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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r 24.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함께 만들어 가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영화의 무대는 부재의 공간이며, 모든 면에서 부재가 강조되는 공간이며, 따라서 다른 방식을 통해서 현전하게 된다. 연극에서처럼 내가 대상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이유 이외에, 이 간격에서 남아 있는 대상이 영화에서는 더 이상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사라진 자리를 메우는 대체물이라는 이유가 덧붙여진다.” – 크리스티앙 메츠, <상상적 기표> (이수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0. 이 영화에는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의 중반부 소피가 아이를 유산하기 위해 한 여자의 집에 방문한다. 유산을 마친 뒤 고통스러워하는 소피의 얼굴 옆에서 한 아기와 소피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이 알 수 없는 장면. 분명 방금 한쪽에서 생명을 제거했는데 또 다른 생명이 그녀를 위로해주고 있다. 게다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후에 이를 그림으로 까지 그린다. 한편으로는 신비로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운 이 장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 의미 부여 없이 지나가기에는 이 장면을 꽤나 비중 있게 찍었다. 혹은 유산에 관한 정치적 메시지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지만 지금 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이 장면을 본 나는, 이 장면을 보여준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이 장면에 대하여 설명해야만 한다.


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건 영화의 제목이면서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에서부터 제인 캠피온의 <여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는 분명 <피아노>와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상당수 존재한다. 또한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인물들이 대화 등을 통해서 변화를 겪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 공간을 빠져나가는 구조는 <가을 소나타>나 <페르소나> 같은 잉마르 베리만의 실내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베리만이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바라보고자 한 것은 여성의 자기 정체성과 모성애에 관한 질문이다. 캠피온의 주제와 베리만의 구조. 이 둘이 만나면서 영화의 지향성은 확실해졌다. 여기에 셀린 시아마는 새로운 모티브를 끌고 온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 바라보는 것과 마주하는 것. 응시의 문제가 영화 속으로 깊숙이 자리잡는다. <페르소나>에서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몰래 관찰하는 것에서 끝난다. 셀린 시아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두 인물은 단순히 한쪽이 한쪽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에서 두 인물은 마주보면서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두 인물도 비극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두 인물도 결국 자신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비극은 처연하지 않다. 인물 스스로가 선택했고 누구도 이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비극은 아름다울 수 있다.



2. 영화는 어디를 응시하면서 시작하는가? 새하얀 도화지 위에서 수많은 손들이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카메라는 그 손과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 마리안느의 목소리가 카메라를 부른다. 모델로 앉아있는 마리안느와 학생들이 마주하고 동시에 마리안느와 관객이 마주한다. 영화가 마리안느를 찾아가지 않고 마리안느가 영화를 부른다. 창작자의 손에만 주목하던 카메라는 뮤즈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러다 마리안느가 뒤에 놓인 그림을 바라본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엘로이즈의 모습이 담긴 그림. 마리안느가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그림이 마리안느를 부르는 듯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 속에 담긴 추억이 마리안느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그림의 제목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말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등장인물이 스스로 영화를 시작하는 듯한 이 모습. 여기서 마리안느는 영화 속의 대상으로서 뮤즈가 아닌 영화를 스스로 이끌고 가는 주체적인 인물과 같다. 영화는 마리안느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시작되는 거대한 플래시백.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마리안느가 배를 타고 들어온다. 이때 파도로 인해 캔버스가 물에 빠지고 마리안느는 망설이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 캔버스를 구한다. <피아노>와 정반대의 구조. <피아노>에서 에이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아노와 함께 물에 빠지고 바다에 버려진 피아노는 낭만화 된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캔버스는 비어있다. 그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엘로이즈가 살고 있는 섬에 도착한다. 해변에서 한참 걸어야 나오는 저택. 마치 감옥이나 유령의 집과 같이 느껴지는 어두운 분위기. 도착하자마자 마리안느가 하는 일은 벽난로에 불을 붙여 젖은 몸을 말리고 주방으로 가 배를 채운다. 음식을 먹는 그녀를 보고 소피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지만 마리안느는 덤덤하게 와인을 달라고 할 뿐이다. 마치 자신이 집 주인인 것처럼.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확신이 가득 차 있다. 다음날 엘로이즈의 어머니와의 만남에서도 그녀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남긴다. 활기가 그녀를 지배한다. 그러나 간과한 한 가지. 그녀는 화가로서 엘로이즈를 만나는 것이 아닌 산책 친구로서 그녀를 만나는 것이다.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에게 다가가기 위해 화가라는 신분을 숨기고 산책 친구라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 가면을 쓰게 된 이상 그녀는 화가가 아니다. 그녀 앞에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모델이 없다. 단지 모델의 수많은 파편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마리안느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산책 친구로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달리기이다. 엘로이즈는 이를 오랫동안 꿈꿔왔다고 말한다. 마리안느가 묻는다. “죽음이요?” 왜 하필 죽음인가? 마리안느가 직전에 소피에게서 엘로이즈 언니의 죽음을 들은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있으나 정말 이상한 점은 왜 달리기 직후, 그것도 절벽에 뛰어내리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을 언급한 점이다. 마리안느는 섬 외부에서 온 인물이다. 이 섬과 저택에는 마리안느와 같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죽음의 기운이 알게 모르게 도사린다. 소피가 전한 엘로이즈 언니의 죽음이 이를 나타낸다. 이 죽음의 배경에는 억압이 깔려있다. 엘로이즈 어머니가 지배하는 저택은 결혼에 대한 압박으로 활력을 띌 수 없는 공간이다. 이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죽음뿐 이다. 엘로이즈 언니에게는 그녀를 구원해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부의 마리안느가 들어오면서 저택과 섬에도 점차 활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엘로이즈에게는 자신의 생(生)의 활력을 내뿜을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고 마리안느는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 사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파편들을 모아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후 엘로이즈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마리안느. 그러자 엘로이즈가 생애 처음으로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이전까지 거칠게 휘몰아치던 파도는 잠잠해졌다. 마리안느가 떠나기 전 엘로이즈가 마지막으로 활력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영화는 수영이 끝난 후 젖은 엘로이즈를 보여줄 뿐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전날 홀로 성당에 산책을 갔을 때도 영화는 엘로이즈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마리안느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날 달리기는 함께 뛰었지만 수영은 함께 하지 않았다. 홀로 있는 엘로이즈가 느끼는 것은 고독 속의 자유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홀로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함께 하는 인물들의 활력에 관심을 갖는다.


3. 완성된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충돌한다. 마리안느는 규칙과 관습과 이념에 따라 그림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의 유무를 묻는다. 생명력과 존재감. 엘로이즈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면 예술 안에서라도 얻고자 한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이론은 알고 있지만 모델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엘로이즈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는 초상화의 재료로서의 엘로이즈 육체의 파편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마리안느가 그린 것은 엘로이즈가 아닌 파편들의 이론적 모음이다. 그 안에 엘로이즈의 활기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마리안느는 초상화 속 엘로이즈의 얼굴을 직접 지운다.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저택에 도착한 날 밤 마리안느는 얼굴이 지워진 알 수 없는 초상화를 발견한다. 그 그림은 엘로이즈의 것일 수도, 죽은 엘로이즈 언니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시대의 한계 속에서 생명력과 존재감을 잃은 모델이 된 수많은 여성들이 그림에 깃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며칠 후 마리안느가 그 그림을 관찰하기 위해 불을 비추던 중 그림에 불이 붙고 곧 벽난로 속에서 타들어간다. 이때 그림은 우연히 불에 붙은 것이 아닌 스스로 불에 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엘로이즈 언니가 억압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림은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 마리안느의 젖은 몸을 말려주던 불은 그림의 마지막 활기가 되어 타오른다. 마리안느의 실패에 실망한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섬을 떠나고자 하지만 엘로이즈가 갑자기 모델을 자처한다. 어머니가 섬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가장 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 또한 완성할 수 있다.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드디어 모델의 자리에 앉은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말한다. “날 봐요”. 처음으로 화가로서 모델의 시선을 요청한다. 그리고 엘로이즈와 눈이 마주칠 때 카메라도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이전에도 우리는 이러한 시선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달리기를 할 때 절벽 앞에서 멈춘 엘로이즈는 뒤돌아보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를 바라보는 행위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관객에게 알리는 행위이다. 한번은 달리기를 통해서, 다른 한번은 모델로서. 그렇기에 모델은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활력을 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활력은 창작자의 활력과 다르지 않다. 모델은 단순히 작품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엘로이즈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작품을 위해 대상화가 되었지만 엘로이즈는 이를 거부한다. 그녀는 모델로서 마리안느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창작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볼 때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바라본다. 그림을 그리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를 묘사할 때 그 안에는 단순한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담긴 감정 역시 함께 나타낸다. 이는 분명 마리안느가 처음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것과는 다르다. 두 인물은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마리안느가 산책 친구가 아닌 화가로서 엘로이즈를 바라볼 때의 감정은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곧 사랑으로 직결된다. 사랑은 함께 해야만 가능한 감정이다. 창작자와 모델이 함께 작품을 완성하듯이 두 인물도 함께 자신들만의 사랑을 만들어간다.



4. 마리안느가 자신과 엘로이즈의 관계를 깨달았을 때 새로운 인물이 두 사람과 함께 한다. 이전까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하녀로서만 일하던 소피는 이제 두 인물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세 인물은 함께 카드 놀이를 하고 같은 탁자 위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한다. 소피는 자수를 만들고 마리안느는 술을 따르고 엘로이즈는 요리를 하며 영화는 세 인물의 동등한 위치를 보여준다. 소피는 원치 않게 임신을 한 상태이다. 엘로이즈 어머니가 있을 때는 말하지 못한 비밀을 뒤늦게 마리안느에게 고백하며 유산을 하고자 한다. 그녀가 누구에 의해서 임신을 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소피의 임신은 그 자체로 상징화 되어 있다. 말하자면 소피의 임신은 억압적인 시대의 부산물이다. 엘로이즈 어머니의 억압으로 이를 드러내지 못하던 소피는 그녀가 떠나자 이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마리안느가 소피에게 처음 시킨 일은 달리기이다. 엘로이즈의 달리기와 같이. 억압을 벗어나 자신만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 자신만의 힘으로 유산을 하고자 했던 소피는 결국 한 여성의 집으로 찾아가 유산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실패나 한계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만이 아닌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서 시대의 억압을 이겨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산이 끝난 뒤 한 아기가 옆에서 그녀를 위로하듯이 얼굴을 만진다. 영화는 끝까지 소피의 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소피의 임신이 상징적이 듯이 소피의 아기도 상징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처럼 실체가 없다. 그리고 소피는 그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임신. 마치 원하지 않았던 그림과 같은.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는 그림처럼. 반면 그 옆에 아기는 실체가 있다. 아기의 부모가 어떤 전사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기의 산모가 스스로 원했던 아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아기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의 죽음을 위로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소피에 대한, 혹은 죽은 아기에 대한 비윤리적인 접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소피의 아기는 실체가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생명력 또한 없다. 얼굴 없는 여성의 초상화가 스스로 불에 타기를 원했던 것처럼, 엘로이즈의 언니가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그 아기도 죽음이 최선의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생명력이 없는 존재를 홀로 책임지는 것은 자신의 생명력과 활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소피는 이에 저항한다. 대신 옆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과 연대 한다. 그리고 이를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 뒤 그림으로 그 순간을 남겨둔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곧 한 순간을 영원화 하는 것이다. 그림에 남겨지는 순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영원히 자신에게 남는다. 그리고 이는 엘로이즈의 초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영원화하는 것이다. 이때 이상한 모순이 발생한다. 마리안느가 그리는 초상화는 분명 엘로이즈와 결혼할 밀라노 남자에게 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그림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위한 그림으로 바뀌게 된다. 그림의 의미가 바뀌었다. 이러한 의미 변화는 두 인물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능동적인 사랑. 그 사랑의 활력이 초상화와 영화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처음 마리안느가 섬에 들어올 때 그녀를 바다에 빠트린 파도, 엘로이즈가 수영을 하기 전까지는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와 바다. 그때 바다와 파도는 두 인물에 대한 억압으로 상징화 된다. 그러나 엘로이즈 어머니가 떠난 후 해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때의 거친 파도는 두 인물의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상징으로 변화한다. 또한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내던 저택과 섬은 두 인물의 사랑이 진행되면서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여성들이 등장하고 억압의 세계가 아닌 자유로운 세계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계속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 이 불에도 두 인물의 사랑의 감정이 상징화 되어 녹아 들어간다. 물과 불. 대비되는 두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절대 같은 위치에 있을 것 같은 않을 두 가지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마치 모델과 창작자처럼.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은 여성간의 사랑처럼. 의미는 홀로 만드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드는 것이다.


5. 바라보고 응시하는 그들의 행위는 이미 널리 알려진 신화의 의미에서도 변화를 가져온다. 세 인물은 둘러앉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읽는다. 그리고 곧 오르페우스가 뒤돌아 본 이유에 관하여 열띤 토론을 펼친다. 소피는 오르페우스가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를 변호한다. 마리안느가 볼 때 오르페우스가 뒤돌아 본 이유는 사랑 대신 추억과 예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 보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마리안느는 응시의 주체를 오르페우스로 본다. 이때 뒤돌아 보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주체적 행위인 동시에 에우리디케를 예술을 위한 뮤즈로 대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관점에서 응시의 주체는 먼저 뒤돌아 볼 것을 제안한 에우리디케이다. 그렇다면 에우리디케는 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엘로이즈의 해석에서 죽음과 삶은 관계가 뒤바뀐다. 신화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현세로 데려온다. 그때 신이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 보지 말라고 한 이유는 과거의 추억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에우리디케와 살아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에우리디케는 이미 저승의 사람이고 생명력이 없다. 또한 과거의 추억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포기하라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에우리디케에게 현세로 복귀하는 것은 삶이 아닌 또 다른 죽음일 뿐이다. 마리안느의 말처럼 오르페우스가 추억을 선택했다면 에우리디케 역시 추억을 선택한 것이다. 이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예술과 추억을 위한 대상이 아닌 오르페우스와 함께 추억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뒤돌아보는 것은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아닌 삶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얻고자 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알려준 뮤즈와 창작자 사이의 관계와도 일치한다. 에우리디케의 죽음은 엘로이즈 언니의 죽음이나 얼굴 없는 초상화의 죽음, 그리고 소피의 아기의 죽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엘로이즈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뒤돌아 봤을 때 자신을 바라봐 줄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엘로이즈 언니가 죽은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그때 함께 있었던 소피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두 인물이 함께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서로 바라본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는 이별을 피할 수 없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엘로이즈 어머니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마리안느도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사랑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처럼 도망치듯이 돌아가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말한다. “뒤돌아봐”. 그리고 뒤돌아보는 마리안느. 두 인물은 무의미한 삶 대신 의미 있는 죽음을, 후회 대신 추억과 사랑을 선택한다.



6.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의 장면을 제외하면 두 개의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추억하는 플래시백과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전시회 시퀀스. 전시회에서 두 인물은 직접 대면하지는 못한다. 대신 각자의 예술을 통해서 서로와 마주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그림을 통해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어설프게나마 연주했던 음악을 통해서. 여기서 예술 작품과 대면하는 것은 그것에 담긴 영원한 추억을 마주하는 것이다. 추억은 예술을 매개로 한다. 이때의 추억은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재의 상태이지만 예술은 현존한다. 이 영화에서 예술은 부재하는 추억의 현존 방식이다. 즉 예술의 존재 의미는 부재하는 추억을 대체하면서 이를 현존 시키는 것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의 예술 작품을 대면할 때 존재하지 않고 있던 것이 추억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이는 영화의 존재론과도 같은 맥락을 지닌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은 허구이며 부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허구의 시공간에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며 자신들의 (욕망이 아닌)충동을 해결하고자 한다(라캉에게 있어 ‘욕망’과 ‘충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마리안느의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상은 현재 부재하는 존재에 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이 마리안느에게는 회상을 통해서, 관객들에게는 플래시백을 통한 영화를 통해서 현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엘로이즈의 유령에게도 나타난다. 마리안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유령을 두 번 보게 된다. 드레스의 하얀 원색은 엘로이즈가 모델로 있을 때 입는 초록색 드레스의 원색과 대비된다. 어찌됐든 엘로이즈는 결혼을 해야 하고 사랑의 시간을 끝날 운명이다. 엘로이즈의 유령은 마리안느의 그러한 불안감과 한계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볼 수 있다. 유령은 분명 현존하지 않는, 즉 부재하는 존재이다. 그 부재하는 유령이 지금 마리안느와 관객의 눈앞에 서 있다가 사라진다. 유령이 사라진 후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찾아간다. 마리안느의 불안감은 미래에 관한 것이지만 현재 부재하는 것에 관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또한 엘로이즈의 유령은 부재하는 존재의 현존이라는 점에서 예술 작품의 의미와 유사하다. 마리안느가 유령을 통해 엘로이즈에게 가는 것은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엘로이즈의 유령은 곧 실재화 되어 현존하다는 것이다. 엘로이즈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원치 않는 결혼을 준비한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떠나던 마리안느는 뒤돌아보라는 엘로이즈를 바라본다. 뒤돌아보는 순간 부재하던 유령의 형상은 눈앞에서 분명히 실재한다. 엘로이즈는 그 자리에 분명히 있다. 이제 실재하는 존재가 부재하는 존재가 될 차례이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추억 속에 자리잡는다. 동시에 엘로이즈의 추억 속에도 마리안느가 영원히 남게 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추억하는 방식이 그림이라면 엘로이즈는 음악을 통해 마리안느를 추억한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 옆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제외하고) 단 두 번 등장하는데 셀린 시아마는 이 장면들을 마치 꿈결과 같이 찍었다. 처음 음악이 등장하는 순간은 축제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노래를 부를 때이다. 그때 엘로이즈의 옷에 불이 붙고 두 인물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이 순간 억누르고 있던 두 인물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연주를 바라보며 마리안느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영화는 환상처럼 담아낸다. 두 장면의 공통점은 영화 내적인 음악이 아닌 영화 외적인 음악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축제 장면에서 여성들은 분명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그 노래는 외부에서 삽입된 음악처럼 들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오직 음악만이 흐른다. 관객은 마리안느의 환상을 함께 느낀다. 환상은 또 다른 형태의 영화이다. 그렇기에 환상의 시간 동안 마리안느는 관객들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마리안느는 자신의 사랑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추억과 마주하는 것처럼. 엘로이즈에게 불이 붙은 이후부터 두 인물은 육체적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비록 두 인물이 직접 마주보지는 못하지만 마리안느는 영화를 통해서, 엘로이즈는 음악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서로를 바라본다. 엘로이즈에게는 불 대신 눈물이 찾아온다. 그 다음 장면은 없다. 두 인물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연주되고, 그림이 그려지고, 영화가 상영되는 한 예술을 통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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