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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심플 Nov 20. 2020

 처음 안녕!

신혼의 끝, 새로운 시작

 처음은 설레는 단어다. 하지만 나는 처음이 싫다.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나는 처음 특유의 불안함이 싫다.
 몇 안되는 인생 이불킥 감 사건들은 대개 그 처음에 일어난다. 어리숙함으로 인한 실수도, 새로운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투도.

 새내기 당시, 복학생 포함 전 학년 학생들이 듣는 200명 남짓 교양시간에 한 발표는 생각할때마다 없는 이불도 걷어차게 만든다.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아무런 지식없이 새하얀 바탕에 검정 굴림체로 만든 파워포인트.
 불행하게도 발표자료만 부실한 게 아니었다.   

 발표하는 내 목에선 염소소리가 고, 프로젝터 리모컨을 든 손 역시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 남편과 만날 때 내가 했던 철없는 불평, 사랑이란 이름 아래 하던 집착과 그게 몰고 온 싸움들 역시 떠올리면 낯부끄럽다.
 물론 나도 그 시절 그의 어리숙함과 미숙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시절은 이제 그만 덮어두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찍이 결혼해 곧이어 아이 셋을 낳아 막내까지 아기티를 벗게 된 올해, 나는 마치  "처음"처럼 불안정한 시간을 겪었다.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에 없던 미움의 감정이 나를 삼켰고, 육아에 있어서의 회의감이 나를 덮쳤다. 아주 지랄맞은 한해였다. (총평)

 나는 생각했다. 마치 사춘기, 갱년기 같은 시간이었다고. 그러자 결혼 선배들이 그랬다.

 그게 "권태기"라고. 좀 늦은 편이라나? 듣고보니 맞는 것 같다.
 남편이 아주아주 좋던 하트뿅뿅 신혼에서 아주아주 싫은 권태기가 오더니, 요즘은 그저 남편을 남편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사람의 좋은 점 안 좋은 점 가감없이. 이제야 이 사람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던 욕심은 사라지고,

나의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공통관심사에 대해 종종 이야기 나눈다.

 "늘 같이"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
 그게 서글픈 게 아니라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래도록 남편에게 의지해 왔다.

 남편도 아이도 나를 외로움으로 부터 구원할 수 없다는 걸 이젠 받아 들인다.

 인생은 원래 외롭다. 그래도 가족이 있어 덜 외롭다.


 이켜보니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지난 9년도 멀리서 보면 '신혼'으로 퉁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시간들을 한데 묶어 보내주려 한다.
그리고 '신혼' 그 다음이 뭔지는 또 한번 비슷한 시간이 지나봐야 알게 되겠지만, '신혼 그 다음시기'의 처음을 맞이하느라 올 한해가 그토록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믿어 본다.

 남편, 아이들과 달콤살벌했던 시간들.
 처음이 가진 미숙함으로 실수하고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그리고 처음이 가진 순수함으로 많이,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내 또 한번의 처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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