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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인마케팅연구소 Oct 13. 2017

디자인 하나만 하면 안되겠니 (2)

디자인마케팅연구소를 차린 동기

직장을 다니면서 투잡을 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본 직장의 급여가 너무 적어 보충하기 위함이 대부분인데 반해 나는 첫 직장인 자쓰레헤어 기획실 때부터 퇴근 후 시간에 회사일 과 다른 디자인일들에 욕심을 냈다.

그 중 하나는 SK카드시스템 팀으로 부터 카드디자인을 의뢰받은 것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자쓰리헤어에서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미용실에 가면 회원가입을 하면 얇은 책받침 같은 소재의 회원카드 뒤에 사용내역과 포인트가 인쇄되어진 PP카드를 준다.

그 당시 자쓰리헤어의 특별한 부서가 세이브카드시스템이라는 SK카드시스템과 협업을 하여 진행하는 부서가 존재했다. 자체적으로는 자쓰리헤어 체인 내부에서도 본 카드시스템을 쓰지만 그 외에도 그 당시 자쓰리헤어 김상규대표님은 데몰리션노래방도 하셨고 목동에 의류 상설매장인 미샤와 에고 매장도 운영하셨다.

그런 다양한 사업을 함께 디자인하고 마케팅하면서 접하게 된 카드디자인


본사 담당자로 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우리 외주업체가 디자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정대리님이 아르바이트 삼아 해줄래요?"

그러면 디자인은 한다 치고 필름출력은 어떻게 해서 어떻게 전달하는 가에 고민할 무렵

나의 어머니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내가 작업물을 출력소에 보내 놓으면 당신이 픽업해서 SK카스시스템에 전달해주시겠다고...

일사천리로 진행된 프로젝트에 난 회사일을 하면서 2년간 500여장의 다양한 카드디자인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디자인부터 작은 동네 미용실까지...


문화건달 짬 - 이 잡지는 마케팅모임의 총무였던 김현실장님의 야망찬 잡지였다.여기서 난 잡지디자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특히 음주인터뷰는 지금 TV에서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 유명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하는 진솔한 이야기는 꽤 좋았다


이때 부터 일까? 난 분명 디자이너인데 마치 편집기자인양 글쓰기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1편에서 언급한 자쓰리헤어 이후의 회사 (주)임팩트커뮤니케이션은 캐릭터라인센싱 사업이 주력이었던 광고회사였다. 그중에 가장 대단하게 남은 것이 국찌니프로젝트였고 디자인실 캐릭터디자인 수장이었던 분이 아트박스 파자마시스터즈를 탄생시킨 디자이너셨다. 그 분이 메인을 그리면 나는 Variation 이나 Application 을 하는 작업을 했다.

아트박스 파자마 시스터즈 라이센스 파트너 모집 광고

그 외에도 감자도리캐릭터(이 아이는 네이버 아이들 컨텐츠에서 플래시 영상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미호(여우캐릭터) 이 밖에 다양한 연예인캐릭터를 가지고 상품개발을 시도하려던 움직임은 지금 YG 엔터테인먼트에서 아이돌가수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머천다이징 하는 작업의 시초를 진행하고자 했던 작은 중소기업의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회사도 의도는 좋았으나 얼마안가 회사를 문닫았다.


세번째 기업은 삼성동과 대치동에 기반을둔 홍익기획(현 (주)홍익커뮤니케이션즈) 디자인실 과장으로 입사를 했다. 주 클라이언트는 IBM, 시스코 등 IT 기업들이 메인이었다.

시스코리플렛 디자인
소프트뱅크 리플렛


시스코리플렛


홍익기획을 다니며 내가 또 다른 곳에 열정을 붓는 곳이 있었는데 천리안 PC통신 동호회인 건축동호회였다.

그 당시 건축하는 남자친구의 초대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 곳이 나의 20대의 7할을 쏟은 곳이라 엄청난 활동을 했었다. 천리안페스티발을 대학로에서 데이콤의 지원으로 진행을 하면 우리 동호회는 사진전을 열었다. 

건축하는 이들은 사진을 매우 잘 찍는다. 남과 다른 시선들 감각들, 디자인실력들..

그들의 사진전을 기획하며 전시카다로그를 기획하여 만들고 이 것도 대략 3년 정도 한것 같다. 나중에는 마치 잡지처럼 기업광고도 받고 잡지형태로도 만들기도 했고 그들의 중국여행에 방송국도 연결하여 보내주기도 했다.   그 모든것의 원인은 사랑이었다.  비단 남자친구뿐만 아니라 7년을 활동하며 바라본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건축하는 직장인들 사업가들 학생들 부터 도시환경동호회며 조경동호회와 역사동호회와 때론 이렇게 저렇게 요즘 말로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포럼을 열기도 하고 강좌도 하며 동호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가슴으로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내게 소중한 동호회였다.


1999년 12월 31일

밀레니엄 버그가 올것이라 했다.

컴퓨터들이 모두 인식을 못할 것이라 했다.

그때 난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이별을 감지했다.  

홍익기획도 그 당시 남자친구도...


디자인 하나만 할 수 없는 상황이 1993 - 1999 이 후로도 계속 툭툭 나를 건들며 다가 왔다.


문화건달 짬 편집장이던 김현실장님은 문화 예술 쪽의 인맥이 닿아 그의 디자인 꺼리는 무조건 내게 왔다.

가수 변집섭의 포스터, 대학로의 많은 극단들의 포스터와 카다로그들

영화판에서 스텝일을 하던 시간들 

공연기획부터 디자인 마케팅을 하던 건들...


재미로 다가와 성취감을 주고 도파민의 과한 분비를 느끼며 나는 혹자는 일중독(워커홀릭) 소리를 들으며 200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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