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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Jan 07. 2021

정인이와 게이브리엘

살리기 위한 힘.





01



지하철을 탔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신발을 바라봤다. 컨버신발끈이 복숭아 뼈 윗부분까지 묶여 있었다. 신발끈이 부족해질때까지 동동 교차해있었다. 그의 신발끈을 보면서 정인이를 생각했다. 작디작은 아이를. 폭력 앞에 무감해진 아이를. 고통조차 말하길 포기한 뒤통수를. 끝까지 동동 여맨 신발끈을 보면서, 정인이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음을 상기했다. 끈이 짧아 양 끝을 각각 돌려 묶어 놓은 신발끈정인이의 마지막럼 외로웠다.


2020년 3월에 <게이브리엘의 죽음 :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글을 쓴 적이 있다. 6화를 보는 내내 울었고, 글을 쓰면서도 울고, 히끅거리며 잠을 잤다. 아이의 아픔과 아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와 사라진 아이의 목소리를 대신 채우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우리가 정인이를 그것이 알고 싶다로 세세히 알게 된 것처럼.


정인이와 게이브리엘의 사건은 비교할 수 없다. 앞서 말해두지만, 학대를 하는 가해자에 대한 패턴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절대 동일할 수 없다. 정인이와 게이브리엘이 겪은 두려움, 스트레스는 절대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요인은 무엇인지 분석할 수 있다.


두 아이의 사건은 유사점이 있다. 사회 편견과 사회 기관 시스템 허점이다. 두 아이의 사건으로 우리의 거대한 싱크홀 같은 허점이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한 회당 정해진 분량적 한계로 이 부분에 대해 더 파고들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게이브리엘의 죽음>에선 세세하고 명백히 파헤친다.





02



첫 번째로, 아동복지기관에 상주하는 직원들마다 배정되는 가구와 아이들의 숫자이다. 숫자로만 세상을 말할 수는 없으나 한 사람당 맡은 아이들의 숫자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된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준다. 한 사람이 한 아이, 혹은 가정 폭력을 겪어내는 한 가정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적게는 여덟 많게는 수십 명까지 담당해야 한다.


두 번째, 교육 시간과 교육의 질이다. 아이를 가정에서 데려 온 후에 보호해줄 위탁 가정과 그 위탁 가정과의 지속적인 소통, 아이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 등등. 가정 폭력과 학대 아래에서 구하기 위한 교육도 물론 그 이후에 대한 교육까지 고려해야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현실로 두어야 하는가!


의사도 본과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등 점점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쳐간다. 어째서 단 몇 시간의 교육으로 아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학대 상황에 놓인 아동의 행동 패턴, 아이의 심리 상태, 아이의 몸 상태 등에 대한 심화된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한 의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낸 책을 보며 교육하고 공부해도, 정인이와 게이브리엘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사회적 편견이다. 사실 편견은 편견이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우리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언어와 행동과 눈빛을 지배하는 것이 편견이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학대는 저지르지 않을 거야.' '게이니까 고쳐주려고 한 거야.' '아이의 기질이 이상한 거야.' '정신과 치료 받은 적 있는 사람은 아이를 키우면 안 되는 거야.' 등등.


말은 생각의 뿌리와 맞닿아 있고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다. 은연하고 은밀하다. 사람은 시대를 살아간다. 시대는 변화하며 영원하다. 사람은 유한하다. 유한한 사람들은 시대에 비하면 미세한 미트콘드리아 같다. 시대가 이데올로기를 띄울 때, 그 속에서 사람은 같은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편견을 학습하고 당연한 것으로 굳는다. 가정 내의 상황이 아닌 아이의 기질만이 전부였던 시대. 성소수자를 병자로 여기던 시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정의 내리던 시대. 우리는 시대 앞에 개별성의 기립력을 가지고 있는가. 시대 앞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가. <게이브리엘의 죽음>에서 게이브리엘의 사건을 맡은 검사, 하타미 검사는 말한다. 아이를 게이라고 부르며 학대한 상황을 보고, 이에 성소수자를 향한 증오 범죄가 아닌 고의성을 가지고 아이를 살해한 1급 살인으로 기소한 이유에 대해.


"아이가 죽어가는 마당에 게이인지 아닌지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정인이를 생각해보자. 아이가 아프다. 아토피가 있는가. 그러나 아이가 아프고, 발진이 생기며, 멍이 들고, 야위고, 죽어가는 마당에 아이의 기질이 무슨 상관인가. 아이의 기질이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 아이의 독특한 성질 의 받 권리박탈 유가 되는. 아이가 서서히 말라가고 죽어가는데 병원을 감으로 인해 학대 가해자로 몰린다고? 아이가 죽어가는데 평판이 무슨 소용인가. 아이를 살리는 일과 사회의 시선이 무슨 연관인가.


편견은 시대의 그림자에서 생각의 뿌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편견은 사랑 앞에 힘을 잃는다. '편견 따위, 사랑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어라 말하든, 사랑하는 아이가 건강히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편견을 다시 그림자로 돌려보내야 한다. 돌려보내기만 할까. 사랑으로 편견을 그림자에서 추방할 수 있다.  


네 번째, 아이들의 몸 상태이다. 위에 말했듯이, 고통은 절대 동일할 수 없다. 고로 아이들의 외상적인 특징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다른 사건이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는 절대 이 난제를 풀 수 없다. 개별적이기에 다양하고 같은 결을 가졌으므로 연대할 수 있다.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데 흩어지도록 하면 힘을 잃는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 '함께'라는 힘을. '동일'에 대한 집착이 아닌 '공동'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아이들의 몸에 난 생채기를 보라. 상처를 보라. 상흔을 보라. 야윈 몸을. 사라진 웃음을. 잃어버린 언어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는 팔과 무기력한 등을 보라. 아이들은 목소리를 잃으면 몸으로 말한다. 아이들의 몸. 우리가 보아야 할 신발끈이다.





03



서로 만나 묶 신발끈이 있고 각자 묶여 있는 신발끈이 있다. 당연하지 못한 신발끈. 당연하지 못한 죽음. 지난한 고문의 시간 끝에 당연히 찾아올 죽음과 죽음도 망설일 만큼 작은 아이. 유치원 시시티브이 속에서 정인이는 배가 볼록해있었다. 어른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유치원 선생님들은 잘못이 없다. 단지 죽음이 망설인 것이다. 데려가기엔 너무 작아서.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는 아이여서. 그것은 학대자에게는 참회의 기회였고, 정인이에게는 삶과 사랑을 되찾을 기회였다.


살아가며 만날 첫사랑과 좌절과 다시 만날 사랑과 희망. 초년과 중년과 노년의 삶. 자동차를 타보기 전에 자전거를 타는 아침. 전동 킥보드가 무서워 중간에 내려보는 일. 복숭아를 껍질 채 깨무는 일. 강아지를 쓰다듬고, 안고, 고양이와 친해져 보는 일. 돌담 위에 올라가다 손에 난 생채기. 친구와의 다툼. 좋아하는 유튜버와의 만남을 꿈꿔보는 일. 이 모든 사랑과 행복. 사랑을 꿈꾸는 밤. 사랑을 미워하는 새벽. 사랑을 되찾는 오후. 정인이와 게이브리엘이 당연히 겪었어야 할 많고 많은 사랑들. 이 사랑들을 빼앗은 자는 누구인가. 방관한 자는 누구인가. 아이들의 마땅하지 않은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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