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산꽃을 마중하다

by 홍시궁

살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우연한 경험을 한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다. 단조로운 삶에 조그만 파문을 내이는 그 경험이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미건조해지는 삶의 관성을 벗어나는 그런 행복한 우연을 또 언제 맛볼 수 있으려나.


작년 이맘때 천마산에 들었다. 팔현리 계곡을 따라 능선을 오르기로 하고 다래산장가든에서 출발했다. 산길이 참 고즈넉했다. 시간의 더께가 쌓여 자연스레 빚어진 듯한 산길의 요모조모가 눈에 살갑게 들었다. 산길 옆을 계곡이 졸졸 따라다녔고, 가끔 계곡물도 졸졸 흘렀다. 아직 인간의 계획이 미치지 않은 듯한 태생의 모습에 마음이 참 미뻤다. 조금 습한 기운이 있긴 했지만, 산이 뱉는 상큼한 숨에 밀려 습함조차 청량함으로 대기 속으로 흘렀다.

길섶으로는 풀꽃과 나무들도 많았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풀과 나무 이름들을 찾아내며 능선을 조금씩 접어 올랐다. 길어깨로 듬성듬성 산꽃이 보였다. 눈꽃이 지고 난 자리에 이제 봄꽃을 피우려는 듯 꽃대를 밀어 올리며 수줍은 듯 나 있었다. 능선 여기저기에는 사람들이 깔개에 엎드려 산꽃을 찍고 있었다. 산꽃의 눈높이에서 찍어야 제대로 찍을 수 있어서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땅의 것들 사진을 찍을 때 늘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우리네 카메라의 교만함이란.

알고 봤더니 천마산의 북쪽 사면인 팔현리 계곡 쪽 능선이 초봄 산꽃의 대표적인 군락지라고 했다. 2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산꽃이 핀다고 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산꽃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눈이 열리니 마음이 따랐다. 산으로 드는 내내 산꽃들이 따라다녔다.

곳곳에서 산괴불주머니, 꿩의바람꽃, 산괭이눈, 피나물, 개별꽃, 금붓꽃, 복수초 같은 낯선 봄의 산꽃을 볼 수 있었다. 천마산에 피어난 봄꽃들 가운데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꿩의바람꽃, 처녀치마, 만주바람꽃, 얼레지와 노루귀가 군락을 이루어 장관이라고 했다. 살아 숨 쉬는 식물도감이라 할 만했다. 또 천마산에는 우리나라 몇몇 산에서만 자라는 ‘점현호색’ 같은 희귀식물과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종 노랑앉은부채도 볼 수 있더랬다.

가장 기억에 남은 꽃은 얼레지다. 군락을 이룬 채 여기저기 제일 많이 피기도 했거니와 긴 꽃잎을 마음껏 쭉 펼쳤다가 햇빛을 받으면 꽃잎을 완전히 뒤로 젖히는 모양새에 완전 매혹되었다. 얼레지는 우리 땅의 깊은 산 계곡 주변에서 집단으로 자생하는 토종 야생화란다. 매우 화려한 꽃을 피워 ‘봄꽃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이름조차 이국적인 얼레지가 참나무 아래 낙엽들 사이에서 화려하게 피어있는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터졌다. 뛰어난 외모만큼은 천마산의 산꽃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했다. 진분홍 꽃잎 색 사이로 자주색 패턴의 이파리를 수놓은 얼레지는 한껏 치장한 ‘봄처녀’ 같다. 모습과 어울리게 꽃말도 질투라고 했다. 어느 시인은 얼레지에서 외안부 할머니의 아픈 이미지를 그려냈다.

그 곱던 얼레지꽃 / 박남준


다 보여 주겠다는 듯, 어디 한번 내 속을 아예 들여다보라는 듯

낱낱의 꽃잎을 한껏 뒤로 젖혀 열어 보이는 꽃이 있다

차마 눈을 뜨고 수군거리는 세상 볼 수 있을까

꽃잎을 치마처럼 뒤집어쓰고 피어나는 꽃이 있다

아직은 이른 봄빛, 이 악물며 끌어모아 밀어올린 새 잎에

눈물자위로 얼룩이 졌다 피멍이 들었다

얼래꼴래 얼레지꽃 그 수모 어찌 다 견뎠을까

처녀로 끌려가던 연분홍 얼굴에

얼룩얼룩 얼레지꽃 검버섯이 피었다

이고 선 매운 봄 하늘이 힘겹다 참 고운 얼레지꽃


복수초는 산꽃의 향연을 이끈다. 언 땅을 뚫고 올라와 봄을 깨우는 복수초로부터 시작되는 산꽃의 향연은 아직도 나목(裸木)으로 황량한 겨울산 풍경 아래서 어김없이 새 생명을 곳곳에서 피어내며 봄이 우리 곁에 왔음을 전한다.

노랑앉은부채는 꽃잎 모양이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앉은부처’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이 약용으로 남획하는 바람에 요즘은 깊은 산속에서만 겨우 볼 수 있다. 노랑앉은부채 꽃잎 안의 불염포 형태가 코로나19 바이러스 형태와 유사해 작년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현호색도 압도적으로 많다. 중간중간 그 귀한 점현호색 군락도 보였다. 잎 곳곳에 물 빠진 듯 점이 번져있는 점현호색은 천마산의 대표적 봄꽃이다. 천마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천마산점현호색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통칭해 점현호색으로 불린다. 현호색은 잎에 점이 없다. 작은 새들이 모여 지저귀는 듯 귀여운 야생화 현호색은 특이한 꽃이름처럼 모양도 독특하다. 하늘색, 보라색, 파란색, 흰색 등 색깔별로 군락을 이루어 예쁘게 핀다. 봄날 잠깐 피었다 사라져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산꽃인데, 주머니처럼 길쭉한 꽃자루 안에 꿀이 가득 들어있다. 그래서 꽃말도 보물 주머니라고 한다.

작은 폭포와 소(沼)가 발달한 천마산의 이끼 낀 계곡에서는 금괭이눈이 많다. 포엽 위에 작은 사각의 함지박 같은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붙어있는 금괭이눈은 꽃잎은 물론 포엽까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어 초록의 이끼와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노루귀는 역광에 반짝이는 솜털 덮인 꽃대 위에서 해맑은 소녀처럼 웃고 있는 꽃이 어여쁘다. 팔현리 계곡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꽃이다. 흰노루귀, 청노루귀가 있다. 노루귀는 꽃받침이 노루 귀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솜털 덮인 꽃대가 어린 아기의 볼에 난 솜털 같이 보송보송한 느낌이다.

그밖에도 다종다양한 산들꽃이 팔현리 능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눈길 스민 자리마다에 피어있는 산꽃들을 보는 것만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채 들었다가 마술처럼 눈앞에 나타난 산꽃들은 올해도 또 흐드러지게 지천으로 필 것이다. 그 즐거운 눈호강을 하러 올해도 팔현리 계곡으로 산꽃 마중을 가야겠다.

※ 산꽃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일부 블로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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