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네이션과 무용 -최승희의 민족 표상과 젠더 수행』 읽기(2)
최승희는 민족적인 무용 곧, ‘조선무용’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하여 이를 정립하고 몸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왜 민족적인 무용의 근원을 찾고 이를 계승한 무용을 후대에 전하고 싶었을까. 최승희가 찾고자 한 조선무용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을 좇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조선인 역시 ‘황국’의 신민이지만 본토인(일본인)과는 같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식민지 관점을 피식민지에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박형지와 설혜심은 『제국주의와 남성성』에서 엘러키 보우머Elleke Boehmer의 견해를 인용하며 제국주의란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영토에 대한 권한이나 권력을 주장하는 것이며, 식민주의는 그 나라에 대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련의 실질적인 실천으로 정의된다1)고 말한 바 있다. 곧 식민지 조선인의 예술도 일본제국의 지배권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식민지의 무희, 조선인의 무용
앞선 호에서 이진아가 네이션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역사적 구성체로 정의한 것을 밝혔다. 이어 이진아는 ‘자기민족지(autoethnography)’라는 개념으로 최승희를 바라본다. 자기민족지란 메리 루이스 프랫Mary Louise Pratt과 레이 초우Rey Chow의 논의를 차용한 것으로, ①외국의 관객에게 민족과 전통을 보여주고 전시하는 텍스트 ②식민지/제국을 연결하면서 예술장의 규칙을 생성하는 장소 ③원시적 열정이 투영된 시각 권력의 메커니즘이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이진아는 자기민족지의 공간 속에서 여성 신체는 시각문화의 보여지는 개체로서 순수성, 페티시즘, 이국적 취미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남성 권력의 시선과 욕망이 복합적으로 투영되는 매개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2)
최승희의 주요 활동지는 일본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활동한 4년의 3배가 넘는 14년을 일본에서 보냈고 큰 인기를 누렸다. 큰 키와 뛰어난 기량만이 인기의 비결은 아니었다. 최승희라는 식민지 조선 출신의 무용수가 추는 춤에 일본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일본 활동 초기 최승희는 모던댄스를 주로 추었으나 서서히 ‘조선성’을 표현하는 민족적인 무용을 선보였다. 광대나 기생이 추어왔던 전통적인 춤은 물론 서정적 정서가 풍기는 향토적 춤,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고대적 춤을 창작하여 추기도 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년간의 세계 순회공연에서도 조선 민족의 정서와 풍속을 표현하는 춤을 주로 추었으며 반주음악에서도 바이올린, 피아노와 더불어 장구와 피리 같은 조선 악기를 추가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에 나타난 민족 표상 역시 본래적인 세계로서 조선 그 자체이기보다 일본과의 관계성 안에서 변용되어 이해되었다. ‘일본=내지(중심), 조선=지방(주변)’이라는 등식 속에서, 민족은 일본의 한 지방을 구성하는 향토색이자 조선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문화 엘리트라는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조선무용에 재현된 조선성이 조선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지와 지방의 차이를 발견하고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구별짓기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한 논리와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3)
일제강점기에 조선무용을 추는 최승희가 성공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조선무용에서 일본제국은 식민지의 향토문화를 찾았다. 이국적이고도 신기한, 동시에 전근대적이며 원시적인 식민지의 모습이 강조될수록 일본의 근대적 문화와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자에 의해 호명되지 않으면 소멸될 위기에 놓인 피식민자의 문화는 제국의 문화권력에 의해 실현의 자리를 얻었다. 즉 조선이 식민지였기 때문에, 최승희가 식민지 조선의 무희였기 때문에 그의 조선무용은 일본제국의 환영을 받았다.
“오리엔탈리즘 안에서 억압을 피해가면서 제한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즉 피식민자는 내지인의 이국취미 시선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민족문화와 전통을 인정받으면서도 자기 해방이라는 판타지를 함께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촉진 속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4) 5)
해방된 조국, 우리 민족의 무용
해방 이후 최승희는 북으로 향한다. 식민지의 무용, 자기민족지로서의 무용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고유함과 주체성이 담긴 무용을 만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인과 서양인 관객의 호기심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관객으로 하는 조선무용을 추고 싶었다. 그는 남한 무용가들에게 ‘통일적인 민족무용’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북한 정부의 전신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출범 이후 북한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수단이 된다. 예술가들은 조선성이라는 정체성이 우월하고 자명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항일과 반미, 민족을 결합해 전통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받았다. 이는 북한이라는 네이션이 근대적임을 드러내기 위해 조선의 역사와 민족을 원시화하는 시도였다.
“북한에서 최승희는 서양성과 일본성의 대립항으로서 설정되었던 조선성을 사회주의적으로 전유하는 동시에 민족을 인민으로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무용극의 형식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민족을 독특하게 무용화하였다. 즉 최승희 무용극은 엘리트 계급이 아닌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조선무용이라는 점이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이는 그녀가 해방 이전 자신의 이미지와 작품에서 혼종적으로 존재했던 서양성과 일본성을 철저하게 배제했던 것이기도 하다.”6)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향토성이 담긴 춤을 추던 ‘조선의 이사도라 던컨’은 이제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무용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녀가 표상했던 민족은 ‘제국 일본 - 식민지 조선 - 사회주의 북한’을 오랜 시간에 걸쳐 중층적으로 의미했다. 그런 점에서 최승희는 네이션을 재현하는, 하나이면서 여럿인 ‘민족무용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수행적인 조선무용은 예술의 형식이자 양식 혹은 모듈로서 특정한 실체를 지니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닌 어떤 비어 있는 그릇 같은 기표로서 볼 수 있다. 이는 비어 있지만, 어떤 것으로도 채색과 연출이 가능한 그릇이었다. 또한 이는 순수하고 본래적인 세계가 아닌 외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문화번역을 통해 탄생된, 혼종성과 뒤섞임의 문화 텍스트이자 가시적인 장소였다.”7)
최승희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서양으로, 다시 북한으로 네이션을 월경하면서도 계속해서 ‘민족적인 무용’을 펼쳤다. 최승희의 민족무용은 이렇듯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환경에서 탄생했다. 이진아는 최승희식 민족무용을 “전통의 내재적인 발현이나 본래적인 세계를 표상하는 특정한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재적인 모방과 착종을 통한 혼합으로 구성된, 관념적이고 초민족적인 세계의 문화번역적인 산물로 볼 수 있다.”8)라고 평가한다. 그렇기에 최승희의 민족무용은 민족적인 동시에 초민족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1) 박형지·설혜심, 『제국주의와 남성성 -19세기 영국의 젠더 형성』, 19쪽.
2) 이진아, 『네이션과 무용 -최승희의 민족 표상과 젠더 수행』, 27쪽.
3) 같은 책, 81쪽.
4) 같은 책, 34쪽.
5) 이진아는 “제국의 예술장으로 진입하면서 조선예술을 내세웠던 예술가들은 조선으로부터 ‘자기 식민지화(self-orientalizing)'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지적하고 있다.
6) 이진아, 『네이션과 무용 -최승희의 민족 표상과 젠더 수행』, 181쪽.
7) 같은 책, 206쪽.
8) 같은 책, 211쪽.
*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26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