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방문을 피하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말)에 다닐 적에는 가정방문이라는 게 있었다. 새학년이 되면 으레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작성하게 했었는데, 그걸 바탕으로 해서 담임선생님들은 학생들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서 교육환경을 살피고는 했었다. 나는 거기에 적는 내용들이 참으로 가난해서 혼자 얼굴을 붉히고는 했었고, 더더군다나 선생님들이 그 볼품없는 집으로 찾아온다는 생각에 뒤꼭지가 서늘해지곤 했다. 잘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내 자존심의 끝은 가히 어딘 지를 몰랐다.
5학년 때 마침내 동티가 났다. 4학년 때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선생님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불상사를 막았는데, 5학년 담임선생님은 반장의 집을 어찌 안 가볼 수가 있냐며 한사코 고집을 피우셨다. 30대 중반의 여자분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공이 참 높은 분이었다. 살살 웃으시면서 “집에서 가서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라. 잠시만 말씀 나누면 돼” 하시고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들으시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고민의 시간이 지나갔다. 방문 날짜가 점점 다가올수록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수업시간에도, 밥 먹을 때도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을 집으로 못 오게 할까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날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석을 할까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병문안을 오신다고 할 거 같았다. 답도 안 나오는 잔머리만 계속 돌리다 결국 아부지, 엄마한테는 말씀도 안 드린 채 그날을 맞았다.
조회 때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선생님께 경례!”도 까먹고 지나갔을뿐더러 1교시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도 못했다. 애들은 킥킥거리고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시고...하여튼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 지 몰랐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잽싸게 돌아왔다. 집에 왔을 때 아부지, 엄마는 논일을 나가셨는 지 아무도 없었고, 도꾸(Dog의 일본어 표현)만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게 꼬리를 쳤다. 애꿎은 도꾸한테 발길질을 날렸더닌 깨갱!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2시쯤 오신다고 했는데, 두 분이 삽짝으로 불쑥 들어오실까봐 안절부절못했다. 된장국에 보리밥을 말아서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대청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우짜지? 아부지, 엄마를 찾으러 가까? 안 그라모 내 혼자 집에 있으까?
지구의 자전 속도보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 끝에 나도 집을 탈출하기로 했다. 나마저 집에 없으면 선생님이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실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속으로 오호 쾌재를 부르며 우리집이 잘 내려다 보이는 옆산으로 한달음에 뛰어올랐다.
옛날 할배들 무덤이 즐비하게 앉은 곳에 도착해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저 아래로 우리 선생님과 옆반 남자선생님이 같이 골목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괜스레 무덤 뒤로 몸을 낮추었다. 두 분은 삽짝을 열고 들어가서 한참을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더니 10여 분쯤 후에는 발걸음을 돌리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짜릿한 쾌감이 내 몸을 훑었는데, 조금 있으니 묘한 죄의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까 이 방법을 생각해냈을 때는 나의 기똥찬 묘수에 스스로 기분이 좋았었는데, 선생님들이 그냥 돌아가시는 모습을 막상 보게 되니까 두 분께 엄청나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엄청 미워졌다.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왜 당당하게 두 분을 집으로 모실 생각을 안했는지 분통이 터졌다. 내 가난한 자존심으로 인해 벌인 이 일을 아부지, 엄마가 아시게 되면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눈시울이 따끔해졌다. 하지만, 저녁때가 되어서도 아부지, 엄마한테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은 어제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그냥 다행이다 싶었었는데, 지금에서야 선생님의 그 마음이 참 감사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어렸던 마음이 이제 훌쩍 자라 한 뼘은 더 커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