들어낸 적이 있지만 그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낸 코미디이다. 하지만 나폴로니가 방문한 후 점차 그가 방랑자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압도되는 것만 같은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 정점이 바로 회동 장면이다. 회동 장면에서 힌켈은 방랑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코미디를 연출한다. 딸기를 던지거나 딸기에 겨자를 얹고 매운맛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춘다. 가비치는 나폴로니가 제안한 조약에 서명하라고 제언한다. 그가 볼 때 이 조약은 단순한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그의 말을 들은 힌켈도 곧장 서명하겠다고 말하며 두 인물의 싸움은 중재된다. 두 장면의 공통점. 모두 코미디가 특정 인물에 의해서 멈춘다. 또 다른 공통점. 두 장면에서 한나와 가비치 모두 정치의 논리를 거부한다. 한나는 슐츠가 앞세우는 독재자 타도라는 정치의 논리를 휴머니즘의 논리로 거부한다. 채플린은 찰리가 슐츠와 함께 도망치는 장면에서 그것을 더욱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옥상에서 슐츠의 짐들을 떨어뜨리는 찰리. 추락하는 정치의 기호들. 그리고 남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만으로 버티겠다는 의지. 가비치는 나폴로니가 제안한 정치를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결국 내세우는 것은 힘의 논리이다. 역사에서 히틀러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수많은 정치의 논리를 무력화시킨 것처럼. 휴머니즘의 논리와 힘의 논리. 충돌하는 두 개의 태도. 한 쪽은 반드시 다른 한 쪽을 무너뜨려야만 할 것이다. 이제 찰리 채플린은 두 개의 태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5.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다. 너무나도 유명한 장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알고 있을 연설 장면. 우선 이 장면이 나오는 과정을 좀 더 따라가고자 한다. 나폴로니와 조약을 맺은 장면 뒤 슐츠와 찰리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인물은 장교복을 뺏어 입은 뒤 길을 걸어간다. 한편 힌켈은 계획대로 강에서 사냥을 하며 자신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슐츠와 찰리를 수색하던 돌격대원들이 그를 찰리로 오해하고 체포한다. 이 장면을 단순한 코미디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힌켈이 사냥을 하고 있던 것은 오스테를리히 침공 계획의 일부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내세우는 힘의 논리를 위한 운동이다. 위선적인 운동. 이 위선은 힌켈 본인을 포함한 일부 권력자만이 알고 있다. 부르주아를 위한 위선. 그렇기에 그가 잠시 권력을 내려놓았을 때 이 위선은 하층민들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다시 상기해보자. 힌켈은 절대권력의 목소리를 통해 국민들 앞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 목소리의 힘이 없다면 그는 아무런 권력도 가질 수 없다. 힌켈은 그 자신이 계획한 위선적인 운동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이건 위선적인 자신의 자아를 처벌하기 위한 채플린의 결단이다. 채플린은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 찰리를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공백이 된 힌켈의 자리. 채플린은 그 자리에 찰리를 보낸다. 자리를 바꾼 두 개의 자아. 스타의 자리에 들어선 방랑자.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어떠한 기대로 할 수 없다. 그는 잠시 공백이 된 그 자리의 표면을 채우기 위해 갔을 뿐 어떠한 힘도 없다. 오스테를리히 침공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그곳으로 피난을 갔던 한나와 가족들 역시 다시 탄압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오스테를리히에 도착한 후 그가 연설을 해야 하는 차례가 온다. 찰리는 연설을 거부하지만 슐츠가 그를 떠밀면서 말한다. “해야 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어떤 희망? 가장 단순한 대답. 잠시 바뀐 힌켈과 자신의 자리를 영구적으로 바꾸는 것. 그래서 자신을 힌켈의 자리로, 힌켈을 자신의 자리로 보내는 것. 하지만 찰리는 이 대답을 거부하듯이 연설을 시작한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연설을 글로 옮겨 적고 싶지만 그건 이 장면에 대한, 이 연설을 한 찰리 채플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찰리가 아니라 찰리 채플린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 장면은 영화 속 인물 찰리가 아닌 찰리 채플린이 찰리의 육체를 통해 영화에 나오는 것만 같다. 마치 힌켈의 육체를 통해 영화에 나왔던 지구본 풍선 장면처럼.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은 찰리가 아닌 목소리이다. 물론 이전에도 영화는 연설하는 힌켈의 목소리를 찍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 힌켈의 목소리는 디제시스에 종속된 목소리였다면 이 장면에서 찰리 채플린의 목소리는 영화 바깥에서 온, 디제시스를 초월한 목소리이다. 채플린이 찰리를 힌켈의 자리로 보내려고 한 것은 이 목소리의 권력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주어졌을 때 찰리의 육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얻기 위한 여정. 연설의 내용은 모두가 알다시피 과학만능주의와 전체주의를 벗어나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전파하는 내용이다. 찰리와 한나가 선택한 논리. 정치의 논리가 아닌 휴머니즘의 논리. 힌켈이 힘의 논리로 정치의 논리를 전복하고자 할 때 찰리와 찰리 채플린은 목소리를 통해 휴머니즘의 논리를 전파하며 정치와 힘의 논리를 전복한다. 목소리를 거부했던 채플린은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비록 그 자신이 스타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언제나 휴머니즘을 믿는 방랑자의 육체를 통해 내겠다는 의지. 세계의 흐름 앞에 선 존재자의 저항. 마치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잠시나마 그 흐름을 멈추기 위해 저항하는 찰리의 목소리처럼. 이 연설이 끝난 뒤 찰리는 한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세요.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비치고 있어요. 암흑에서 빠져 나와 광명을 찾은 거요. 이제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겁니다. 인간들이 그들의 탐욕과 증오와 잔인함을 초월한 더 나은 세상 말이오. 봐요 한나! 인간의 영혼에 날개가 달려 마침내 날기 시작했어요. 무지개를 향해 희망을 빛과 미래를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소. 당신과 나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영광된 미래를 향해 말이오. 봐요 한나! 위를 봐요!” 이 대사가 나올 때 한나의 시선은 화면 밖을 향해 있다. 내러티브적으로만 보면 한나는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찰리의 목소리를 방송을 통해 듣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전에 한나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독백하는 장면에서 찰리 채플린이 그녀를 추상적인 화면 속에 담은 것은 본 적이 있다. 이 장면에서 채플린은 라디오 등과 같은 매개체를 화면에서 없애면서 장면을 다시 한번 추상화하였다. 이때 한나의 시선은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찰리의 목소리가 아닌 영화 바깥에서 들려오는 찰리 채플린의 목소리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영화의 안과 밖이 만나는 순간. 이것은 곧 찰리라는 영화 속 인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겠다는 채플린의 결단이다.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절대권력을 위한 목소리의 매개체에 불과했던 힌켈과 달리 찰리는 단순히 채플린이 목소리를 내기 위한 매개체를 넘어 목소리의 주인이 된다. 그렇기에 연설이 끝나고도 한나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찰리와 힌켈이라는 두 개의 자아 중 찰리를 진정한 자신의 자아로 인정하겠다는 채플린의 선언이기도 하다. 스타의 자리에서도 휴머니즘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 아마도 연설이 끝난 후 찰리와 힌켈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채플린은 그것이 영화의 종착지라고 믿고 영화를 끝낸다. 휴머니즘이 살아있다는 증거. 세계와 역사 앞에서 저항할 수 있다는 믿음.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채플린은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 믿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여자들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