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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Sep 23. 2020

시니컬한 유머와 오만

아베 코보의 <타인의 얼굴>을 읽고








<타인의 얼굴>을 읽을 수록 내 안의 오만이 자꾸자꾸 들킨다. 그가 오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만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머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자기 입으로 오만함을 인정하며 시니컬한 웃음을 구더기로 뒤덮인 면면에 띄우고 말하니 나도 덩달아 웃고 만다. 매니악하지만, 웃기다.



그는 아내와 '부부'라는 사회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다. 가면 제작과 타인의 얼굴로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려는 기괴한 행위에 아내도 책임이 있다고, 당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오만함. 심지어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가보니 모두가 가면을 쓴다는 심오하고도 철학적 발견 앞에 감화되어 기뻐하는 한 명의 소외된 인간은 당연히 오만해진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왔을 때의 첫 희열같은 것이리라. 사람이기에 그렇다. 얼굴에 아무리 구더기가 끓어도, 가면을 써도, 거대한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외톨이가 된다는 두려움. 몸과 정신은 실존해있어도 존재가 희미해져 잊혀진다는 슬픔. 두려움과 슬픔은 사람을 생존 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벼랑으로 내몬다. 그런데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이 저 혼자가 아니라 세상이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는 것을 알면 유레카를 외치는 과학자가 되고 갓 태어난 새가 되어 금방이라도 날 것처럼 날개짓을 하지 않겠는가.
















허영과 오만. 이 감정들이 나빠서 쫓아야하는 악마적인 감정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다만 알고 있다. 나도 오만한 면모가 있어 자꾸자꾸 들어야 한다. 타인의 말을, 상대방의 눈빛을, 당신의 눈물을, 그대의 기쁨을, 네 증오의 원천을. 듣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성이 높은 사람이라 함은 자의식이 높은 사람이라, 지치는 순간이 있다. 쏟아내느라 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런 날은 글도 써지지 않는다. 지칠 때마다 직시한다. '듣기'를. '듣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안다. 상대방이 얘기하는 동안 또 내 언어가 머리를 떠다니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고양이가 문득 멈춰 다리를 한 짝 올려 기다리듯. 생각이라는 스위치도 on도, off의 모든 행위를 정지시키고 듣는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은 대단하다 못해 위대해 보인다.


어느 날은 오롯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부러워 질투가 났다. 그가 아내에게 질투하듯이. 그도 아내를 범함으로써 '남편'이자 '남자'라는 자신의 주체와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하는데 오히려 끄떡 않는 아내에게 질투하지 않는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담하고 자연스럽고 시원시원했다. 그러니까 여느 때의 신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야말로 당신다운 당신이었다.'(258p)에서 말하듯이 아내는 그가 가면을 쓰든, 붕대를 감든, 폭발 이전의 남자이든, 아내는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질투와 두려움에 자아보다 타인으로 가득 채운 그가 시원하게 한 방 먹인 아내의 쪽지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하다. 그는 위험하다. 자꾸 금기를 어기고 날 것의 눈빛으로 증오를 품고 있기에. 그럼에도 그의 언어를 만날때마다 웃게 된다. 오만하지만 오만하지 않은 시니컬한 유머러스함에.


 '내 목표는 오히려 좀 더 다른데 있었나 변명하려 한 것이 오히려 족쇄가 채워진 꼴이 된 치한의 개념'(189p)


위의 글처럼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지 않는다. 금기를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금기를 숨기지 않음으로써 가면을 긍정하는 경험은 분명 날개의 근육을 키우는 그 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한 발상과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다. 아내의 쪽지 전엔 살해와 강간은 높은 이상향에 맞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 말하고 싶다. 굳이 공기총을 들고 아내를 쫓지 않아도 됐다. 벼랑 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악이었다고 하더라도 세 권의 노트를 꽉 채울 만큼의 깊은 고찰의 흔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 후회하기 시작하'(212p)는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는가. 그래서 일반인은 행하지도 못할 화학 지식으로 가면까지 만드는 실행력을 가졌다. 아내가 말했듯이 스스로의 노트 세 권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아내보다 먼저 거울을 필요로 하길 바란다. 발끈하는 당신에게 한 번 더 말한다. 당신 덕에 나의 오만함을 깨달았고, 깊이 공감했던 사람으로써. 특히 당신이 아무 일이 없어야 쓴다고 하고 쓰는 행위를 업신여기듯 말하고 멈췄는데, '쓰는 작업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197p) 말에 크게 공감하고 깊이 마음에 새긴 사람으로써 말한다. 당신의 세 권의 노트는 충분히 고무적이다. 소외감에 몸부림쳤던 한 사람으로써 말한다. 비슷한 소외감을 가진 사람이 더 깊은 통찰력과 고집과 집착으로 자아와 타인에 대해 고찰하며 쓴 이 세 권의 노트는 충분히 위대했다. 공기총을 들고 나가지 않고 당신이 다시 읽었다면 알았을 것이다.


자, 이젠 당신이 말한대로 하자. '두려워하지 말고 불을 끄자.'(197p) 담벼락 너머를 한 번 경험했으니 성채에 누군가를 가둘 필요 없이 당신 스스로 자유로워지길 바라며. 흑인의 손을 잡는 백인과 황인처럼, 얼굴 없는 자의 손을 잡는 당신을 만나면 완고히 낙관하며 오만한 어깨를 기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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