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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Feb 29. 2020

기생충과 복수는 나의 것

움직이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차가운 고찰

*이 글에는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전에 쓴 기생충 리뷰와 겹치거나 변화된 내용이 있습니다. 



0. 동익은 동진이 될 수 있을까? 두 인물의 공통점. 모두 칼에 찔려 죽는다. 그 둘에게 칼을 찌르는 이들은 누구인가? 모두 대신 복수해주는 인물들이다. 동익은 근세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기택에게, 동진은 영미가 속한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작고도 크게 보이는 우연. 물론 두 인물이 처한 상황과 맥락을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질문을 좀 더 밀고 나아가 보자. 만약 동익의 딸 다혜가 혹은 아들 다송이가 동진의 딸 유선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렇다면 동익은 동진처럼 행동할까? 나의 궁금증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완전히 달리 보이는 두 영화에서 왜 이런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가? 물론 이 작은 우연만을 가지고 두 영화를 얽는 것은 무모하고도 무의미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 대한 나의 묘한 동질감은 떨쳐내기 어려웠고 이런 비평적 호기심을 풀어내기 위한 글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글은 그러한 호기심의 해소를 위한 가볍고도 얕은 결과물로 봐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1. 봉준호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분열되지 않는다. 내부의 갈등은 조금씩 있을지언정 그 갈등은 곧 풀리고 그 자체로 가족을 해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족의 해체를 막으려다 비극이 일어나는 경우는 있다(<마더>).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는 대부분 인물의 죽음인데 이 죽음은 가족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외부의 물리적 개입이나 그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에서 비롯된다(대표적으로 <괴물>). 봉준호의 가족은 그 자체로 인물이 속한 세계이자 운명 공동체이다. 인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가족은 분열된다. 죄의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자살하기도 하고(<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가족을 직접 해체시키기도 한다(<박쥐>와 <아가씨>에서는 억압을 피해서, <스토커>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따르기 위해 가족을 떠난다). 봉준호의 가족이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식처라면, 박찬욱의 가족은 그 자체로 부조리투성인 경우가 많다.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봉준호 세계에서 인물은 어떤 사건이든 가족과 함께 하고 박찬욱 세계에서 인물은 가족 몰래 어떤 사건을 만들어낸다. 즉 봉준호의 인물은 공동체로서, 박찬욱의 인물은 개인으로서 움직인다. 이때 나타나는 세계관이 차이.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고,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혹은 개인이 세계와 충돌한다. 그렇기에 주제적으로도 봉준호는 거시적 주제를, 박찬욱은 좀 더 미시적인 주제를 다룬다. <기생충>은 어떠한가? 모든 봉준호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봉준호스러운 영화가 있다면 아마도 <기생충>일 것이다. 주제적으로나 내러티브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봉준호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런데 <복수는 나의 것>은 어떠한가? 박찬욱은 복수 3부작 이후 주로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박쥐>도, <스토커>도, <아가씨>도 가족으로부터 인물이 벗어나는 이야기이다(물론 가장 최근작인 <리틀 드러머 걸>은 가족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 않는다). 복수 3부작이 최근작들과 가장 다른 점은 가족이 분열될지 언정 신성시 된다는 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사건들은 가족에 대한 사명감에서 비롯되고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복수하는 이유도 누나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와 제니의 관계도 이상적인 모녀 관계로 묘사된다. 이 차이는 무엇을 만드는가? 가족이라는 세계. 이 세계가 그곳에 속한 구성원과 싸우는 것과 다른 세계와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가족 내부의 갈등과 사건은 그 세계 안에서만 유효한 사건이다. 그곳에 다른 세계가 개입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싸우는 것은 그 영향이 확장된다. 세계 간의 충돌. 이때 이를 지켜보는 근원적 세계, 즉 봉준호와 박찬욱의 세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 하나는 방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세계는 개입하지 않고 우연의 영향 아래 사건을 지켜보는 것.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개입. 특정 원리로 작동하는 세계가 그 원리를 따라서, 혹은 원리의 회복을 위해 사건에 개입하는 것. 봉준호와 박찬욱은 후자의 방법을 택한다. 세계는 두 미시 세계 간의 충돌을 지켜만 보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 방법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혹은 같은 방법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다. 



2. <기생충>에는 총 네 번의 파티가 등장한다. 기택 가족의 반지하에서 두 번, 동익 가족의 대저택에서 두 번. 이 파티들은 뒤로 갈수록 규모가 커진다. 그러나 규모가 커질수록 따라오는 비극의 크기도 함께 커진다. 네 번의 파티에는 모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반지하 파티에서는 취객이, 대저택의 거실에서 벌이는 파티에서는 문광이, 정원에서 열리는 다송이 생일 파티에서는 근세가 끼어든다. 왜 이런 유사한 구조가 나타나는가? 첫 번째 파티를 돌아보자. 소박한 상차림과 함께 기택 가족이 축하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집 와이파이를 쓰던 시절을 지나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와이파이와 기우 핸드폰의 재개통. 상차림이 소박하니 축하하고자 하는 이유도 소박하다. 드디어 건배를 하고자 하는데 갑자기 창문 앞에 취객이 나타나 노상방뇨를 한다. 충숙과 기정의 불만을 들어보니 꽤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기택은 이를 막을 생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막을 수 없다. 기택 가족의 파티는 신분 상승을 축하하는 자리이다. 공짜 와이파이가 아닌 우리 집만의 “쏟아지는 와이파이”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부터 취업난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취업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까지. 그럴 때마다 창문 앞에서 취객이 소변을 본다. 이 취객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반지하라는 위치. 기택 가족의 사회경제적 위치.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기택 가족의 자리는 바로 그곳이다. 파티 이전에는 기택 가족의 노동이 있었다. 피자 박스를 접는 부업부터 동익 가족의 집에 취업하는 것까지. 여기에는 기생이 없다. 오로지 노동력과 임금의 교환을 통한 공생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공생을 통해 얻은 결과로 기택 가족은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세계는 다시 이들을 끌어내린다. 취객은 기택 가족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는 것이다. 현재 당신들의 위치를.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있어야 할 위치를. 마치 거대한 중력처럼. 이를 알기에 기택도 취객을 내쫓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순환 방식이다. 왜 이런 순환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봉준호의 세계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두 세계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어떤 충돌?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의 충돌. 두 세계는 공생은 가능하나 같은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 하층 계급이 상승을 시도하면 세계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이들을 끌어내린다. 물론 상층 계급의 하강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순환에 진짜 불청객이 찾아온다. 교환학생을 위해 잠시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민혁이 기우에게 자신의 자리를 제안한다. 기우에게 수석을 선물하면서. 이 수석. 그저 평범한 돌덩어리에 의미를 붙여 탄생시킨 “상징적인” 돌. 물 속으로 가라앉는 다른 돌들에 비해 이 수석은 물 위로 떠오른다. 마치 부력이라도 있듯이. 중력과 부력. 서로 다른 두 개의 힘. 기택 가족은 드디어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중력에서 구해줄 부력을 찾았다. 여기서 기택 가족의 욕망이 피어나고 세계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3. <기생충>이 철저히 가족 서사를 다룰 때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류 개인의 서사를 다룬다. 신부전증을 앓는 누나를 고치고 싶어하지만 류의 혈액형이 달라 신장을 이식할 수 없다. 병원에서 나온 뒤 홀로 야구를 하는 류. 그 쇼트 안에서 류의 표정은 누군가를 죽일 듯이 독기를 품고 있다. 이 내제된 폭력성. 마치 기우의 욕망과 같은. 이 폭력성이 밖으로 발산하지 않도록 억눌러야 한다. 가족 내부에서, 혹은 세계가 정해놓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가족 외부의 세계. 합법적 시스템 외부의 세계. 청소부가 흔적을 지우는 그 세계에 류가 발을 들인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보편적 윤리와 이성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익만을 위한 비합리성과 폭력만이 존재한다. 사기를 당한 뒤 전재산과 신장을 잃은 류 앞에 기적처럼 기증자가 나타난다. 마치 류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류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이다. 이 세계의 방법이 아닌 외부 세계의 비합리성과 폭력성. 이 방법을 끌고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제안하는 사람은 류의 애인 영미이다. 영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우선 그녀는 사상이 불명확한 인물이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에 속한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조직은 국가도 모르는 실체 없는 조직이다. 또 그녀는 “미군 축출”과 “재벌 해체”를 외치는 공산주의자로 보이지만 유선을 납치하는 계획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철저한 자본주의식 논리를 펼치며 공산당을 무찌르자는 내용의 노래까지 부른다. 그러나 영미가 화폐의 흐름을 강조하며 그런 논리를 펼치는 것은 그때뿐 이다. 이건 영미가 류를 자신의 계획에 동참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류는 천천히 외부 세계에 물들여진다. 영미에게 정말 이상한 점은 동진을 미행한 뒤 류가 영미를 찾아갈 때까지 한번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류를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 인물이 정작 돈 가방을 받을 때, 류의 누나가 유괴를 눈치채 자살한 후 류가 누나를 묻기 위해 강으로 갔을 때, 유선이 강물에 빠져 죽을 때는 옆에 없다.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류가 누나와 함께 있다. 이때 류에게 작동하는 논리는 영미의 논리가 아닌 세계와 가족 내부의 논리, 합리성과 이성의 논리이다. 영미가 류의 누나와 한 프레임에 담기는 장면은 영미가 고무줄 놀이를 하며 유선과 함께 놀 때인데 이때 영미는 공산당을 무찌르자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영미의 논리와 누나의 논리는 공존할 수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있기 위해서는 한 쪽이 자신의 본심을 숨겨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기어코 영미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류의 누나는 사라져야 한다. 왜 류를 설득하지 않는가? 류가 유괴를 계획한 이유는 누나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영미의 논리로 누나를 살리는 것. 외부 세계의 논리가 가족의 논리에 개입하는 것.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영미에게 이 유괴는 착한 유괴이지만 누나에게는 아니다. 유괴는 유괴이다. 이를 종합하여 다시. 영미는 도대체 누구인가? 답은 한 가지. 영미는 그 자체로 외부 세계의 논리이자 류의 초자아이다. 영미라는 초자아와 누나라는 초자아. 공존할 수 없는 두 초자아 중 하나가 사라졌다면 류는 영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폭력과 비합리로 작동하는 세계. 이제 그 세계만이 류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그때가 돼서야 류는 영미와 섹스를 하게 된다. 



4. 두 영화의 비극은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흐름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신분 상승에 대한 환상과 잠재된 폭력성의 발현. 그 흐름을 깨기 시작하면서 세계도 균형과 질서를 되찾고자 이들에게 개입하기 시작한다. 봉준호의 세계는 어떻게 개입하는가? 기택 가족은 동익 가족의 집에 성공적으로 취업한다. 분명 그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세계는 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택 가족은 분명 노동력을 제공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그 자리에 누가 있는지는 동익 가족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아직은 공생의 논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기택 가족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들에게는 아직 파티를 할 때마다 창문 앞에서 소변을 보는 취객이 있다. 이 강력한 중력. 여전히 세계는 기택 가족을 끌어내리며 순환한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은 방법은 하나이다. 끊을 수 없다면 회피해야 한다. 동익 가족이 캠핑을 가고 텅 비어있는 대저택. 그 집에서 기택 가족이 세 번째 파티를 연다. 좀 더 화려해진 술상과 함께. 이건 공생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아무 노동도 없이 사치를 부리고 있다. 그것도 고용주의 집에서. 기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세계에서 기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봉준호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저녁 8시 55분. 문광이 대저택에 나타난다. 그리고 지하실과 근세의 존재가 알려진다. 한 가지 의문. 봉준호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동익 가족을 집으로 보내는 선택.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때 불가항력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또 다른 세계, 사법권을 배제하기 위해서. <기생충>과 <복수는 나의 것>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법권의 영향이 최소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법권이 개입할 경우 세계는 순환을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세계의 의무는 기택 가족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객보다 더 강력한 중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광과 근세 부부이다. 근세는 어딘가 기택을 닮은 구석이 있다. 대만 카스텔라 사업을 했다가 파산한 경험. 기택과 근세 세대는 알만한 모스 부호. 동익에 대한 존경심까지. 기택도 점차 근세의 지하실에 매혹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기택은 근세가 되기를 거부한다. 근세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곧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충숙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광은 충숙에게 한번의 기회를 준다. 아주 적은 돈이라도 받고 근세를 보살펴 주는 것. 그렇게만 되면 공생이 가능하다. 하지만 충숙이 이를 거부한다. 문광과 공생하는 것은 같은 계급, 즉 불우이웃에 속하는 것이다. 충숙은 불우이웃이 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다. 문광이 기택 가족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두 기생충이 싸우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동익 가족의 집이 엉망이 되자 세계는 동익 가족을 불러들인다. 계곡물을 불려서. 동익 가족은 자신들이 속하면 안 되는 곳에 갔다. 그들도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동익 가족이 돌아와 사태가 정리된 후 충숙을 제외한 기택 가족은 폭우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 어마어마한 물방울들. 방금 전까지 창문 너머로 여유롭게 바라보던 비가 자신들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이전에 이러한 물을 본 적이 있다. 두 번째 파티에서 취객을 쫓기 위해 뿌리던 물. 그때 기택이 뿌린 물은 취객이 아닌 기우를 덮쳤다. 여기서의 물은 곧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정화? 세계의 순환을 회복하기 위한 정화. 들어오면 안 되는 곳에 들어온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화. 취객은 불순물이 아니다. 그러니 기택 가족은 그를 정화할 수 없다. 대신 본인들이 불순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폭우로 씻겨 내려간 불순물들이 아래로 모인다. 이 구정물은 기택 가족의 반지하를 집어삼킨다. 기택 가족을 처벌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화장실에서는 변기가 역류하고 있다. 문광이 지하실에서 구토하면 변기에서 더러운 물이 역류한다. 공생을 거부한 대가는 그대로 기택 가족에게 돌아온다. 세 번째 파티가 앞선 두 파티와 다른 점은 선행하는 행위에 대한 결과가 아닌 미래에 나타날 결과의 원인으로서 작동했다는 점이다. 인과관계의 도치. 이건 공생과 기생의 차이와 같은 맥락이다. 기택은 깨달았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을.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 세계의 순환을 받아들이는 것. 기택 가족은 반지하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기우는 아직 수석을 버리지 못했다. 수석의 부력을 다시 따라가려는 기우. 그 수석과 욕망에서 새로운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5. 기택 가족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올 때 류는 영미의 세계로 완전히 들어간다. 그리고 딸을 잃은 동진 또한 그 세계로 발을 들인다. 류가 죽은 유선을 바라보던 그 위치에 동진이 있다. 박찬욱은 본격적으로 이 둘을 엮기 시작한다. 자신을 속인 장기밀매단을 죽이려는 류와 자신의 딸을 죽인 류를 죽이려는 동진은 교차 편집으로 엮인다. 이제 그들에게 합리성과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무자비한 폭력의 인과율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영미에게 조종당하던 류는 이번에는 영미를 이용하여 장기밀매단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들의 신장까지 씹어 먹는다. 내제되어 있던 폭력성은 완전히 밖으로 발현된다. 그 시각 동진도 류의 뒤를 쫓는다. 동진은 최 반장에게 전 재산을 건네고 함께 류를 추적한다. 이제 동진은 더 이상 상층 계급이 아니다. 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낮춰야만 한다. <기생충>과 같은 전략. 상층과 하층을 충돌시키지 않고 하층과 하층을 충돌시킨다. 상층 계급은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진의 죄의식은 이 세계의 작동 방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외부 세계의 논리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낮춘다. 그래서 자신이 해고한 팽 기사의 아들의 보호자까지 자처한다. 류를 추적하던 중 류의 누나가 묻힌 강가까지 도달한 동진 앞에 뇌성마비 환자가 나타난다. 이 이상한 인물. 류가 누나를 묻을 때 유선의 목걸이를 훔치려다 실패하고 유선이 죽은 뒤 목걸이를 가져간 뒤 동진 앞에 목걸이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는 뇌성마비 환자답지 않은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류의 차 번호와 색깔까지 알려준다. 너무나 절묘한 우연의 일치. 박찬욱은 왜 이 인물을 만들었는가? 그건 봉준호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기생충>에서 취객과 문광 부부는 기택 가족을 원래의 위치로 끌어내리기 위한 인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뇌성마비 환자도 동진에게 류와 영미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이 인물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왜 동진에게 모든 걸 알려주는가? 류와 영미는 죄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장기밀매단이 죄값을 치루는 것처럼. 그때부터 세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봉준호가 문광과 근세 부부를 개입시킨 것과 같이, 박찬욱도 같은 전략을 사용한다. 류에게 다가가던 동진은 영미에게 도착한다. 영미는 동진의 전기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류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정말 그만큼 류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보다 영미는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영미가 류의 초자아였지만 지금은 관계가 뒤바뀐 상태이다. 류가 영미를 조종한다. 그때부터 류는 영미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이다. 류는 영미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영미가 살게 된다면 동진과 영미를 벌할 사람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인과율에 문제가 생긴다. 영미와 동진도 어떻게든 그 죗값을 치뤄야 한다. 그렇기에 세계가 영미의 입을 막고 영미는 입을 열 수 없다. 대신 자신의 조직 이름을 대며 동진에게 경고한다. 동진은 그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 조직은 경찰조차 알지 못하는 그런 조직이다. 물론 박찬욱은 때가 되면 이 조직을 동진 앞에서 보여줄 것이다. 이제 동진과 류 모두 죗값을 치뤄야 한다. 남은 것은 여기서 박찬욱의 세계가 어떻게 이 둘을 벌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6. 두 영화는 모두 비극의 막바지를 향해 나아간다. <기생충>은 대망의 네 번째 파티를 앞두고 있다. 일요일 아침. 연교가 기택 가족을 대저택으로 부른다. 그날은 분명 쉬는 날이다. 노동을 해서는 안 되는 날에 노동을 요구한다. 분명 명분은 다송이 생일 파티를 즐기는 것이지만 이건 일이다. 기생의 관계가 뒤바뀌었다. 이번에는 동익 가족이 기택 가족의 노동력에 기생한다. 그때 기택 가족은 김 기사도, 제시카도, 케빈도 아니다. 세 번째 파티와 마찬가지로 이번 파티도 뒤이어 나타날 결과의 원인으로서 작용할 것이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래쪽에서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다혜와 방에 있던 기우는 수석을 들고 지하실로 향한다. 수석이라는 부력. 수석이라는 죄의식. 기우는 어제의 사태에 대한 강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기우의 욕망으로 상징되던 수석은 이제 기우의 죄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이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진이 그렇듯이 한 층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중력을 벗어나 수석의 부력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젯밤 계단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수석을 놓친 기우. 그 수석으로 근세가 기우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제 수석에는 부력이 없다. 수석은 그저 돌덩어리일 뿐이다. 더 이상의 부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세는 기택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하는가? 자식이라는 존재. 근세와 기택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만드는 자식의 존재를 없애야만 한다. 그것이 개인의 복수심보다 우선하는 의무이다. 기우와 기정을 제거하고 근세는 충숙을 죽이고자 하지만 충숙은 아직 동익 가족의 가정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니 충숙은 죽일 수 없다. 오히려 충숙에게 칼을 찔리고 근세가 죽어간다. 이 혼란의 현장을 기택이 혼란스럽게 바라본다. 죽어가는 딸과 아들. 자신을 부르는 동익. 죽어가는 근세까지. 기택은 선택해야 한다. 김 기사로서의 길과 기택의로서의 길. 이때 동익이 이 선택에 개입한다. 근세가 깔고 앉은 차 키를 꺼내려는 순간 근세의 냄새에 코를 막는 동익. 그 냄새. 어젯밤 동익과 오늘 아침 연교를 불편하게 한 가난의 냄새.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각에 연연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기택의 현재 겉모습은 김 기사이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출 수 없는 기택의 모습, 반지하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냄새로 근세와 기택은 일순간 하나가 된다. 이제 김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택은 근세로부터 이어받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비어있는 근세의 자리. 지하의 자리. 그 자리는 비어 있으면 안 되는 곳이다. 기택은 그 자리를 채워야만 한다. 또 다른 의무. 기택은 충숙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놔야 한다. 충숙은 아직 동익 가족의 가정부로서 존재한다. 그 껍데기를 없애고 원래의 충숙으로 그녀를 데려와야 한다. 따라서 충숙을 가정부로 만드는 동익의 존재가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가 원래의 순환을 회복할 수 있다. 세계는 필요할 경우 상층 계급의 희생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상층 계급 자체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딸을 죽인 칼로 동익을 찌르는 기택. 이 거대한 모순. 어떠한 상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 선택. 여기에 상식은 필요 없다. 그리고 자유의지 또한 없다. 그저 세계의 질서 회복이라는 거대한 명분과 그에 따른 결정론만이 존재한다. 기택도, 동익도, 그리고 다른 모든 인물들도 세계의 계획을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의무를 마친 기택은 본능적으로 근세의 지하실로 향한다. 이제 기택은 가장으로서 모든 짐을 짊어지고 근세의 자리로 향한다. 덕분에 사법권은 충숙과 기우를 처벌하지 않는다. 드디어 세계가 순환을 회복했다. 다시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다만 약간의 위험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기우가 죽지 않고 눈을 떴다. 이제 기우도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듯 수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우에게는 욕망의 씨앗이 남아있다. 지하실에서 아버지가 보낸 모스 부호를 받고 다시 계획을 세우는 기우. 어쩌면 기우가 눈을 뜨고 있는 한, 기택이 그 지하실에 있는 한, 이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기우의 곁에 차디찬 겨울과 어둠만이 있기는 할지라도 말이다. 


7. 봉준호의 세계가 질서를 회복했으니 박찬욱의 세계도 질서를 회복할 차례이다. 류는 영미의 죽음을 알게 된 후 동진을 죽이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자신의 거처에서 자고 있는 동진을 발견한 뒤 창문을 넘어갈 듯 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꾼다. 그런데 문에는 함정이 있었고 류는 전기 충격으로 기절한다. 그 창문은 분명 충분히 열려 있었다. 그런데도 류는 창문이 아닌 문을 선택하고 동진에게 사로잡힌다. 두 인물 중 먼저 죽어야 하는 인물은 류인 것이다. 동진이 먼저 죽는다면 류를 죽일 만한 인물이 부재하다. 그렇다면 세계는 질서를 회복할 수 없다. 기절한 류를 안으로 끌고 온 동진은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류를 죽이는 일만이 남았다. 그러나 동진에게도 아직 사적 감정보다 중요한 의무가 남아있다. 다음 날 류를 끌고 유선이 죽은 강으로 향하는 동진. 두려움에 떠는 류 앞에서 동진은 이런 말을 남긴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영화의 첫 대사는 무엇이었는가? 라디오에서 퍼지는 류의 사연.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이지요”. 유선이 죽은 뒤 최 반장과 대화할 때 동진의 말.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착하다는 것. 그것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면죄 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착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내려지는 처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진은 류의 아킬레스 건을 끊고 유선처럼 류를 익사 시킨다. 일을 마친 동진에게 병원에서 전화를 건다. 팽 기사의 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동진은 더 이상 아이의 보호자가 아니다. 모든 사태가 끝난 이상 동진은 다시 원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봉준호와 같이 박찬욱도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번 그 위치에 내려간 이상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동진을 처벌할 것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영미의 조직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난다. 국가조차 알지 못하는 그 조직. 그들이 동진을 죽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영미를 살해한 대가로 재판부 전원의 합의로 동진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재판부 전원 합의로 사형 선도까지 하는 그 조직을 왜 국가는 그동안 몰랐던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왜 박찬욱의 세계는 그때 그 조직을 개입시키는가? 동진은 지금까지 외부 세계의 논리로 움직인 인물이다. 외부 세계의 논리로 움직인 인물은 당연히도 외부 세계의 논리로 처벌해야 한다. 그러니 박찬욱의 세계는 동진을 처벌하기 위해 또 다른 외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영미가 호언장담 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세계. 실재하지 않는 그 세계를 실재하도록 만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한번 외부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다시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동진에게는 오로지 폭력의 인과율이 지배하는 외부 세계의 논리만이 있다. 그러니 동진도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찾으며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세계의 작동 방식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제 박찬욱의 세계도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박찬욱의 세계가 창조한 영미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도 사라질 시간이다. 


8.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동익은 동진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비극. 하층과 하층 간의 다툼. 인물의 자유의지를 묵살 시키는 세계의 개입까지. 두 영화는 분명 유사한 점이 꽤나 많다. 그러나 유사한 지점이 있더라도 두 영화의 방향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기생충>은 위로 향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이지만 <복수는 나의 것>은 아래로 향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기생충>의 세계는 어떻게든 인물들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지만 <복수는 나의 것>의 세계는 이 세계를 벗어난 인물들을 가차없이 버린다. <기생충>이 결정론적인 작동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인과율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기생충>의 인물들은 언제나 가족에 속해 있고 가족과 함께 움직이지만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가족이 행위의 원인이 될지언정 철저히 개인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봉준호 세계에 속한 동익이 동진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영화를, 두 감독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두 감독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언정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래쪽의 세계.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바로 이 세계. 근세와 영미가 함께 있는 그 세계를 두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두 영화가 봉준호와 박찬욱 각각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어둡고 차가운 것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자유의지는 없다. 아니, 있어도 그것은 비극의 원인이 될 뿐이다. 결정론이 되었든 인과론이 되었든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 그 차가운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두 영화가, 혹은 예술 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두 예술가의 시선을 더 깊이 따라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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