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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l 13. 2020

이사도라의 아이들 리뷰

끝까지 연결하고자 하는 영화의 힘

*이 글에는 특별한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결말과 일부 장면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관람에 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니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1. ‘언택트(Untact)’ 시대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우리에게 도달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시대를 코로나는 우리 눈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자의든 타의든 ‘함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되었고 고독만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게 되었다. 암울한 시간 속에서 영화 역시 관객과 멀어지게 되었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은 줄어들고 관객들 역시 극장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불가항력적인 순간 앞에서 영화제들도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이어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선택 덕분이었다. 영화제가 아예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넘어서고 전주국제영화제는 온라인으로 내 곁에, 어쩌면 이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웨이브(wavve)를 통해 마주한 첫 번째 영화가 <이사도라의 아이들>이었다. 이미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적이 있었기에 영화에 대한 약간의 얘기들을 찾아볼 수도 있었고 기대감 역시 꽤나 높았다. 영화는 그 기대감을 이상한 방식으로 보답했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저밀도와 느슨하다 못해 아예 부재하는 듯한 서사. 거기다 무성영화라고 생각할 정도로 적은 대사까지. 하지만 영화의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인 태도와 형식. 분명 나를 사로잡은 그 힘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할 가능성이 만무한 상황에서 나의 기억이 최대한 선명할 때 짧게나마 그 인상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2. 영화는 네 명의 인물이 세 개의 에피소드를 이루고 있다. 첫 에피소드는 한 젊은 여성 무용수가 프랑스의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무용을 홀로 연습하는 스토리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어린 무용수 마농과 마농의 선생이 마찬가지로 이사도라 던컨이 남긴 무용을 함께 연습하는 것이 전부이다.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는 나이 든 흑인 여성이 무용 공연을 본 후 집으로 가는 내용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일반적인 서사가 존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인물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이 있지도 않다. 심지어 마농을 제외하면 인물들의 이름과 배경조차 알 수가 없다. 그저 세 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가? 공통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이들을 하나의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가? 


첫 에피소드에는 이상한 쇼트가 등장한다. 집 안에서 이사도라의 무용을 연구하는 젊은 무용수(영화에서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니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를 보여주는 카메라. 그때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패닝을 하여 옆에서 그 무용수를 지켜보는 또 다른 인물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무용수는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고립시킨다. 영화 내내 그녀는 어떤 인물과도 대화하지 않고 군중 속에서도 철저히 혼자이다. 오로지 이사도라의 무용만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녀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오직 고독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나이 든 흑인 여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식당에 들어갈 때 짧은 인사를 제외하면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 게다가 이 흑인 여성은 밤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때문에 그녀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밝은 대낮에 활동해서 군중 속에 섞이기라도 했던 젊은 여성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더 강렬한 고독이 지배하는 그녀의 어두운 방. 하지만 한 가지 반문.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마농은 그녀의 선생과 항상 함께하지 않는가? 그들은 고독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서로가 전부이다. 그들이 담기는 프레임 안에 다른 인물들은 들어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에피소드의 마지막 신. 마농이 연습실에서 홀로 무용을 연습하고 있는 도중에 선생이 들어온다. 마농과 선생은 서로 바라본다. 그때 언제나 두 사람을 한 프레임 안에 담던 카메라는 둘을 다른 프레임으로 분리한다. 이전까지 두 인물이 다른 프레임에 들어온 것은 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 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간신히 서로를 지탱하는 듯 보였던 두 인물들도 마지막에 이르러 분리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프레임 안에서 고독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고독한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만이 아니다. 무용을 만든 이사도라 던컨, 자신의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무용. 아이를 잃은 모성이 느낄 절대적 고독. 인물들을 이어주는 이사도라까지 고독하다. 고독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아니라 고독을 온몸으로 느끼는 자들이 영화를 구축한다. 


3. 이사도라의 고독은 결국 아이들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 즉 모성애에 기반한다. 그러니 이사도라의 무용은 고독의 무용인 동시에 모성의 무용이다. 모성과 인물들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젊은 무용수는 모성과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인다. 결혼한 것처럼 보이지도, 아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녀는 분명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뛰어넘고 모성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패닝 쇼트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는 다른 인물이 아닌 이사도라의 모성과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쇼트 하나. 젊은 무용수가 갑자기 창밖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이후 마농도 똑같은 쇼트로 선생님을 바라본다. 죽은 자의 시점처럼 느껴지는 쇼트. 이 쇼트는 젊은 무용수와 마농에게만 허락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인물, 마농의 선생과 흑인 여성은 왜 그 쇼트를 가질 수 없는가? 마농의 선생은 자신의 자녀 두 명이 유학을 위해 떠난 상태이다. 흑인 여성의 배경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방에 놓여진 아이 사진으로 짐작해 볼 때 그녀는 아이를 어떤 식으로든 잃은 것으로 보인다. 자식을 떠나보낸 슬픔. 이사도라와 같은 모성애의 슬픔. 두 인물은 이미 이사도라의 슬픔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러니 표현을 바꿔야 할 것이다. 두 인물은 마농과 무용수에게 주어진 쇼트를 가질 필요가 없다. 다만 아직 그 슬픔을 겪지 못한 젊은 두 여성, 마농과 무용수에게는 그 쇼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사도라의 모성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 


이때 두 인물이 해당 쇼트로 바라보는 대상은 상반된 존재이다. 무용수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고 마농은 홀로 전화를 하는 선생님을 바라본다. 무용수의 시점은 모성의 시점이고 마농의 시점은 아이의 시점이다. 무용수의 시점은 이사도라만의 모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을 품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모성 그 자체를 대변한다. 그리고 마농은 그 모성을 바라본다. 이때 마농이 바라보는 모성은 보편적인 모성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물, 자신의 선생님으로 나타난다. 모성은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한 아이를 품는 모성은 구체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마농은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약간 도식화를 해서 말하자면 젊은 무용수는 모성 자체와 하나가 되어 아래를 향하는 인물이고 마농은 한 아이로서 위를 향하기 위해 무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마농이 자신의 특수성을 버리고 모성이라는 보편성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생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선생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이 든 흑인 여성은 이 모든 것을 집약하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성이 처음 등장하는 신은 아마도 이사도라의 무용을 관람하는 자리로 보여진다. 이때 카메라는 무대를 관람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살펴보던 중 그 여성을 선택한다. 영화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선택한다. 무대를 관람한 후 나이 든 여성은 자신의 육체를 힘겹게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어두운 방 홀로 있던 여성은 커튼을 만지던 중 갑자기 커튼을 부여잡고 그 뒤에 무용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는 위를 바라보는 여성. 이건 앞서 젊은 두 여성의 시선과 정반대이다. 밑을 바라보는 두 여성의 시선이 보편성을 내제하고 있다면 이 나이 든 여성의 시선에는 어떤 보편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잃어버린 아이, 아이를 향한 모성과 슬픔만이 남아있다. 오로지 특수성만이 여성과 무용에 남게 된다. 경험하지 못한 모성을 위해 존재하던 무용은 그 모성을 가진 이에게 전이되면서 완전한 구체성과 육체성을 가진다. 보편성에서 구체성으로. 추상성에서 육체성으로. 물론 이 영화는 연대기가 아니다. 따라서 한 인물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성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영화는 전혀 다른 인물들을 엮으면서 말한다. 서로의 배경을 몰라도, 나이와 환경이 달라도, 심지어 인종이 달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모성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무용수와 마농이 모성을 가진 흑인 여성을 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어쩌면 <이사도라의 아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예술의 힘일 것이다. 전혀 다른 인물들은 하나로 묶는 무용. 그 무용하는 인물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영화. 절대적으로 고독해 보이는 인물들을 무용과 영화는 간신히, 그러나 간절하게 연결한다. 그것이 이 고독한 시대에 예술이 가질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만약 <이사도라의 아이들>에서 나를 매혹시킨 단 한 가지만 말할 수 있다면 이 연대하고자 하는 간절한 힘이라고 답하고 싶다. 지금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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