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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n 10. 2020

퍼스널 쇼퍼 리뷰

결국 나뿐이라는 절망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퍼스널 쇼퍼>의 주인공은 모린이다. 그 모린이라는 인물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하고 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전작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도 발렌틴 역으로 출연했다. 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가? 두 영화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사실상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발렌틴의 역할은 마리아(줄리엣 비노쉬)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헬레나 역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나는 굳이 유혹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헬레나 역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거 같은 연극에서 시그리드 역으로 인기를 얻은 마리아가 헬레나가 되는 것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 헬레나 역을 맡았던 수잔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로야 스네이크’를 창작한 빌렘은 자살한다. 그리고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이름은 말로야 고개를 감싸는 뱀 모양의 구름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이 구름은 악천후의 징조이다. 이렇게나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말로야 스네이크’와 헬레나. 마리아는 헬레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시그리드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지만 그 자리는 더 이상 그녀의 자리가 아니다. 세월이 그녀를 막는다. 헬레나를 받아들임으로써 마리아는 잃어버린 젊음을 인정하고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수용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엔딩에서 발렌틴이 사라지는 것은 마리아가 말로야 스네이크를 눈으로 보면서 그녀가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발렌틴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전작의 이야기를 길게 하는가? <퍼스널 쇼퍼>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모린에게 이식한 영화이다. 마리아와 모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두 인물은 모두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인물들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다가오는 시간을 부정하고 계속 과거의 자신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이 잃어버린 젊음과 시그리드 역을 가진 발렌틴을 질투한다. 모린은 반대로 자신의 상사인 키라가 되고자 하는 인물이다. 옷과 액세서리를 대신 구해주는 퍼스널 쇼퍼인 그녀는 키라와 옷과 장식품, 집과 같이 키라의 물건들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잘 나가는 스타의 일을 대신 해주는 역할은 발렌틴과 모린의 공통점이다. 이때 발렌틴은 선망의 객체이고 모린은 선망의 주체이다. 발렌틴은 마리아의 과거라는 점에서 과거로 도피하고자 하는 이의 이야기이다. 모린은 무엇을 선망하는가? 그녀는 우선 키라의 세계를 동경한다. 단순히 키라의 돈과 인기만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다. 모린은 수동적인 퍼스널 쇼퍼의 삶에서 벗어나 키라의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것이다. 잉고가 그녀에게 기자 일을 제안해도 자율권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다른 하나는 루이스의 세계, 즉 유령의 세계를 동경한다. 유령을 동경하는 것과 죽음을 동경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녀는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령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키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은 유령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녀가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그 세계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유령인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유령인 발렌틴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로 등장하다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 그건 발렌틴이 지니는 과거라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분명 실존했던 순간이었지만 현재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아가 현재와 마주하는 것은 과거를 포기하는 행위이고 그 순간 발렌틴도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반면 모린이 선망하는 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시간적으로는 미래의 세계이다. 키라와 유령의 세계는 모린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이고 동시에 도달 불가능한 세계이다. 미래는 개념적으로 존재할 뿐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한다. 현재의 순간에는 부재하나 언젠가 도달하고자 하는 불투명한 세계를 시각화 하기 위해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유령을 선택한다. 유령 역시 미래처럼 개념적으로는 존재하지만 현실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실상 부재하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키라와 유령이 동일시 되는 점이다. 키라와 유령은 모두 모린의 시선에 잠시 등장하지만 곧 사라진다. 영화에서 키라가 실제로 등장한 유일한 순간은 초반 모린이 키라의 방에 얘기를 나누기 위해 들어간 순간인데 그때 키라는 모린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나가라는 제스처만을 보여준다. 게다가 모린과 키라는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잡히지 않는다. 카메라에 담기는 모습은 키라를 바라보는 모린의 뒷모습이 전부이다. 발렌틴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키라는 한 순간만 존재한다. 모린은 키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 절망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루이스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 


2. 영화에서 유령은 실존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모린의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가 모린이 바라보는 유령과 관객에게 알려주는 유령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 라라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모린은 라라에게 유령의 증거로 보이는 십자 표시를 보여주며 “원래 있었어?”라고 묻지만 영화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다음 신으로 넘어간다. 이 십자 표식은 그 후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때는 모린 홀로 집에 있는 상태에서 책상 위에 이전에 분명히 없던 십자 표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유령은 여러 방식으로 그녀에게 신호를 준다. 수도꼭지를 열거나 알 수 없는 굉음을 내고 그녀 앞에서 심령체를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확실하고도 강렬한 신호를 보낼 때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서 라라와 함께 확인한 십자 표식에 대해서 영화는 침묵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바라본 유령에 대한 증거들은 객관화가 불가능하다. 그녀가 라라의 집에서 확인한 유령의 증거들은 그녀의 망상일 가능성을 배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그녀가 보지 못하는, 객관적으로 분명히 존재하는 듯한 유령도 등장한다. 라라의 집에서 유령을 보고 난 후 도망치듯이 빠져나오는 모린의 모습을 집 안에서 누군가 바라보는 듯한 시점 쇼트로 찍혀있다. 그 집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관객은 그 쇼트를 유령의 시점 쇼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린이 두 번째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누군가 문을 여는 듯한 소리를 듣지만 영화는 바로 다음 신으로 넘어간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따라가듯이 텅 빈 복도를 찍고 잠시 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면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자동문이 홀로 열리고 다음 쇼트에서 영화는 누군가 빠져나간 것처럼 호텔 바깥을 롱 쇼트로 담아낸다. 이런 과정은 잉고가 호텔을 나갈 때도 똑같이 반복되고 잉고는 경찰에게 체포된다. 여기서도 모린과 관객 사이에 간극이 형성된다. 모린이 호텔 방에서 들은 소리에 대해서는 영화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대신 모린이 없는 상황에서는 유령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후 라라의 집 마당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모린의 뒤 쪽에서 유령이 나타나 컵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장면을 관객은 보지만 모린은 보지 못한다. 무언가 불균형한 간극.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와 모린의 주관적인 시점에 담긴 유령을 모두 볼 수 있다. 즉 모린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세계에 대하여 영화는 모린에게는 침묵하고 관객에게 그 세계를 알려준다. 그렇기에 관객의 자리는 키라의 세계, 유령의 세계와 같이 모린이 도달하고자 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이때 모린이 보게 되는 유령의 증거들은 그녀가 유령의 증거라고 믿는 것들을 본 이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라라의 집에서 그녀가 보게 되는 유령의 흔적들은 이전에 보았던 십자 표식이나 힐마 아프 클린트와 심령술에 대한 영상을 본 이후이다. 개리를 만나기 위해 오만으로 갔을 때 컵이 깨지는 것과 쿵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역시 모린이 이전에 컵이 깨지는 소리를 듣거나 라라가 알려준 빅토르 위고에 관한 영상을 찾아봤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거이다. 즉 모린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증거들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유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모린이 보는 증거들, 힐마 아프 클린트에 대한 영상, 빅토르 위고의 영상, 모두 작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유령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영화를 통해 믿음을 공고히 한다. 영화를 통해 영화 이상의 세계를 갈망하는 것. 이 이상한 욕망의 메커니즘. 이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마리아와 반대되는 방식이다. 마리아는 영화를 경멸한다. 좀 더 정확히는 조앤(클로이 모레츠) 같은 사고뭉치의 할리우드 스타가 CG로 만든 슈퍼 파워를 뽐내는 말도 안 되는 요즘 영화를 경멸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그런 조앤이 자신이 맡았던 시그리드 역을 맡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 역시 영화 속 인물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영화가 현실에 대한 재현물로서의 매체라면 <퍼스널 쇼퍼>의 영화는 현실과 구분되는 다른 세계이다. 모린은 그러한 영화 속에 빠져들면서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모린은 착각하고 있다. 제아무리 영화가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영화는 결국 현실의 모방이라는 걸. 마리아와 같이 모린도 필연적인 절망을 향해서 나아간다. 



3. 영화에서 모린의 소통은 대부분 간접적인 소통 방식이다. 키라와의 소통은 전화나 쪽지로 하고 남자친구인 개리와의 소통도 화상 통화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화에서 모린에게 의문의 문자를 보내는 인물 역시 문자로만 소통한다.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잉고라는 사실은 영화 후반부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표면적인 동기도 꽤나 명확하다. 치정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에 모린을 개입시켜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계획이다. 지금 나에게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왜 그러한 행위를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점은 왜 문자메시지에서 잉고는 자신을 루이스처럼 보이도록 행동하는 가이다. 잉고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욕망을 꿰뚫어보는 인물이다. 키라의 세계와 루이스의 세계. 그리고 잉고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키라의 세계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모린이 처음 잉고를 만났을 때 잉고는 처음 만나는 그녀를 마치 아는 사람처럼 인사한다. 키라의 내연남인 그는 모린처럼 키라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지만 모린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욕망을 품고 키라의 주위를 맴돌 뿐이다. 그런 점에서 두 인물은 같은 위치에 선 인물들이다. 그런데 잉고는 키라의 남편의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면서 키라와 헤어질 상황에 놓인다. 키라와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이어온 자신의 커리어까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잉고에게 남은 가능성은 전락뿐이다. 그 전락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모린이다. 모린은 극 중 인물들 중 유일하게 잉고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인물이다. 잉고 대신 모린이 전락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그녀를 잉고의 자리로 오게 하냐는 것이다. 잉고의 선택은 모린이 갈망하는 또 다른 세계를 통해서 그녀를 유혹하는 것이다. 모린의 욕망을 알게 된 잉고는 자신을 루이스로 위장하여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때 모린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내가 있다고 믿는 세계에 대한 작은 확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한 증거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확신. 그래서 누군지도 모르는 번호로 계속해서 오는 문자 속의 인물과 모린은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이 루이스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모린에게 문자를 보내는 잉고는 은연 중에 그녀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이나 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하느냐는 질문은 그녀의 욕망을 간파했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들이다.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모린은 키라에 대한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가감없이 말하기에 이른다. 그때 그녀가 보내는 말. “금기 없인 욕망도 없지”. 모린의 욕망은 모두 금기시되는 욕망들이다. 고용주에 대한 피고용자의 욕망. 죽음에 대한 삶의 욕망 모두 현실에서 강하게 억제된다. 하지만 문자를 통해 죽음에 대한 금기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이제 키라에 대한 금기도 더욱 강하게 넘어선다. 키라의 옷을 가지고 키라의 집에 도착한 뒤 모린은 드레싱룸에서 키라의 옷을 입는다. 옷을 입는 과정에서 그녀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우리는 이미 그녀의 몸을 본 적이 있다.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심장 기형을 가진 그녀는 정기적으로 병원 검사를 받는데 이때 그녀의 가슴을 우리가 보게 된다. 따라서 모린의 나신을 보는 순간 필연적으로 루이스와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고 키라의 옷을 그녀의 몸에 걸치는 것은 죽음을 향해 한발짝 더 들어가는 듯한 모습처럼 보인다. 키라의 옷을 입은 뒤 모린은 아직까지는 정체를 모르는 인물에게 문자를 보낸다. “저질러 버렸어”.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장면. 키라의 침대에 누운 모린은 갑자기 자위를 하기 시작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 장면을 이상하게 처리했다. 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쓰이지 않았던 디졸브를 통해 표현된 이 장면. 그리고 카메라는 그녀를 방에 남겨두고 떠난다. 이러한 카메라 워킹은 라라의 집에서 도망치는 그녀를 집 안에서 시점 쇼트로 담아낸 카메라와 강렬하게 대비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유령으로 보이는 존재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는 모린. 그건 누구의 유령인가? 그녀의 망상인가 실제 유령인가? 분명한 것은 키라의 집에서 모린은 죽음의 세계로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자위는 상대방 없이 홀로 하는 섹스이다. 키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모린에게 섹스할 수 있는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자위 밖에 없는 그녀를 영화는 디졸브를 통해 한번 더 강조한다. 그때 보이는 것은 모린 자신 뿐이다. 자신 이외에 어떤 가능성도 차단된 세계. 그럴 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죽음만이 유일하다.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루이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죽음인가? 아니면 모든 실존적 가능성을 잃어버린 채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실존의 죽음인가? 영화는 아직 명확하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4. 키라의 금기를 깨버린 모린은 문자메시지의 유혹을 따라 키라의 집 바깥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펼친다. 잉고가 보낸 호텔 주소와 키를 통해 호텔 방에 도착한 모린은 문자의 말을 따라 키라의 옷을 입고 그 사진을 보낸다. 이로서 잉고의 목적이 달성된다. 무슨 목적? 금기를 깨도록 만드는 목적. 모린이 그녀의 욕망을 강하게 드러낼수록 잉고의 범행이 그녀에게 전도되기 쉬워진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는 모린이 키라를 살해할 가장 강력한 동기를 가진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때도 이것을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조사 장면에서 모린이 이런 말을 한다. “전 퍼스널 쇼퍼예요”. 이게 왜 이상하다는 말인가? 모린은 이전까지 단 한번도 자신을 퍼스널 쇼퍼로 정의한 적이 없다. 라라와 대화할 때도, 개리와 통화할 때도, 이후에 어윈과 대화할 때도 항상 일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오로지 루이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다. 퍼스널 쇼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인물은 일을 하면서 만난 직원들을 제외하면 잉고가 유일하다. 말하자면 모린은 자신의 정체성을 퍼스널 쇼퍼가 아닌 영혼을 보는 자, 영매로 규정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모린은 퍼스널 쇼퍼라는 자신의 직업을 혐오한다. 여러 번 말했듯이 모린은 오로지 키라의 세계만을 갈구한다. 하지만 모린도 키라의 세계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갈망하는 또 다른 세계인 루이스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영매로 규정한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퍼스널 쇼퍼라고 규정하고 있다. 경찰 조사라는 상황적인 맥락으로만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라가 죽은 뒤에야 자신을 퍼스널 쇼퍼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모린이 퍼스널 쇼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키라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키라가 없는 상황에서 퍼스널 쇼퍼라는 정체성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동시에 키라의 죽음은 모린이 욕망하는 세계의 죽음이다.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가 사라졌으니 오로지 현재에 머무는 방법밖에 없다. 결국 모린이 자신을 퍼스널 쇼퍼라고 부르는 것은 퍼스널 쇼퍼라는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채 자신의 존재만이 남는 상태. 이건 단지 키라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내내 키라는 유령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린이 루이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물과 문자를 하는 도중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가 걸려온다. 하지만 그 전화는 잉고도, 루이스도 아닌 키라였다. 그 순간 키라는 루이스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모린이 살해 현장을 발견했을 때 하는 행동도 이전 라라의 집에서 유령을 볼 때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키라의 피를 발견하고 시체를 발견한 뒤 바로 도망가지 않고 집 안에 남아있는 듯한 또 다른 누군가가 내는 소리를 들은 뒤 그제서야 집을 나간다. 그럼 이때 집 안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살해범인 잉고인가? 혹은 또 다른 유령인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중요한 점은 키라가 유령과 동일시되는 것처럼 잉고 역시 유령과 동일시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잉고는 모린에게 보내는 문자를 통해 자신을 유령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런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키라가 죽은 이후이다. 경찰 조사를 마친 후 모린은 자신과 나눈 문자를 경찰에게 보여줬냐는 문자를 받는다. 이때 모린은 깨닫게 된다. 자신과 지금까지 문자를 나눈 존재가 유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람은 잉고라는 사실까지. 그때 모린은 무엇을 느끼는가? 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감. 지금까지 자신이 루이스의 증거라고 생각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허무함. 하지만 그녀가 자기 자신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퍼스널 쇼퍼도, 영매도 모두 포기했지만 아직 또 다른 자신이 될 가능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녀의 실존은 여전히 본질에 앞서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잉고는 모린을 죽이지 못한다. 그녀는 키라의 자리도, 잉고의 자리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잉고는 곧 경찰에게 체포된다. 영화는 잉고가 호텔을 빠져나가면서 경찰에게 체포되는 것을 마치 유령이 그녀를 경찰로 유인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잉고는 유령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키라의 자리에도 갈 수 없다. 모린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서 잉고를 연기한 배우(라스 에이딘거)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클라우스를 연기한 배우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클라우스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하도록 유혹하면서 그녀를 실존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때 클라우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퍼스널 쇼퍼>의 잉고는 실패한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클라우스는 마리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존재이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라는 유일한 가능성만을 부여하며 그녀를 실존적으로 죽게 만든다. 또한 마리아를 그녀가 거부하는 연극(영화), 혹은 현실 안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잉고가 모린을 유혹하는 방식은 또 다른 가능성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게 만들고 모린이 욕망하는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잉고는 유령이 아니다. 그 역시 키라의 자리로 갈 자격이 없다. 그리고 모린이 보는 영화의 세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역시 모린처럼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5. 모든 사건이 끝난 후 모린은 자신의 남자친구 개리가 있는 오만으로 향한다. 오만에서 개리의 집에 도착한 그녀는 책상 위에 남겨진 쪽지를 발견한다. 쪽지의 내용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키라가 모린에게 일을 시킬 때 했던 방식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급격히 불안한 기운에 휩싸인다. 잠시 영화를 되돌아보자. 영화에서 개리는 딱 두 번 등장하는데 모두 화상통화 화면이다. 즉 모린도 관객도 그를 직접 본 적이 없다. 키라의 경우와 대비되지만 동시에 유사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키라는 직접 등장하긴 하지만 한 번도 모린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개리는 소통을 하기는 하지만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소통조차 화상통화를 통한 소통이 전부이고 화상통화 화면은 뒤로 갈수록 흐릿하게 처리된다. 결국 키라처럼 개리 역시 그 존재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개리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사후세계를 전혀 믿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극 중에서 모린의 주변 인물들은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사후세계를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리는 아니다. 개리는 자신을 유령과 철저하게 분리한다. 이건 키라와 정반대이다. 키라는 영화 속에서 유령에 대해서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영화는 키라를 지속적으로 유령과 같은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것은 모린의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린이 초반 개리의 화상통화를 계속 거부하는 이유도 개리가 사후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개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매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루이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욕망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화상통화를 할 때는 모린이 먼저 개리에게 통화를 건다. 이때는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는 의문의 인물이 루이스가 아닌 잉고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이다. 결국 모린은 루이스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퍼스널 쇼퍼도, 영매도 포기한 그녀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안고 개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개리를 만나지 못한다. 대신 남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퍼스널 쇼퍼의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쪽지뿐이다. 쪽지를 따라 개리가 있다는 숙소로 도착한 그녀는 방에서 공중을 떠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컵을 보게 된다. 무언가 이상한 이 장면. 관객은 이 장면을 앞서 본 적이 있다. 라라의 집 정원에 앉아 있는 모린의 뒤편에 나타나 컵을 떨어뜨리는 유령. 하지만 모린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저 깨진 컵을 치우면서 어윈이 컵을 떨어뜨렸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욕망을 다시 자극한 것처럼 그 모습이 그녀의 눈 앞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관객은 유령의 존재를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이것은 어쩌면 영매의 정체성을 모린이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징조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곧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모린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그 소리로 교감을 나눈다. 그러던 중 모린이 묻는다. “루이스 너야?” 아무 대답이 없다. 다시 한번. “루이스 너야?” 또 대답이 없다. 그러자 마지막 질문. “아니면 그냥 나야?” 그리고 들려오는 쿵 소리. 이 소리를 들은 모린은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고 영화는 끝난다. 무언가 당황스러운 결말. 분명 사후세계의 증거라고 생각한 것이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때 모린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현재에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이건 이전에 퍼스널 쇼퍼와 영매라는 정체성을 포기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 모린의 상태는 무(無)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상태, 새로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결말의 모린에게 남는 것은 오직 퍼스널 쇼퍼의 가능성이 전부이다. 그녀가 오만에서 한 일. 쪽지를 받고 이를 그대로 행한 일. 이것은 전형적인 퍼스널 쇼퍼의 일이다. 그녀가 파리에 있던, 오만에 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퍼스널 쇼퍼의 역할이 전부이다. 게다가 이제는 루이스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유령과 같았던 키라와 달리 개리는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결국 모린에게 남는 것은 새로운 자신도, 영매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퍼스널 쇼퍼라는 정체성뿐이다. 이 잔혹한 결말. 그리고 모린은 관객과 눈을 마주친다. 분명 카메라 밖에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당신들. 그저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나. 여기서 모린은 한 번 더 절망한다. 자신이 바라던 또 다른 세계. 영화 밖 관객의 세계. 영화 바깥에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는 관객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은 그렇게 좌절된다. 관객은 분명히 알고 있다. 유령이 존재하는 것을. 그렇기에 모린도 유령의 세계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한다. 유령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모린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 세계는 모린이 도달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죽음을 선고 받은 모린을,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영화는 이전의 블랙의 페이드 아웃과는 정반대인 화이트 아웃으로 지우며 끝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제목은 <퍼스널 쇼퍼>이다. 모린은 과거에도 퍼스널 쇼퍼였고, 현재도 퍼스널 쇼퍼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퍼스널 쇼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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