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마케팅연구소를 차린 동기에 대하여
일만시간의 법칙이라는 책 제목이 있다.
어떤 일이든 우직하게 일만시간만 잘 견뎌내면 그 곳에서 달인이나 장인소리를 들으며 인정받고 살 수 있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990년 10월 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6살때부터 미술학원부터 중학교에 올라가 화실을 다니며 미술학도를 꿈꾸던 아이가 있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4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시던 할머니와 간병을 도맡아하던 어머니가 1990년 기말고사기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이런저런 경제적 압박을 받으실 때였다.
"려진아 미술 취미로만 하면 안되겠니? 너 다른 과목도 제법 잘 하니까 대학은 갈 수 있을 꺼야"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담담하게
"네 그러면 오늘 화실가서 짐 싸가지고 오면 되나요?"
하지만 학교수업이 끝나고 화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그간 그리던 작업물과 이젤과 화구박스를 챙겨 나오면서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끓기 시작했다.
신당동 옥상에 설치된 창고에 대충 던져놓고는 아그리파와 쥴리앙 석고상이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은거 맞아? 너 우리 안보고 살 수 있겠어? 이봐~~ 정신차려..."
구석에 서있는 오래된 야구방망이를 들고 깨부시며 울부짖었다.
"괜찮다고 내가 괜찮다잖아! 조용해 조용해!!"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착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았다.
안국동 풍문여고 선도부(생활부) 였지만 방과후엔 안국역 화장실에서 짧은 치마와 배꼽티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며 친구들사귀는데에 열정을 쏟았다.
오토바이타는 남자친구 등 뒤에 소리치며 매달리기도 하고 술먹고 싸우는 친구들 중재도 하고...
하지만 학교에 오면 완벽한 모범생으로 살았다.
1993년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인 나
전기, 후기대 다 떨어졌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전문대 시각디자인학과를 1년도 무성의하게 다니다가 이대 중앙컴퓨터아트스쿨 2기로 수료를 받았다. 2대 학장이던 故 박종열 학장님이 내 포트폴리오를 잘 보고 이대 앞 자쓰리기획실로 추천을 해주셨다. 13개 직영 프랜차이즈를 가진 자쓰리헤어에서 헤어디자이너의 명함 디자인부터 매장 POP 디자인 이벤트 포스터와 배너, 현수막디자인, 할인쿠폰디자인을 하며 실무의 세계를 들어간다.
그 당시 이대 앞에 유행하던 무가지중에서 쿠폰북들이 성행하던 시절 쿠폰클럽 이나 쿠폰보따리라는 두 업체가 찾아왔다. 사실 쿠폰 회수율은 쿠폰클럽이 훨씬 우월했지만 담당 영업사원들과 돈독하게 지낸건 쿠폰보따리였다. 쿠폰보따리 담당자 였던 김현실장이 여러 업체의 마케팅 담당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자쓰리헤어, 에뛰드화장품, 애경, 녹색극장, 허리우드극장, 국립극장, 참이슬....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마케터들이 모여 개성상인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제휴마케팅이며 코마케팅등 실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마케팅모임을 7년정도를 했다.
마케팅모임에서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대표의 스카웃제의를 받아 (주)임팩트커뮤니케이션 크리이에이티브실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스타마케팅을 (주)삼립식품이랑 진행을 하던 국찐이빵 프로젝트를 맡게되어
수백장의 스티커를 그리고 관련 팬시제품 머천다이징 디자인을 진행했다.
연신 매출이 늘어나면서 삼립식품에서는 한정판으로 이벤트 제품을 준비하라했고 국찐이 쉐이핑CD를 기획하고 디자인하게 되었다. CD안의 콘텐츠의 인트로부터 각 메뉴구성을 짜기 위해 게임개발자를 섭외하여 간단한 게임에 국찐이 캐릭터를 입히고 바탕화면시리즈와 아이콘들...
그 외에 아트박스 파자마시스터 캐릭터나 스타캐릭터로 엄정화, 김승현 등 연예인캐릭터들과 캐릭터 라인센싱된 제품들을 가지고 의류에 접목을 하여 롤롤LolLol 을 런칭을 했다.
이 시기가 나의 8년의 시간들이다.
디자인은 마케팅이 접목이 되지 않으면 그저 매력없는 찌라시에 불과하다.
버려질 것인가..
주워서 주머니에 넣게 할 것인가.
그걸 고민하던 시절부터 디자인마케팅연구소를 꿈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