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니 살아 내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든다. 출근길 저상버스에 타서는 ‘왜 저 넓은 자리를 좌석도 없이 비워놨대? 휠체어 자리인가?’, ‘요즘은 장애인들도 버스 많이 타나 보지’ 하는 대화를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집중을 돌려본다. 난민 관련 기사에는 ‘너희 나라로 꺼져’라는 댓글이, 성소수자 관련 기사에는 ‘소수자의 인권만 인권이냐? 다수자의 인권도 중요하다. 성소수자를 안 볼 권리도 지켜달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더 답답해지기만 한다. 커피 한잔하려는데, ‘○○ 프로그램을 봤냐’며 TV에 나온 인종차별 발언이 그저 우스갯소리로 소비된다. 이렇게 지치는 하루를 마칠 때쯤이면 늦은 귀갓길에 탄 택시의 기사가 ‘아가씨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결혼은 했느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애를 낳아야지 나이 더 들면 결혼도 출산도 못 한다’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해도 반갑지 않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나만 불편한 건가? 훌쩍 여행을 떠나면 좀 나아질까싶지만 코로나19로 여행도 쉽게 갈 수 없으니 없던 힘마저 빠지는 것 같다.
대체 감수성이 뭐길래
문화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사회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국제인권선언을 준수하는 것부터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 이러한 법이 잘 실현되도록 하는 것 등을 말한다. 동시에 ‘문화다양성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문화다양성 감수성, 인권 감수성, 젠더 감수성, 평화 감수성. 수많은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며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감수성은 무엇일까? 법을 잘 만들고 이성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문화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을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감수성’이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이다. 곧 문화다양성 감수성은 문화다양성의 시각으로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데에 예민한 이들이 있고, 감수성이 결여되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 문화다양성의 시각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외부 세계를 느끼는 방법 중 하나인 ‘낯설게하기’를 먼저 살펴보자.
러시아 형식주의의 주요한 문학적 수법에서 시작된 이 개념은 ‘일상화되어 친숙하거나 반복되어 참신하지 않은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여행을 떠나는 날의 아침을 떠올려보자. 눈을 뜨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출근길 대중교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렸던 집 앞 골목은, 여행을 떠나는 날엔 왠지 달라 보인다. 들뜬 마음으로 골목을 걷다보면 구석에 핀 꽃도 발견하게 된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 구름도 보고 동네 고양이와도 눈인사를 나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익숙한 것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매일매일이 똑같던 일상은 한순간에 여행의 나날로 바뀐다.
문화다양성의 시각, 관점은 낯설게하기와 비슷하다. 문화다양성의 가치 실현을 위해서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원래 꽃이 피었나?’ 하는 새로운 발견처럼 익숙한 주위를 낯설게 느끼며 살펴보면, ‘이 건물에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경사로가 원래 없었나?’, ‘비상상황이 되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피난안내방송이 준비되어 있나?’, ‘종교적 이유나 개인 신념의 이유로 특정 식재료를 먹지 않는 이들은 위한 메뉴가 이 식당에 있나?’ 하는 발견을 하게 된다. 낯선 일상 속에서 불편함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느끼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문화다양성 감수성이 점점 풍부해진다. 그렇게 모든 존재의 다양성이 존중받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된다. 감수성이야말로 법, 제도와 같은 이성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함께 떠나는 여행
문화다양성 감수성이 풍부해지면, 곧 ‘프로예민러/프로불편러’가 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한번 눈길이 가고 손길이 닿은 곳에 계속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내가 불편하게 느낀 감각, 그 감수성을 토대로 법과 제도가 완비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되고,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방법도 고민하게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한 제도가 있는가 하면 문제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맞닥뜨린다. 힘든 인생 살기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 힘겨운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료가 있다면 어떨까?
부산문화다양성교육연구소는 여행이라는 형식으로 문화다양성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보드게임과 교안을 개발하고 있다. 보드게임 <불편한 여행>은 참가자가 부여받은 정체성을 지니고 여행을 하는 중 겪을 수 있는 ‘불편한’ 상황을 해소해 나가는 게임이다. 불편함 카드를 뽑았을 때 자신의 정체성이 해당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말은 다음 칸으로 이동하며 계속 여행할 수 있다. 반대로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되면 여행을 멈추게 되어 말은 이동할 수 없다. 해소 카드를 뽑아 불편한 상황을 해소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해소되지 못하면 계속 말은 멈추어 있어야 한다. 게임 진행 초반에는 불편한 상황을 만나 여행을 못 하는 답답함을 많이 이야기한다. ‘내가 지닌 정체성이라면 저 불편한 상황에 걸렸을 텐데, 다른 사람이 뽑아서 다행이다’ 하는 반응도 이어진다. 게임을 계속 진행할수록 ‘A 정체성은 불편한 상황을 정말 많이 겪는구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걸 상상만 해도 싫어!’,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지?’ 하는 대화가 오간다.
같은 상황이라도 개인의 정체성에 따라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보드게임을 하며 몇 차례 불편함을 느끼고 나면 불편함 감각을 공유하고 공감하게 된다. 불편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뽑는 ‘해소 카드’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의 불편함도 해소할 수 있는데, 불편한 상황을 많이 겪는 참가자는 해소 카드도 많이 뽑게 되고 자연스레 다른 참가자들의 불편한 상황도 해소해주는 ‘연대’의 기회도 늘어난다. 연대를 통해 게임의 승자를 가르는 ‘연대 블록’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보드게임 <불편한 게임>은 여행에서 겪는 불편한 상황을 해소하는 것이라 하지만, 교통, 식사, 관광, 숙소 범주로 나누어 제시되는 상황들은 모두 우리 일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일상 속 불편한 상황을 여행지에서 겪는 상황으로 바꾸어 다시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불편함 카드’가 제시하는 상황 중 실제 사례도 다수 있다. 불편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해소 카드에는 현행 법률 내용도 담겨 있다. ‘연대 카드’를 통해 참가자들이 직접 해소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제, 혐오, 차별과 그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토의하며 모두가 함께 여행을 이어간다.
올해 개발한 신규 교안 <우주탈출>은 ‘장애’를 주제로 하는 초등 중학년 대상 교안이다. 모두 다른 행성에 사는 행성인들이 한 우주선을 타고 가다가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을 만나게 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각 행성인들은 고유의 능력을 사용하여 위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새 우주선을 갈아타고서 마침내 푸른별행성(인간 기준으로 지구를 말한다)으로 향한다. 푸른별행성에 도착하자 각 행성인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모두 ‘입행성’ 거부를 당한다. 거부의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보호자, 도우미가 있다면 ‘입행성’이 가능하다고 심사관이 말한다. 우주에서의 위기 상황에서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푸른별행성인과 반드시 동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주에서는 위기 상황을 해결한 고유한 능력, 특별한 능력이 푸른별행성에서는 ‘장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능력 곧, 장애를 가진 다른 행성인들은 지구에서 홀로 다닐 수 없다며 도와줄 수 있는 존재와 반드시 같이 다녀야만 한다고 한다. 열심히 난관을 헤쳐 왔는데 나의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푸른별행성에서는 수용되지 못하고 배제된다. 우주여행을 하며 장애의 특성을 영화 속 슈퍼 히어로의 능력처럼 사용하였다가, 지구에서는 일상생활의 걸림돌이 되어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을 때, 어린이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할까?
도움이 아니라 연대로
보드게임 <불편한 여행>과 <우주 탈출> 교안을 통해 문화다양성 감수성을 키우는 동시에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했다. 흰 지팡이로 길을 짚으며 걸어가는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내가 도와드려야겠어!’ 하며 다가가 손을 꼭 잡고 앞서 걸어가는 것은 좋은 태도일까? 이 감동적인 ‘도움’은 정상과 비정상,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다수자와 소수자의 관계에서 권력을 지닌 다수자가 호의를 베풀어 소수자를 도와주는 것은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차별과 혐오, 배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선량한 차별’이 아니라 연대의 태도가 필요하다.
보드게임 <불편한 여행>에서 내가 가진 해소 카드나 연대 카드로 상대방의 불편한 상황이 해소되도록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는 것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주 탈출> 교안에서도 장애를 가진 존재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 도움이 곧 차별임을 드러낸다. 문화다양성은 다수자의 시혜가 아니라 모두가 연대할 때 진정으로 그 빛을 발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의 일상은 많이도 바뀌었다.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 이제는 덤덤하다. 익숙해진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도 낯설게 바라보자. 전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역 지침에서 배제되는 존재는 없는지, 더 불편한 상황을 겪고 있는 존재는 없는지. 코로나19로 예민해진 감각이 문화다양성 감수성으로 이어지고 연대하여 불편함을 함께 해결해나갈 때 우리는 힘겨운 이 일상을 즐거운 여행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충남문화재단 뉴스레터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