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얼어 붙은 호수가 녹아 웅덩이를 출렁이고 있었다. 오리가 웅덩이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머리를 담궜다 뒤로 당겼다. 날개에 묻은 물기를 털고 정수리에서 흐르는 물방울을 떨궜다. 녹지 않은 얼음 덩이가 오리의 옆구리를 쳤다. 차가워보였다. 겨울 나절처럼.
12월 초부터 멈추었던 산책을 재개했다. 목표는 한 달 동안 60km. 나이키 런 앱에서 안내하는 AI 목소리를 들으면서 신음했다. 매번 산책을 끝나고 나면 으음, 산책. 미운데 좋네. 하고 중얼거렸다. 왜 이리 산책이 밉살스럽고 황홀할까.
유진 목 시인은 <산책과 연애>에서 말한다. 격렬한 산책은 기분을 압도하고 몸을 정화하며 인간을 제압한다고. 격렬한 산책을 하다 보면 생각할 겨를이 없어지고 새로운 감정에 따라 걸음이 바뀐다고.(70p) 새벽 네 시에 감동한 독자는 오전 열 시에 격렬한 산책을 다녀 왔다. 400미터를 겨우 조깅하면서 겨울에 짓눌린 체력을 실감했고, 잃었던 사랑을 되찾았다. 차가워진 귀 끝과 퍼렇게 혈관을 보일 정도로 뛰는 심장과 몸 곳곳을 알아차린다. 공기에 이마를 밀어 넣고 허벅지를 바짝 세우기 위해 배에 힘을 주느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무아지경과 몰입의 기쁨과 사랑이다.
“산책은 비로소 사유하는 인간을 길 위로 인도한다”.(71p)
그는 격렬한 산책을 말한 직후에 ‘그러나’라는 접속사 없이 천천히 속도가 느려진 걸음을 말한다. 역접의 접속사를 그리고라는 연결의 접속사로 대신하지 않는다. 뒷 맛이 남지 않는 담배 같은 생략이다. 담배 피는 사람들이 그러더라. 뒷 맛이 남지 않는 깔끔한 향과 맛의 담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담배를 한 번도 피워보지 않았으니까. 무책임한가. 영원히 모르고 싶다. 카더라라는 용어로 담배를 비유들어 남발하고 싶다. 뒷 맛이 깔끔하다던 어느 담배 같은 생략이라고.
사유하는 사람은 산책하는 사람이라면 깨닫는 사람은 관객이다. 산책과 삶을 논하는 사람이 아닌 산책에 대해 말하는 유진목 시인의 책을 논하는 글을 쓰는 관객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진 후 깨닫는 사람이 되어본다. 그가 나보다 더 지혜롭고, 자살도 해보았고, 자살을 실패하고 남겨질 뻔한 사람의 곁으로 다시 돌아와보았고, 고양이가 밟은 문자를 지우지 않은 에세이를 냈다. 관객에게도 종류가 있다. 영화를 본 것인지 애매한 관객. 열렬한 관객. 보지도 않고 페미니즘 영화 혹은 책이라고 꺼리는 관객. 감독과 기술적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너드'한 관객. 나는 그 중에 어떤 종류의 관객인가.
'너드'하고 열렬한 관객이다. 그의 책을 읽고 자살 충동을 조금 줄여보고, 산책을 나가보고, 고양이가 밟은 문자를 지우지 않고 원고를 보내보는 기함을 부려보기도 하고, 자신이 뭣도 아닌 것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뭣도 아니여서 시도를 했으니까. 그의 글이 새로워서 어제의 나보다 조금 새로워질 수 있다면 깨달음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금 또 고양이가 밟고 지나갔다. 올해 여덟 살 고양이, 그의 이름은 나루다. 나루는 비켜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자 발을 슬쩍 떼었다. 상냥하고 자상한 나루.) 유진 목 시인은 그저 글을 썼을 뿐이다. 밀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기함도 부리고 기도 펴보고 하며 관객이길 즐기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산책을 좋아하기로 하는 것도, 고양이가 밟고 간 흔적을 지우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02
과연 자의에 의한 선택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왜 산책을 미워하는지 쓰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넓고 관객인지 긴가민가한 관객도 넘쳐난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 그 영화 어땠어라고 물어보면 그냥 뭐...라고 말 끝을 흐리는, 관객인지도 의심스러운 관객이 있고, 그것을 볼 때마다 약간 실망의 한탄을 한다. 영화는 보지도 않고 팝콘 맛만 기억하는 관객도 있다. 넓은 세상에 긴가민가한 관객말고 조금씩 새로운 관객이 되어보고 싶었다. 어제의 그냥 좋았어라는 관객이었던 나에서 조금 새로워진 관객이고 싶은데, 관객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동 학대 기사를 접한 후에야 울면서 글을 쓰는 관객 말고. 산책을 하는 글을 읽고 나서야 산책을 재개하는 관객 말고. 세상에는 오로지 나만의 것은 없다. 하나 빠짐없이 빌려오는 것이다. 음계 하나, 숨 하나, 육체 하나, 땅과 고기와 바다와 물. 모두가. 세상의 관객으로 있으면서 관객으로 만족할 수 없을 때 산책이 미워진다. 산책과 삶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때 산책이 미워진다. 풍경이 미워진다. 너무도 꽉 차고 너무도 내 표현을 웃도는 감각들이 밉살스럽다. 조금만 덜 아름답지. 조금만 덜 황홀하지. 왜 이렇게 예뻐서는 예쁘다는 말로는 성에 안 차게 하느냔 말이야. 앙상한 나뭇가지. 목을 휘감는 찬 바람. 얼얼해진 귀. 얼어붙은 호수. 얼음 위로 번쩍이는 햇살. 날개짓하는 오리들. 패딩을 입고 힘차게 걷는 중년의 여성들, 남성들. 패딩을 입은 강아지들. 강아지 목줄을 잡은 패딩 입은 여자, 남자. 산 저편으로 넘어가는 해. 봉숭아물보다 금방 물들고 금방 사라지는 노을녘. 다음 날 아침에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욱씬거리는 전신. 온갖 것을 더 다채롭게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산책과 자신이 미워진다.
산책을 함께 하고픈 이를 만났을 때도, 미워진다.
언니들, 나의 사랑하는 언니들을 격한 리액션으로 조금 복돋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음에 한탄하면서. 예술이란 이름으로 감히 사랑을 해보려고 하고. 포기하지만은 말자는 마음으로 다음 날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미미하고 소소하고 덧 없어 보이는지. 언니들과의 대화로 실감하고 깨달으며 소중하고 황홀하여 미워진다. 언니들의 언어와 유진목의 언어를 조합하여 쓰는 이 글이 단연 신문에 기고할만한 내용이거나, 책으로 낼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 깨닫는다. 밉다, 가도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
수 십 번 깨달음이 각개적으로 찾아와 수 십의 관객으로 자아분열한다.
03
산책이 밉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좋으면서 미미한 산책이 괴롭고 즐겁다. 과연 밑바닥까지 긁어갈 때 버틸 수 있을까. 각오 없이 부러 미미한 산책만을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객이길 그만두는 순간 사랑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표하고, 두 팔 벌려 피켓을 올리다가도 부서져야 할 텐데.
각오가,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나.
산책에서 자의라는 것은 오로지 걸음 걸이의 지속 시간과, 속도와, 힘과 간격이다. 그들의 일부분을 끌어와 첫 발을 떼는 데 사용했으면서, 부지런하시네요. 멋지시네요. 와 같은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은 오만같고 가증스럽고 징그럽기까지 하다. 미미한 걸음이 마땅찮고 이게 맞나 의심이 들고 느려진 발걸음 사이로 들어오는 사유의 시간이 문득 지겨운 사람들이 떠오르고. 산책하며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고. 묻게 되고, 자신을 독려하기 위해 풀죽은 창작자를 독려하는 수 많은 피드들을 탐색하는 나에게서 벗어나서 풀죽어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고. 내가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음에 화들짝 놀라고. 돌진하고, 밀쳐지고, 다시 포옹하고 싶고.
밉고 미운 미미한 산책.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미미한 산책.
미미하고 소소하고 지속되는, 산책
*
제목 <산책>. yewon 언니의 시선, 언니가 그려준 산책.
이 글은 유진 목 시인의 <산책과 연애>, 섀도우를 예쁘게 바른 minzy 언니와의 대화, 시선을 나눠 그림을 그려준 yewon 언니와의 대화에 영감을 얻어 나온 글이다. 관객으로써 그들을 영화로, 이야기로 향유하고 깨달은 글이다. 언제쯤에야 관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미미하게 새롭게 만들어 준 minzy 언니에게, 자신의 시선을 나눠 준 yewon 언니에게, 그리고 유진 목 시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