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산드로 알론소-<도원경>
영화사적으로만 보았을 때 20세기가 21세기보다 위대한 시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19세기말에 발명되어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문법과 산업을 갖추어 나갔다. 영화가 온전하게 보낸 (현재까지) 유일한 시기. 그러면서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많은 거장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걸작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니 일부 시네필이나 평론가들이 20세기를 그리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시기.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람하며 그 시절의 공기를 체감할 수 있었던 시기.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순히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비극 때문만은 아니다. 대신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만약 제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수많은 거장들을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20세기 관객들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 관객들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을 보지 못할 것이고 페드로 코스타를 놓쳤을 것이며 리산드로 알론소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이름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21세기 영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면 이 이름들일 것이다. 내게 있어 이들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영화적 완성도만이 아닌 그들의 영화가 선사하는 영화적 체험과 감각은 곧 21세기 영화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태국 정글. 페드로 코스타가 담아내는 육체의 빛과 어둠. 리산드로 알론소의 아르헨티나 평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카메라. 영화가 내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체험.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을 보았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는 다른 두 이름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리산드로 알론소가 처음부터 <도원경>과 같은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니다. 첫 장편영화인 <자유>에서는 숲과 도시를 오가는 남자를 건조하고도 집요하게 따라간다. 여기에서 리산드로 알론소는 숲이라는 공간 안에서 고독이라는 형태의 자유를 누리는 인물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러다 <판타즈마>에서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여행하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극장이라는 공간을 추상화시키고 신비롭게 바라본다. 이때부터 그의 영화에서는 인물 자체보다는 인물이 속해 있는 공간과 풍경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한다. 인물의 눈에 담기는 세계의 낯선 이면. 리산드로 알론소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눈과 하나가 되어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감각을 전달한다. <리버풀>에서 설원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의 황홀한 감정. 이 순간 황량한 설원의 풍경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연옥처럼 보인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리산드로 알론소는 특별한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는 오로지 인물과 풍경만이 전부이다. 그렇기에 리산드로 알론소의 영화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띤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적지 없는 로드 무비. 말 그대로 길을 찍은 영화. 길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향한 여정. 그 정점에 있는 영화가 바로 <도원경>이다.
<도원경>의 시작은 마치 서부극을 떠올리게 한다. 리산드로 알론소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는 꽤나 명확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고 영화의 주인공은 비고 모텐슨이 맡았다. 군나르는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던 시절 아르헨티나를 식민 정복하기 위해 덴마크에서 파견된 장교이다. 그러다가 그의 딸 잉게보그가 젊은 군인과 사랑에 빠져 그와 함께 도망치고 군나르는 그들의 뒤를 쫓아간다. 세계에서 사라진 여성. 그 여성을 찾으러 간 아버지. 누가 보더라도 웨스턴, 그중에서도 존 포드의 <수색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서사. 하지만 군나르는 존 웨인이 아니다. 세계를 구해내는 영웅도 아니다. 그의 딸 잉게보그는 인디언에게 납치된 나약한 여성이 아닌 스스로 아버지의 세계에서 도망친 주체적 여성이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되찾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군나르는 자신보다 더 거대한 세계 앞에서 굴복하는 것만 같다. 어떤 세계?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눈으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세계. 그 자체로서 온전하게 존재하는 남미의 대지. 리산드로 알론소는 영화 속 평원의 풍경에서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을 서서히 지워나간다. 그러면서 군나르에게 이 거대한 평원은 자신의 통념과 인식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공간으로서 나타난다. 영화의 어떤 지점, 군나르는 동굴에서 어떤 신비로운 여성을 만난 후 평원으로 다시 나온다. 어떤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에게 영화 바깥의 내레이터가 묻는다. “무엇이 우리 삶을 작동시키는가?” 그 순간 군나르가 대답한다. “모르겠어.“ 이 경이로운 장면. 이 순간 영화 속 아르헨티나의 평원은 완전한 추상성을 얻으며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영화 속 허구와 영화 바깥의 현실이 함께 공존하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은 분명 21세기 영화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이다. 식민주의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이러한 점에서 <도원경>은 분명 같은 아르헨티나 감독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자마>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자마>에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식민주의자들의 인식 체계를 적극적으로 교란하는 방식으로 공격한다면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은 그러한 시선과 인식을 하나씩 해체해 가며 자신의 세계가 지니는 신비로움을 드러낸다. <자마>와 <도원경>은 각자의 방식으로 걸작이다. 다만 나에게 더 황홀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 쪽은 틀림없이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