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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pr 17. 2020

45년 후 리뷰

죽어가는 자의 시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인생의 비극이란 사람들이 삶을 사는 동안 내면에서 잃어가는 것들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1. 요일을 알 수 없는 어느 날, 제프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의 내용은 그의 옛사랑인 카티야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그녀의 시신은 알프스 산맥 빙하 안에서 얼려진 채로 있다. 카티야의 시간은 50년 전 그때에 멈춰있다. 그 과거가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제프에게 찾아왔다. 영화에서 과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카티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로지 제프의 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 편지가 도착한 날은 언제인가? 그 주 토요일에 결혼 45주년 파티가 있고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영화가 직접 알려주니 일요일 혹은 월요일일 것이다. 만약 영화의 리듬을 그대로 가져와 화요일 하루 전의 일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분명 월요일이다. 지금 나의 관심사는 정확한 요일에 있지 않다.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왜 영화는 편지가 도착한 날의 날짜나 요일을 알려주지 않는가? 이건 시작을 지운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시작이 존재하나 그 시작은 이후의 날들과 분리하는 것이다. 그 날을 제외하면 영화는 굳이 자막과 형식을 통해 날과 날 사이의 정확한 간격과 리듬을 만들고 있다. 그 리듬에서 첫째 날은 제외된다. 첫째 날과 나머지 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날은 편지가 도착한 날이고 나머지는 그 이후의 날들이다. 편지가 도착하기 전과 이후에 제프와 케이트의 시간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편지가 소환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프와 카티야가 함께 했던 과거.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과거의 시간이 찾아온다. 영화는 카티야가 과거의 그 자리에서 얼려져 있는 채 발견되는 상황을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말하자면 제프와 케이트에게 찾아온 그 과거의 시간은 죽은 자의 시간이며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리듬은 시간이 멈춘 자, 혹은 과거의 시간에 머무는 자의 리듬이다. 이 이상한 리듬. 이건 분명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혹은 어긋한 시간이다. 제프와 케이트가 경험하는 시간은 현재와 균열을 일으킨다. 현재에서 어긋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노부부인 것도 죽어가는 자의 시간을 다루기 위함이다. 카티야의 시체는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시간이 알프스 산맥의 눈을 녹여 그녀를 발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망각을 불러오지 않고 오히려 과거를 불러온다. 이는 곧 제프의 마음 속에 카티야가 죽지 않고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프가 식당에서 케이트와 기후변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빙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다(그리고 이때 실수로 컵을 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결혼 45주년 파티가 있는 주에 편지가 왔는가? 결혼 40주년도 아니고, 50주년도 아닌 45주년 기념 파티를 하는 이유는 40주년 당시 제프가 몸이 안 좋아 파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0년이라는 주기적인 리듬을 노화가 방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리듬이 들어올 때 과거의 시간은 50년이라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시간에 찾아온다. 현재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과거가 침입하기 시작한다. 이제 제프와 케이트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야만 한다.


2. 영화는 의도적으로 요일 사이에 일정한 장면들을 배치한다. 요일이 시작할 때는 평화로운 아침의 풍경과 자신의 개 맥스와 함께 산책을 하는 케이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함께 산책하는 맥스는 무언가에 대한 상징이라기보다는 현재의 동력과 활력 그 자체로 보여진다. 첫째 날 함께 산책하는 맥스와 케이트는 어떠한 이질감도 없이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산책을 한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제프에게 편지가 도착한 이후이다. 제프는 독일어를 많이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명사는 동사보다 잘 기억한다. 동사를 기억하는 것은 행위를 기억하는 것이다. 단순히 대상을 기억하는 것과 행위를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제프는 독일어 사전을 찾아와 편지를 해독하고 서서히 그 시간에 물들어간다. 제프는 현재의 삶에서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인물이다. 키에르케고르 책을 완독하려고 해도 3번이나 실패하고 변기를 고치다 손가락을 다치기도 하며 금연을 계속 실패한다. 또한 늙어버린 몸은 케이트와 섹스를 나누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육체와 정신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인물은 산드라 윌킨스라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본인이 혐오하는 인물이 자신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거부하고 싶어도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시간과 마주하는 것이다. 제프가 과거에 사로잡히면서 현재의 케이트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화요일 레나와 조지 부부를 식당에서 만났을 때 케이트는 레나와 손녀 샐리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기를 띠지만 제프는 이 대화에 무관심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을 카메라는 패닝을 통해 하나의 쇼트와 프레임에 담아내며 제프와 케이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제프에게 현실의 시간은 부정하고 싶은 시간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죽음은 다가온다. 현실을 긍정하면 죽음 역시 긍정해야만 한다. 제프는 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재로부터 도피해 카티야의 시간인 과거로 도망친다. 그때부터 제프는 현재와 어울리지 못한다. 옛 동료들과 함께 하는 오찬에도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케이트의 권유로 억지로 참석해도 불평만 늘어놓으며 그로 인해 케이트와의 갈등도 심화된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나이든 사람들뿐이다. 제프는 그들과 엮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육체는 현재의 시간을 따라 늙어가지만 정신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다. 완전히 상반된 흐름. 그러나 같은 지향점을 향한 운동. 무엇을 향한 흐름인가? 몸은 현재와 함께 죽어가고 정신은 현재와 어긋나며 죽어간다. 영화의 태도는 명확하다. 불가항력적인 몸의 노화와 죽음에 맞서 현재를 긍정하는 것, 그것이 삶이고 현재를 부정하며 과거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이 죽음(정확히는 실존의 죽음)이다. 제프가 죽어가고 있을 때 케이트 역시 그와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3. 케이트는 아침마다 맥스와 함께 산책을 한다. 첫 날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산책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제프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의 활력이 느껴진다. 제프가 과거의 시간을 살아갈 때도 그녀는 제프를 현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케이트 본인이 제프와 함께 과거의 시간에 잡힌다. 제프를 과거에 살게 하는 것은 상실감이다. 카티야와 함께 했던 시간. 지금은 잃어버린 그 시간.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복원할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감. 케이트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현재의 자신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과거가 현재를 빼앗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녀는 이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 수요일 밤 잠자리에서 케이트는 제프에게 카티야가 죽지 않았다면 결혼했을 거냐고 질문한다. 그녀는 가정으로 하는 얘기, 즉 일어나지 않은 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제프는 결혼을 했을 거라고 답한다. 그리고 다음 날 목요일, 그녀는 산책도 가지 않고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제프가 올라갔던 다락방에 올라간다. 맥스는 그녀에게 위험을 알리듯이 짖지만 이를 뿌리치고 올라간 케이트가 하는 일은 카티야의 과거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는 것이다. 남편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케이트. 사실 케이트는 그 이전에도 카티야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화요일 밤 다락방에 올라가 있던 제프를 발견한 케이트는 제프가 건네준 사진을 보지만 영화는 그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은 상징적인 과거로의 회귀이다. 그리고 여기서 케이트는 카티야가 임신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프가 카티야에게 사로잡힌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제프와 케이트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들은 대를 이을 수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이어갈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고 현재를 긍정할 명분이 된다. 아이가 없는 제프와 케이트에게 죽음은 그 자체로 완전한 시간의 단절이다. 두 인물이 개를 키우는 인물은 낳지 못한 아이를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개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보다 일찍 죽는다. 아이를 낳기에는 두 인물 모두 나이가 많이 들었다. 제프가 카티야를 그리워하는 진짜 이유는 결국 자신의 시간을 물려받을 존재, 즉 아이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프가 카티야의 형식적인 보호자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프는 세를 들어 살기 위해 카티야와 위장 결혼을 했다. 그리고 카티야가 죽은 그 해에 케이트의 어머니도 죽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프는 카티야가 케이트와 같은 금발 머리였다고 말한다. 즉 카티야는 케이트와 동일시되는 동시에 케이트의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때 카티야와의 결혼은 자신의 아내와의 결혼인 동시에 아내의 어머니와의 결혼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케이트에게 제프는 어머니의 남편, 즉 아버지인 셈이다. 마치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같은 아이러니. 오이디푸스 신화가 남성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이 영화는 비극을 여성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바꿔놓는다. 제프의 과거를 알게 된 케이트는 불안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제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슬라이드를 넘긴 뒤 카메라는 이전 사진들과는 다르게 카티야의 사진을 화면에 가득 담는다. 그때 사진의 배경인 호수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카티야의 자리에 케이트가 놓여진 듯한 이 장면. 이로서 케이트는 완전히 과거에 사로잡힌다. 이때 과거는 케이트 자신의 과거가 아닌 제프의 과거이다. 왜 그녀는 제프의 과거로 가야 하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가 과거로 가는 것. 이것은 과거를 위한 선택이 아닌 현재를 위한 선택이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선택.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된 후 자신의 눈을 뽑고 이오카스테는 자살하며 진정한 고통을 회피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그녀가 과거에 자리잡을 때 제프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과거도 허락되지 않는다. 제프가 현재로부터 도피해 과거로 간다고 해도 그곳에는 카티야가 아닌 케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케이트는 제프의 남편이 아닌 어머니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제프에게는 현재의 삶만이 허락된다. 케이트가 다락방에 있을 때 제프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케이트의 권유로 원하지 않은 오찬에 참석하고 있었다. 제프의 말에 의하면 즐거웠던 시간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는 현재로 돌아왔다. 그 시간에 케이트는 제프의 과거가 되었다. 현재의 삶을 복구하기 위해 과거로 가는 것. 삶의 활력을 위한 역설적인 죽음. 이건 어떤 측면에서는 희생이다. 삶과 사랑을 위한 희생. 이제 케이트는 남편을 대신해서 과거로 가야 한다.


4. 과거의 시간을 살기 시작한 케이트는 곧 현재와 어긋나게 된다. 다락방을 내려온 후 DJ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 누구보다 파티 음악에 신경을 많이 쓰던 그녀가 음악 리스트를 정리하지 못하며 쩔쩔매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처연함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 케이트는 오찬에 참석한 제프를 데리러 온다. 차에 타고 난 뒤 제프는 과거와 변해버린 공간과 친구들에 대해 수많은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차가 멈추고 난 후 제프는 차에서 내려 헛구역질을 한다. 그때 카메라는 고통스러워 하는 제프의 모습은 후경에서 흐릿하게 처리하고 대신 이를 바라보는 케이트를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쇼트. 케이트가 약을 먹고 있다. 그녀의 앞에는 거울이 그녀와 마주보고 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는 것은 차에서 백미러를 통해 제프를 바라보는 것과 대비된다. 그녀는 고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 쪽에는 육체의 고통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정신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육체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불가항력 적인 것이다. 영화는 오로지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만을 다룬다. 그렇기에 제프가 헛구역질 하는 장면에서도 계속 흘러나오던 음악은 다음 케이트의 쇼트에서 끊긴다. 그녀가 먹는 약은 정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약이다. 동시에 이것은 제프의 고통과 케이트의 고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케이트의 약은 제프의 고통을 위한 약이기도 하다. 케이트가 제프의 과거를 살게 된 이상 두 사람은 하나의 운명체이다. 한 쪽의 고통은 곧 다른 한 쪽의 고통이다. 다시 말해 케이트는 제프의 고통을 대신 극복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제프는 케이트의 고통을 모른다. 오로지 케이트만이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희생에 관한 영화이다. 이 희생에 대한 결과는 명확하다. 제프는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과거에 머무르는 존재이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 다락방으로 간 케이트는 입구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낀다. 다락방은 과거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불어온 바람이 방문을 닫으려고 하는 것은 현재와 어긋나는 케이트의 실존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요일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목요일과 마찬가지로 맥스와 산책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문다. 그러다 제프가 시내에 나가자 자신도 시내로 나간다. 이전에도 그녀는 시내에 나간 적이 있다. 첫째 날에는 45주년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나갔고 화요일에는 제프와 식사를 하고 레나와 쇼핑을 위해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제프에 대한 의심으로 나간다. 전혀 다른 목적의 운동. 현재를 위한 운동이 아닌 과거를 위한 운동. 시내를 걷는 케이트의 모습에는 이전과 같은 어떠한 활력도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듯한 모습은 한편으로 무섭게까지 느껴진다. 케이트가 여행사에 찾아와 제프에 관하여 물어볼 때도 카메라는 오로지 그녀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 반대편의 대화 상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제프가 스위스 여행을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케이트. 제프는 그것이 카티야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케이트는 믿지 못한다. 스위스로 가는 것은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 의도가 어찌됐든 케이트는 제프를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케이트는 제프에게 다음 날 있을 45주년 파티만은 반드시 참석하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리고 토요일. 제프가 케이트를 깨운다.



5. 토요일의 첫 쇼트는 첫째 날의 첫 쇼트와 매우 유사하게 보여진다. 대신 이 날은 제프가 케이트보다 먼저 일어나 그녀에게 산책을 제안한다. 맥스와 함께 산책을 하며 제프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취미까지 케이트에게 이야기하며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는 모습을 보인다. 파티로 가는 차 안에서 케이트는 시계 얘기를 꺼낸다. 그녀는 시내로 나갔을 때 두 번 시계를 살까 고민하지만 사지 않는다. 그녀는 시계에 무언가를 새기고 싶지만 무엇을 새겨야 할지 몰라서 사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이다. 케이트는 제프에게 현재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으나 그 시간의 정체성, 다시 말해 제프와 케이트 자신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제프는 시계에 관심 없다고 대답한다. 영화에서 시계와 대비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진이다. 사진은 과거의 한 순간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케이트는 원래 분위기를 깬다는 이유로 사진을 안 좋아했다. 그러나 나이든 현재는 사진을 원한다. 케이트가 원하는 사진은 키우던 개들이나 제프의 사진이다. 케이트의 사진은 현재를 긍정하며 기록하는 것이다. 제프 역시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프가 다락방에서 가지고 있던 사진은 모두 카티야의 사진이다. 제프에게 사진은 상실되어 잡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이다(제프가 과거에 사용하던 카메라 역시 다락방에 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전혀 다른 지향점. 그런 그들에게 레나가 사진을 선물한다. 그 사진들은 제프와 케이트, 그리고 그들이 키운 개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건 케이트를 위한 사진이다. 제프 역시 이 사진들을 보며 만족해 한다. 이어지는 축사. 그 축사의 핵심은 과거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케이트와 결혼한 선택을 긍정하는 축사는 사진의 성질과 유사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내로서 케이트에게 감사를 전한다. 제프 스스로가 그녀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로 옮긴다.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온 듯한 제프.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일까? 축사가 끝난 후 함께 45년 전 결혼식에 쓰였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제프와 케이트. 두 인물은 이전에도 함께 춤을 춘 적이 있다. 화요일 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었던 제프와 케이트.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차분하게 춤을 춘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별 후 홀로 남은 사람에 대한 노래이다. 무언가 불길한 내용의 음악. 춤을 추던 케이트는 제프와 잡은 손을 뗀다. 주위의 함성과 축복의 분위기에도 케이트는 눈시울을 붉힌다. 이건 어떤 눈물인가? 돌아오지 않는 제프에 대한 원망의 눈물인가? 혹은 마침내 제프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인가? 아니면 더 이상 현재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눈물인가? 그때 카메라에 담긴 케이트의 모습은 마치 금요일 시내에서 완전히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마치 첫 번째 날과 같이 이후의 날들은 영화와 분리된다. 과연 제프는 케이트가 원하는 대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온 것일까?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후의 삶은 제프의 선택에 달려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제프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한 케이트의 선택이다. 그녀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 이제 파티가 끝나고 날이 바뀌면 새로운 리듬의 날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케이트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올 수도, 여전히 죽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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