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을 맞아 처음 고향에 스몄다. 10일 정도 있으면서 불알친구들도 만나고 바람이 시원한 재실(齋室)에서 책도 실컷 읽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내려왔다는 말이 있자 그 놈아들이 득달같이 찾아왔다. 일마 이거 서울 가더니 사람이 변했구마이, 서울이 그래 좋더나 한 번도 안 내려오구로, 이쁜 가스나들하고 있응게네 세월 가는 줄 모르겄제 등등 유쾌한 지청구가 날마다 날아들었다. 그래도 참 기꺼웠다.
저녁답에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던 족구장에 모여서 족구를 하고, 그 내기로 술추렴을 해서 이슬에 젖을 때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친구놈들은 대부분 종고, 공고, 상고를 졸업하고 부산, 마산 등지에서 벌써 사회생활을 하던 터라 놀품이 달랐다. 실팍하고 고슬고슬한 농이며, 오금 저리게 하는 야설이며가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밤하늘에 떠돌았다.
그중 중장비 일을 시작했다는 친구넘이 '사이클' 얘기를 했다.
"너그 사이클이라꼬 들어반나? 직이는 긴데..."
"그기 먼데? 맛나는 기가?"
"에라이, 무식헌 시키들!"
그놈은 옆에 앉은 놈한테 한껏 끌탕을 날리고는, 사이클에 대해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사이클은 자전거의 한 종류이며, 뼈대(프레임)가 얌상하고 가늘지만 '기아(Gear)'가 무려 7단까지 있어서 차보다 더 빠르다고 뻥질을 했다. 기아, 기아가 먼데 하는 다른 놈들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직접 타본 경험담을 막걸리 사발과 함께 늘어놓기 바빴다.
대학에 입학 후 첫 여름방학이라 뭔가 좀 '쌔끈한' 거를 하고 싶던 차에 '사이클'은 날쌔게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 친구놈을 3일 밤낮을 꼬드기고 얼러서 겨우 빌렸고, 단 한 시간의 고민 끝에 남해군(郡)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한테 찾아가기로 했다.
첫날 아침, 출발하려는데 아버지가 흘깃 보시더니 “미친 놈” 하고 딱 한 마디 하셨다. 동구 밖을 벗어나 영산면(面)으로 향하는 79번 국도에 올라서자 사이클은 정말 빠르게 내달렸다. 7월 더위도 날려버릴 정도의 시원함이 얼굴과 가슴을 두드렸다. 영산 면소재지를 지나자 이내 구마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기어를 5단으로 놓고 국도보다 더 빠른 속도감을 즐기며 쾌속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삐뽀삐뽀"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백차(경찰차의 비속어)가 나에게 삿대질하며 길어깨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쫄아서, 자전거를 세웠다.
"어이! 니 머꼬?"
"학생인데예..."
"학생이모 자전거 타고 이래 고속도로 날라다니도 대나? 앙? 학생은 법도 엄나? 죽을 동 살 동도 모리고..."
말인즉슨, 자전거가 고속도로 진입하는 거는 불법이니 국도로 돌아가라는 거였다. 그 백차는 그래도 나를 남지읍으로 가는 5번 국도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는 "마, 조심해라이" 하고는 아지랑이 날리는 여름 아스팔트 위로 사라졌다.
마산에 도착하자, 고등학교 친구놈들이 난리가 났다. 맹일이가 드디어 미쳤다, 가까운 정신병원이 오데 인노, 절마 저거 저라다가 골로 가는 거 아이가 등등 또 한 번의 지청구가 여름 햇살처럼 따갑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산어시장에 가서 회와 아귀찜으로 속을 든든히 하고 다시 남해군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산 시내를 벗어나자 진동고개가 달려들었다. 기어 1단을 놓고 천천히 올랐다. 지나던 버스에 탄 사람들은 다들 '저거 머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이 더운 여름 그 뙤약볕 아래서 ‘저 지랄’을 하고 있네 하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허벅지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순간 고갯마루에 닿았다. 조그만 간이휴게소가 있었고, 수박물을 팔았다. 세 그릇을 내리 비워내자 아줌마가 "학생, 개안나?"며 걱정스럽게 물어보셨다.
고갯마루에서 내려가는 길은 방금 먹은 수박물보다 더 달았다. 차들보다 더 빠르게 굴곡진 길을 내달았다. 그 시원함은 바람이 내 몸을 통과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내리막의 기쁨은 짧았다. 당시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고통은 길고 기쁨은 짧다.
조금 더 가자 조그만 읍내가 있었고 여인숙에 첫날 몸을 부렸다. 간단히 샤워하고 평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잠깐 누웠다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팔다리와 온 근육들이 아우성이었다. 온몸의 뼈라는 뼈는 다 꺾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자전거에 올라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다라이에다 얼음을 풀어서는 한 시간만 앉아 있다 가라셨다. 그렇게 엉덩이의 삭은 화를 풀고, 안장에다 솜을 두둑이 깔고는 다시 출발했다.
지나가는 국도 옆 논들에는 모가 가득 심겨 있었고, 들에는 사람이 없었다.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에 담겼다. 달리다가 정자나무 그늘이 있으면 새처럼 깃들었다. 한 시간쯤의 낮잠은 바람과 함께 내 몸을 세워주었다.
또 한참을 가다 보면 냇가에서 아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나도 옷을 입은 채로 풍덩!! 아이들과 한두 시간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런 달콤한 시간들로 그 더위와 목마름과 엉덩이 고통의 '저 지랄'을 버텨나갔다.
고성, 사천, 삼천포를 지나 하동으로 해서 나흘째에 남해대교 앞에 닿았다. 사진으로는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남해대교의 위용이 눈앞에서 무너졌다. 그 생고생을 하면서 남해대교를 바라고 왔건만, 남해대교는 장난감 다리같이 왜소했다. 김이 팍 샜다. 게다가 친구 놈을 보려면 남해대교를 건너 또 한나절을 더 가야 해서 거기서 되돌아왔다.
1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아버지 엄마는 평상에서 호박죽을 드시고 계셨다. 사이클을 끌고 터덜터덜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시더니 또 “미친 놈” 하셨다.
일주일의 자전거 여행은 내게 참 컸다. 그 당시에는 시큰한 고통이었지만, 이후 내 삶을 버텨주는 하나의 힘이 되었다. 일주일의 시간 안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정과 따순 마음들이 나의 DNA가 되었던 거 같다.
3일 째였을 게다 신나게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새로 깐 아스팔트 길이라 최고의 스피드로 달음질쳤다. 그런데, 내리막길의 끝 지점에서 포장길이 끊기면서 비포장길이 나타났다. 사이클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비포장길의 돌부리에 채여 날아올랐다. 나는 두어 바퀴 굴러서 논두렁에 처박혔고, 사이클의 앞바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버렸다.
사이클을 수습하고 까진 데를 물로 씻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 인적이 별로 없어서 슬슬 애가 타던 차에 어떤 아저씨가 경운기를 몰고 왔다. 아저씨는 경운기를 세우고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시더니 "타라" 한 마디 하셨다. 아저씨 경운기에 자전거를 얹고 30여 분을 갔다.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고, 허름한 농기계 수리점에 경운기를 세웠다.
"니 이거 고칠 줄 알제?"
"아재, 자전거가 저 꼬라진데 우예 고침니꺼?"
"시꺼럽다. 낼 아침까지 고치나라."
그렇게 무질러놓고는 나를 데리고 아저씨 집으로 갔다.
아지매가 “아이고 우짜다 이랬노?” 하시며 아까징키도 발라주고 쑥잎을 빻아서 까진 데 싸매 주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날 밤은 아저씨 집에서 저녁도 얻어먹고 그 집 꼬맹이 데리고 냇가에 가서 물고기도 잡고 쑥잎 타는 모깃불 아래서 옥수수도 먹으며 지냈다.
다음날 자전거는 멀쩡했다. 헌 바퀴를 몸에 달고 뒤뚱거리긴 했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헤어질 때 아지매는 배고플 때 먹으라며 호박전하고 삶은 감자를 꾸러미로 해서 가방에 넣어 주셨고, 아저씨는 담배만 뻐끔거리셨다.
이정선의 <나들이>라는 노래 중에 '발길 따라서 걷다가 / 바닷가 마을 지날 때 / 착한 마음씨의 사람들과 밤새워 얘기하리라 / 산에 들에는 꽃이 피고 / 물가에 붕어 있으면 /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 그곳에 쉬어가리라'는 소절을 요즘 흥얼거리는데, 그날 그 느낌에 딱 어울리는 가사다.
이 기억을 반찬 삼아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었다. 아래 구절은 그 표현의 과장됨은 차치하고라도 참 새로운 인식의 창을 열어준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나에게도 이런 감성과 디테일과 표현이 살아와서 내 그 좋은 기억들을 이렇게 멋있게 써낼 수 있다면 세상으로 글나들이라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