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천로역정의 사람들을 순례길에서 만나다

by 박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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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박시룡(이학박사):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현재 ‘KBS 동물의 왕국’ 감수 교수로 활동 중이다. KBS, MBC 자연다큐멘터리 자문교수, 멸종위기 1급 보호조 황새 복원 프로젝트 책임교수를 역임했다. 자연과학자로 쓴 '황새가 살 수 없는 땅 사람도 살지 못해요'(목수책방), '끝나지 않은 생명이야기'(곰세마리), '황새~자연에 날다'(지성사),’황새가 있는 풍경(지성사)’ '술 취한 코끼리가 늘고 있다'(웅진출판사), '동물행동 이야기'(자음과 모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프롤로그


순례의 길에서

나는 오랫동안 자연 과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쌍안경과 확대경으로 야생의 새와 풀벌레를 찾아다니며, 그것들을
숫자와 데이터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의 끝에서, 나는 더 깊은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은 내 학문의 방향을 넘어, 인생 전체를 흔들었다.
그 답을 찾아 성경을 펼쳤을 때, 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 책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을 그린 한 편의 영적 지도였다.

그 길에는 ‘크리스천’, ‘신실’, ‘소망’, ‘작은 믿음’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각기 다른 시험과 고통을 지나 마침내 천성문 앞에 선다.
나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내 삶의 길 또한 그 순례길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


황새와 순례자의 길

나는 오랫동안 황새를 연구해왔다.
그들의 비상은 언제나 내게 경이로웠다.
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 향하는 인간 영혼의 상징처럼 보였다.

황새는 매년 먼 거리를 날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여정은 쉽지 않다. 바람과 폭우, 굶주림과 사냥꾼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하늘의 나침반이 그들의 영혼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비행 속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을 보았다.
세상의 풍랑을 맞아 흔들리면서도,
끝내 ‘하늘 본향’을 향해 날아오르는 그 믿음의 날개를.

그래서 내 그림과 글 속에는 자주 황새가 등장한다.

그것은 단순한 새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떠나는 영혼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묵상의 길, 그리고 쓰는 순례

이 책은 『천로역정』을 새롭게 묵상하며 쓴 신앙의 기록이다.
나는 매 장마다 번연의 인물들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만났다.
허영의 시장에서 세속의 유혹을 거부하는 ‘신실’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작은 믿음’을,
그리고 절망의 감옥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순례자를.

그들은 모두 내 곁에 있었다.
서울의 거리에서 복음을 외치는 한 노장로,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는 형제들,
그리고 병든 몸으로도 기도하는 성도들 속에서
나는 ‘오늘의 크리스천’을 발견했다.

나는 과학자이지만,
신앙의 여정에서는 언제나 예언자의 눈을 사모해왔다.
방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의 언어’를 구했다.
이 책은 그런 갈망 속에서 쓰였다.
지성의 언어로 신앙을 해석하고,
신앙의 언어로 과학을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였다.


침묵의 소리, 사랑의 계시

순례의 길은 언제나 침묵으로 가득하다.
기도의 시간, 고통의 시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씀의 무게’를 배웠다.

하나님은 말보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풍랑 속에서도, 병상에서도,
그분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그 음성이 내 안을 채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믿음은 설명이 아니라, 신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한 완주를 꿈꾸며

이 책은 17장에 걸친 순례의 기록이다.
‘좁은 문’에서 시작해 ‘죽음의 강’을 건너기까지,
그 길은 눈물과 회개, 그리고 기쁨과 부활의 여정이었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수많은 ‘황새의 날갯짓’을 보았다.
그들의 비상은 나의 기도가 되었고,
그들의 귀향은 내 신앙의 결론이 되었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품으로의 귀향이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 사랑은 우리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순례길에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지친 영혼이 이 글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하늘의 바람을 느낄 수 있기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2)


2026년 봄, 제주 성이시돌 순례길에서
박 시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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