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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Feb 05. 2023

모든 것이 담겨있는 그 쇼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여행자>


안토니오니의 최고작을 <여행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완성된 1970년대 역시 안토니오니의 최전성기가 아닐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정사>와 <밤>, <태양은 외로워>, <붉은 사막>, 그리고 <욕망>이 연달아 만들어진 1960년대야말로 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여행자>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쇼트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거칠지만  마디로 정의하자면 (無) 향한 로드 무비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영화  인물들은 이미 각자의 방식대로 일상과 삶에 균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시라는 공간과 도시인이라는 실존 방식의 가면을 통해 숨기고자 노력한다.  가면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 벗겨지고 인물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얼굴은 무엇인가? 고독한 실존의 초상.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들의 얼굴. 안토니오니 영화들은 그렇게 모든 실존적 토대가 분해되고 해체되며 어느 순간 어떠한 규정성도 사라진  완전히 추상화되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안토니오니 영화들의 엔딩은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보일지언정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다. <정사> <> 마지막  . <태양은 외로워> 공백과 단절의 공간들. <욕망>에서 지워지는 인물.


1975년 발표된 <여행자>는 1960년대 그의 걸작들에 비하면 비교적 따라가기 쉬운 영화이다. 서사는 좀 더 할리우드식의 대중적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하고 주인공으로는 잭 니콜슨과 마리아 슈나이더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누가 보더라도 안토니오니의 스토리이다. 영화 속 데이비드 로크는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던 도중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발견하고 그와 신분을 바꿔치기한다. 실존의 권태. 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하지만 타자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환상을 넘어서 그 삶의 어두운 이면까지 모두 체화한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그렇게 타자의 자리에 감과 동시에 자신이 예상치 못한 타자의 이면을 마주하는 데이비드 로크의 여행을 쫓아간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여행자>가 그저 안토니오니의 여러 영화 중 한 편으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영화에 완전히 매료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롱테이크를 보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기를 바란다) 침대에 누워있는 데이비드 로크. 카메라는 그를 옆에서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의 앵글이 약간 높아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프레임에 살짝 걸쳐있는 듯한 느낌이다. 정면에는 창문을 막고 있는 철창이 보인다. 그 상황에서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움직인다. 창문 바깥에서는 여러 풍경들이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카메라는 철창을 넘어 창문 바깥으로 나간다. 경찰들이 숙소에 나타나고 데이비드의 방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데이비드를 본다. 카메라는 창문 바깥에서 이 모습을 들여다본다. 안토니오니는 이 과정을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테크닉으로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쇼트는 내게 있어 영화가 기적을 연출한 몇 안 되는 순간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 나는 아직까지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롱테이크를 만나보지 못했다. 마치 우주의 삼라만상을 품고 있는 것만 같은 쇼트. 아니 어쩌면 카메라가 삶의 흐름에, 더 크게는 우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것만 같은 순간. 여전히 나는 이 쇼트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찰나에 느낀 황홀함에는 어떠한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최고작은 언제나 <정사>이다. 최고의 엔딩은 <태양은 외로워>의 엔딩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최고의 쇼트, 더 나아가 지금껏 마주한 최고의 쇼트를 말한다면 망설임 없이 <여행자>의 이 롱테이크를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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