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모를 내다

by 홍시궁

내 고향 6월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가장 중요한 농작물인 벼를 거두기 위해 모를 내야 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농번기(農繁期)'라는말처럼, 정말 눈코 뜰 새 없었다. 지금이야 이앙기로 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의 순수한 노동력으로 모든 일을 하던 때였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손으로 모를 내던 그 시간의 기억이 지금은 곰삭은 된장국처럼 구수하다. 그 기억의 틈새에서 무작정 유영하고 싶은 요즘이라 그 기억의 조각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모내기 준비는 4월 중순부터 시작했다. 그때가 되면 온 동네에 알지 못할 엄숙함이 감돌았다. 겨우내 말려두었던 볍씨를 물에 불리고, 모판을 낼 논에 물을 대서 못자리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경건한 종교의식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표정도 사뭇 진지했고, 옆에서 일을 거드는 나도 가뭇없이 진지해졌다.


5월 초순 무렵이 되면 날마다 못자리에 가서 그 정도를 살펴야 했다. 물이 너무 차갑지 않은지 손으로 재보고, 비료가 골고루 잘 스며드는지 살펴도 보고, 모 사이에 듬성듬성 나 있는 풀도 뽑아주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모내기를 할 논에 물을 대고 논갈이를 했다. 소 등에다 멍에를 지우고 쟁기로 철퍼덕철퍼덕 논을 갈았다. 일주일쯤 지나서 작은집 아재가 서래질을 하면 모를 낼 수 있는 무논이 되었다.

모판에서 한 달여 키우면 모가 15cm 정도 자랐다. 옅은 연두의 잎사귀들이 너댓 개 바람에 부대끼면 서래질 해놓은 무논에다 모를 낼 수 있었다. 그 무렵이면 또 묘한 흥분이 두근거리고는 했다.

모내기는 빠르면 5월 20일, 늦어도 6월 초순 사이에 온 동네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보통 품앗이로 모내기를 했는데, 보통 10명 정도 어른들이 함께 일을 했다. 이때는 학교도 농번기방학이라고 해서 일주일 쉬었다. 모를 내는 날 아침이면 아버지, 엄마의 얼굴에는 제사를 모실 때 같은 경건한 빛이 비치고는 했다.

아지매들이 아침 일찍 모판에서 가서 모를 쪘다. 나와 여동생은 쪄낸 모를 한 다발씩 짚으로 묶었고, 그 모 다발을 아재들이 지게에 바다리를 얹고 논으로 져날랐다. 논 언저리에 지게를 대고 모 다발을 논 중간에 듬성듬성 던져놓았다. 모 다발이 대충 부려지고 나면 모를 찌던 아지매들이 와서 논의 긴 쪽으로 모 줄을 대고 모를 심기 시작했다. 한 움큼에 너댓 개씩 모들이 뽑혀져 그대로 논물 속에서 심겨졌다. 논은 물질을 오래 해둔 터라 폭폭 빠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모 줄이 한 줄 두 줄 넘어갈 때마다 '얼시구 화자" 소리가 무논 위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한참 덥혀지고 있는 햇살을 맞으며 허리를 굽힌 채 모를 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30분쯤 지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아지매들은 야한 얘기들을 하며 그 무료함과 더위를 달럈다. 내가 듣거나 말거나 어디서 섬겨온 '야설(野說)'들이 어린 모 위로 말풍선을 만들었다. 까르르, 호호호 웃음소리에 그 거친 노동은 한 판의 놀이로 변했다.


논 한 군데를 반 넘어 심고 나면 으레 '모숭기노래'를 불렀다. 목청 좋은 아재가 먼저 선창으로 "모숭기하세" 하면 아지매들이 "모숭기하세" 하며 추임새를 올렸고, 이내 달큰한 모숭기노래가 연초록 들녘을 울렸다. 먼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합세해 "모숭기하세"는 크게 모아졌다.

올도 심꼬 낼도 심꼬 날마다 심어도 좋다마는

모야 베야 이쁜 베야 가을에는 내한테로 토실토실 오그래이

(이하 모름)"


모숭기노래를 듣고 있으면 참 고즈넉해졌다. 아재, 아지매들이 얼마나 깊은 기도와 기원으로 벼가 익기를 기다리는지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 마음에 모두어 나도 더 열심히 벼를 돌봐주리라 마음다짐을 놓고는 했었다.

그 고된 노동의 시간을 보상해 주는 때가 바로 점심이다. 우리 집 논에 모를 낼 때면 엄마는 집에서 일꾼들 점심을 하느라 달리 바빴다. 바쁘게 준비한 들밥을 머리에 이고 오는 엄마가 멀리 산그림자 아래로 보이면 이윽고 오전 모내기를 마쳤다.

들밥은 모를 내는 집에서 일꾼들에게 주는 최고의 성찬이었다. 다들 그늘에 자리잡자 마자 들밥을 다투기에 바빴다. 깨소금이 떠 있는 시원한 오이탕국에 쌀보리밥을 말고는 큼직한 고추 하나 강된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은 고된 노동의 결기를 씻어내는 약밥에 다름아니었다. 그 들밥 반찬 중에서 내가 제일 좋은 했던 게 찐 호박잎이었다. 호박잎 한 장 손바닥에 척 걸치고 밥 두 숟가락 올리고 기름장을 두른 후 우악스럽게 여며서 볼이 미어터져라 씹으면 그 삽싸름한 맛의 즐거움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았다. 아재들은 또 막걸리 한 잔에 노래도 한 자락 길게 뽑아 올렸다.


들밥을 배불리 먹고 나면 으레 1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자리도 깔지 않고 돌베개를 베고 스르르 잠들었다. 간간이 부는 하늬바람을 맞으면서 자는 들잠은 그야말로 꽃잠이었다.


오후 모내기에는 가끔 농악도 등장하곤 했다. 청년회 아재 몇몇이 꽹과리와 장구를 가지고 와서 한 판 걸판지게 놀아주고는 했다. 아지매, 아재들의 야설도 그만큼 더 농밀해졌다. 그 더운 햇발 아래 늘어지던 야설은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새참으로 먹는 막걸리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세 시가 넘어가면 아버지가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당시 막걸리는 술도가에서만 살 수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로 가야 했다. 하얀 플라스틱 말통 하나 가득 막걸리를 싣고 집에 와서 주전자에 담으면서 홀짝, 논으로 가면서 홀짝홀짝 맛도 보곤 했다. 해에 익은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논에 가면 어른들이 슬슬 웃음을 보이곤 했다. 일꾼들이 막걸리에 고추 안주로 헛헛한 속을 달래고 있으면 이내 엄마가 새참으로 대광주리에 국수를 내왔다. 나는 커다란 대접에 국수를 세 그릇 뚝딱 비워냈다. 그때의 그 먹성이란.

그러나저러나 한 마지기 논에 모를 다 내면 물논 위에는 삐뚜름한 줄의 행렬이 생겼다. 연초록 이파리들만 물 밖으로 내놓고 모는 일제히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그 살풋한 풍경에 아버지,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차올랐을까. 그다음에 이어질 무지막지한 노동이야 나중 일이고, 어린 모들이 행렬을 짜고 있는 무논 위로 내려앉는 저녁놀처럼 기분은 한껏 달아올랐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밑비료를 조금 뿌리고 물꼬를 터서 물높이를 맞추시고는 모내기 의식을 끝냈다. 물론, 한쪽 귀퉁이에 모 다발 하나 남겨놓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며칠 지나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모를 다시 심어주는 뒷심기를 마저 하면 모는 인제 백일이 지난 셈이었다. 그때부터는 해와 바람과 비가 모를 성장해 나갔다. 논둑에다가는 모가 자랄 때 외롭지 말라고 콩도 심었다. 논둑에다가 작대기로 구멍을 쏭쏭 내고 그 안에 콩알을 서너 개 넣은 후 재로 덮으면 되었다. 한 뼘의 공간이라도 이용해서 작물을 심으려는 어른들의 지혜를 배웠다.


모판 내기부터 콩 심기까지 한 바퀴의 순환으로 끝나는 '모내기의식'이 어린 시절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품앗이의 기억은 특히나 깊이 박였다. 돈이 오고감이 없이 서로의 일만 오고가는, 그 안에서 아무런 계산도 서지 않던 그 마음들이 모였기에 '거문디미'라는 공동체가 가능했었나 보다.

3~40대를 건너는 동안 그런 마음들은 순진해 빠진 감정의 사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는데, 또 요즘은 그런 마음들로 살라고 주위에서 왕왕거린다. 그 순수한 마음들의 결사체를 다시 복원할 수는 없겠지만, 내 마음이 허락하는 한은 내 세포 속에 스며있는 그 마음가지들을 다시 꺼내보려 한다. 엇 뜨거 하고 다시 집어넣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껀데,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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