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심플 Dec 03. 2020

당신의 전투력이 상승하였습니다

나는 태어나 적어도 25년은 평화주의자로 살았다. 선천적인 성향인 듯 하다. 어릴적부터 갈등, 싸움, 불화는 내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내 앞에는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착한 딸", "착한 학생", "착한친구".

그런 내가 결혼 9년차,  쌈닭이 되었다.
사실 결혼 초 남편과 싸우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리고 늘 마음속으로 위안했다. 내가 할말을 참고, 양보하고, 화내지 않은 덕분에 가족의 평화가 지켜졌다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몇해가 지나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이성적인 남편은 나의 눈물공세에도 마음이 움직이긴 커녕 오히려 나를 답답해 했다. 싸움을 참고 참아도 돌아오는 건 혼자 이불덮고 잠든 싸늘한 남편의 뒷모습뿐.
나 혼자 데스노트나 진배없는 일기를 몇년째 써내려간들 달라지는건 없었다.
그렇다. 맞써 싸워야 했다.

천생여자, 태생적 평화주의자라도 아들셋과 남편, 도합 네 남자와 상대하려면 없던 전투력이라도 생기기 마련.
나는 지난 8년, 육아로 많은 것을 얻었다. 15키로짜리 아이를 번쩍번쩍 드는 스테미너를 얻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낮고 단단한 소리를 얻었다. 사람많은 곳에서 눈빛만으로 말썽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얻었다. 제각각 개쌩난리인 세녀석 속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마인드컨트롤 능력을 얻었다.
이 모든 능력을 힘입어 이젠 나도 남편과 싸운다. (읭?)

처음 내가 용기를 낸 날, 나는 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훈훈한 마무리따위를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현재의 내 기분과 내 생각에 충실하기로 했다. "될대로 돼라"와 "ㅇㅇ(내이름)은 참지않긔"만을 마음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마구 질렀다.

사실 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슬픔"과 "눈물"로 표출되는 사람이었고, 남편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화"와 "소리지르기"로 표출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화와 소리지르기를 시전한 것이다. 불꽃같은 충돌이 지나가고 결과는 예상치 못하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심히 놀랐다. 싸워도 괜찮네? 내가 화를 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구나? 싶었다.
심지어 남편에게는 눈물공세보다도 같이 화내기가 더 잘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남편의 언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해서 말이 통한 걸지도 모른다. "화"의 언어! 내가 2개국어를 구사하게 된 것이다!(응?)

왜 어릴때부터 싸우지 말라고 세뇌를 시키는가! 싸우는 생활을 시작한 후로 내 인생이 달라졌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올라갔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내 심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자 오히려 상대방은 쉽게 이해했다. 그리고 나 역시 나 자신을 지키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때론 치열하게 싸우다 내가 잘못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건 그것대로 의미있었다. (졌잘싸)


나는 오늘도 잘 싸웠다. 이제 다리뻗고 푹 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