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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an 22. 2023

육체라는 언어, 언어의 운동

샹탈 아커만-<잔느 딜망>

서론. 새로운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에 결심을 유예하기 바빴다.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에 대한 갈등. 고민을 지속하던 중에 모두가 새해 결심을 하는 시기가 왔고 나 역시 그것을 핑계 삼아 불완전한 시작을 하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연재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주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힘이 닿는 데까지 나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한 영화에 대한 긴 비평 대신 당신과 이 영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추천사를 써 내려갈 예정이다. 주로 내가 쉽게 다루지 못하는 영화들, 비평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 나의 언어로 승화하기 어려운 작품들,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 그 체험을 공유하고 싶은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혹시 아직 보지 못했을 이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이 이 여행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2022년에는 시네필이라면 한 번쯤은 주목했을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10년마다 발표되는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역대 최고 영화 100편의 목록이 갱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12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이 이전까지 굳건하게 1위를 지키던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을 밀어내고 새롭게 1위를 기록했다는 것이 주목받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 다시 한번 1위가 바뀌었다. 지난 리스트에서는 36위를 기록했던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이 1위를 차지했다. 아마 이 변화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결과에 대해 영화적 완성도가 아닌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운 기괴한 결과라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페미니즘 미학이 본격적으로 빛을 보는 계기로 평가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리스트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샹탈 아커만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리스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걸작 <잔느 딜망>을 알려지고 보게 되기를 바라는 입장일 뿐이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곧 여성의 육체를 찍은 영화이다. 여성이라는 육체. 그 육체 안에 내재되어있는 고통. 하지만 그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이미지의 힘을 빌어오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육체는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이자 그 자체로서 현현하게 존재하며 어떠한 다른 언어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샹탈 아커만의 영화에서 음성은 남성의 언어이지만 육체는 여성의 언어이다. <나, 너, 그, 그녀>에서 남성의 성적 경험은 오로지 음성의 언어를 통해서만 묘사되지만 줄리의 섹스 신은 아무런 음성도 없어 육체의 움직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통스러운 쾌락. 줄리의 섹스 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섹스의 엑스터시가 아닌 이 격렬하고 간절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가질 수 없다는 절망이다. 샹탈 아커만의 유작 <노 홈 무비>는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그녀에 대한 어떠한 연대기적 설명이나 이미지의 몽타주를 빌어오지 않는다. 대신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어머니의 육체만을 바라보고 그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을 황량한 평원의 이미지에 있는 힘을 다해 투사한다. 변증법을 거부하는 이미지들. 그녀의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는 그 자체로 온전하게 존재하며 어떠한 남성적 언어와 형식을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미학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들 간의 상호작용이 아닌 이미지 자체에 다가가기 위한 시간이다. <나, 너, 그, 그녀>에서 롱테이크로 촬영된 섹스 신. <노 홈 무비>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찍은 오프닝. 그리고 200분이 넘는 <잔느 딜망>의 러닝 타임.


영화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집에서 가사 노동과 매춘을 하는 잔느 딜망의 일상. 낮에는 시장을 본 뒤 아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매춘을 하며 돈을 번다. 하지만 <잔느 딜망>은 일상성을 담은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을 해체하며 잔느 딜망을 억누르는 억압의 실체를 그녀 스스로 마주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끝에 가서 마주하는 잔느 딜망의 선택. 그녀에 대한 가장 큰 억압은 불합리한 제도나 선입견 자체가 아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굴레이다. 일상을 체화하는 육체. 육체의 운동. 끊임없는 반복. 하지만 이 반복은 곧 동일성을 해체하는 움직임이 된다. 잔느 딜망은 어느 순간부터 평범하게 느껴지던 일상에 낯선 기운을 감지한다. 매일 마시던 커피의 맛도, 아들을 위해 하던 요리도 낯설어지는 순간. 이 낯선 감정은 어떤 사건이 만들어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동일성의 와해. 반복의 중단. 그 중단에 끝에서 잔느 딜망은 스스로 차이를 만든다. 이 선택을 마주할 때 누군가는 이 선택을 온전히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떠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곧 샹탈 아커만의 정치적 선언이다. 샹탈 아커만은 이 여성의 육체와 삶을 3시간이 넘게 보여주었다. 이미지에 다가서기 위한 시간.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그럼에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은 여성의 고통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감내한 육체. 그 육체의 이미지. 샹탈 아커만은 우리에게 스크린과 프레임을 넘어서 그 이미지의 실체와 직접 마주하기를 권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강렬하게 명령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여성의 삶과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자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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