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Mar 17. 2023

인간의 이름으로

고바야시 마사키-<할복>


어떤 일이든 간에 오랫동안 지속하다 보면 매너리즘과 자만에 빠지는 건 누구나 다 비슷할 것이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조차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이 정도면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고전 일본 영화들을 몇 편 챙겨본 후 그 정도면 중요한 영화들은 모두 보았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안심했다. 그 당시 내가 보았던 영화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이라 불리는 영화들, 그러니까 <라쇼몽> 이후의 영화들이 있었고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최대한 많이 보았다. 거기에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들과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이 전부였다. 물론 이 이름들이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일본 영화를 다 안다는 듯이 생각한 것은 지금 보면 너무 편협하고 오만한 판단이었다. 그런 나를 일깨워 주려는 듯이 어느 날 갑자기 고바야시 마사키가 다가왔다.


처음 만난 고바야시 마사키 영화는 <할복>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영화는 고미카와 준페이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인간의 조건> 3부작이었다. 아마도 고바야시 마사키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3부작. 태평양 전쟁 당시 휴머니즘을 지키고자 하는 남자의 투쟁. 그때 고바야시 마사키는 비극 앞에서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신 어떻게 휴머니즘은 역사 앞에서 실패하는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 질문은 고바야시 마사키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질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바야시 마사키는 언제나 휴머니즘의 실패를 바라보면서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하였다. <인간의 조건> 3부작은 분명 뛰어난 연작 영화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고바야시 마사키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내가 진정한 고바야시 마사키의 정수를 만난 것은 <할복>을 보게 된 이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할복은 명예를 중요시 여겼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불명예스러운 삶을 거부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관습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두 명의 사무라이가 할복을 위해 한 귀족의 집에 방문한다. 하지만 두 사무라이는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할복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할복의식은 성공한다. 대상은 거부함에도 치러지는 의식. 의식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퍼포먼스. 여기에는 인간의 자리가 없다. 오직 관습에 복종하는 의식의 퍼포먼스만이 공허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의식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의식에서 사무라이는 관습의 이름에 굴복하여 결국 스스로 할복하지만 두 번째 의식에서의 사무라이는 할복을 하려는 도중 의식을 주최하는 집안이 이를 막아서고 이내 자신들의 손으로 사무라이를 타살하고자 한다. 스스로 중단되는 의식. 여기서 의식은 그 공허함을 드러내고 관습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린다. 그 자리에서 휴머니즘은 이름뿐인 관습과 제도에 맹렬하게 질문한다. 당신들이 말하는 관습에 인간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계 앞에 선 개인의 실패, 영웅의 실패를 다룬다면 고바야시 마사키는 이념의 실패를 바라본다. 당신의 감상을 망칠 수 있기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할복>에는 분명 고바야시 마사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제의식. 러닝 타임 내내 흥미를 이끌어내는 스토리텔링과 플롯의 구성. 그리고 흑백 화면을 통한 미장센. 이 모든 것들은 나를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할복>은 분명 걸작이고 이제껏 본 가장 뛰어난 일본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할복>을 접하면서 비로소 오만하고 편협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여전히 영화의 세계는 내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다양하다는 것을. 이것은 그 후 고바야시 마사키의 또 다른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괴담>을 보았을 때도 느낀 감정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고바야시 마사키조차 내가 완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다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의 영화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건 오즈 야스지로도, 미조구치 겐지도, 나루세 미키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두 편 밖에 보지 못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이름만 들어보고 본 영화는 한 편도 없다. 오시마 나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 오늘도 나는 그렇게 조금씩이나마 배워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를 낯설게 감각하는 카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