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순례자는 마법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이상하게 마법의 땅에서는 졸음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목자들이 조심하라고 일러 준 땅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졸음을 참아가며, 쁄라 Beulah(사 62:4)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새들이 계속 노래를 하였고, 땅은 꽃으로 덮여 있었으며 비둘기의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이 땅에는 해가 밤낮으로 빛났습니다. 이곳은 천국의 경계 땅으로 순례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성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커다란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사 62:11).
드디어 이들 앞에는 천성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급류가 흐르는 강이 놓여있었습니다.
갑자기 천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천성문으로 가려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늘 문에 닿기 전의 마지막 관문입니다." 크리스천이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요? 건너기 좋을만한 장소를 골라야 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건널지 계획도 좀 짜고... 또 돌아갈 길은 없나요?” 다시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발을 딛기 전까지는 강이 보이지 않을 거요. 돌아갈 길도 없고, 당신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거룩한 황홀함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 크리스천으로 쁄라의 땅에서 휴식과 영적인 충전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동안은 못다 한 순례길을 걷습니다.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사이로 꾀꼬리 두 마리가 자웅을 겨누는 모습이 자연과학자의 눈에 포착됐습니다. 그 모습은 한 생명체의 황홀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냥 새들의 구애춤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용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황홀감' 말고는 다른 표현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 과학자, 특히 동물행동학자들은 이런 행동을 외부자극과 내부자극인 호르몬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라는 이 행성은 태양의 주변을 시속 10만 km라는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그것도 365일을 주기로 해서 천지가 창조된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태양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기에 빛의 양이 늘어나면서 이 빛은 꾀꼬리의 시각(눈)을 통해 뇌에서 성선자극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합니다. 이 호르몬은 다시 생식기에서 성호르몬의 분비로 이어집니다. 이 호르몬으로 인해 수컷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랫소리에 자극을 받은 암컷은 수컷과 짝짓기 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둥지 짓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때 바로 암수가 자웅을 겨누면서 황홀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암컷은 다시 둥지를 만들고 싶은 호르몬인 프로락틴을 분비하고, 가슴 깃털이 빠지면서 그곳엔 맨살이 드러납니다. 그곳에 알을 갖다 대고 어미의 체온을 전달합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이 생명체를 만들고서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이 황홀감을 거룩한 황홀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가야 할 천국은 거룩한 황홀감으로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면서 생명체들에게 이 황홀감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분명 빛과 생명체 내부 호르몬과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거룩한 황홀함을 빗으셨습니다. 어느 날 이 행성에는 인간이라는 다른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그가 바로 아담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잘못을 범해 우리 모두가 죄와 죽음이라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롬 5:18). 그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천국과도 단절이었습니다. 그 단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한 사람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순례길에서 그 단절을 거두워 가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주도 성 이시돌 순례길
주님께서 공생애에 장님을 눈뜨게 한 조형물 앞에 섰습니다. 그 조형물 앞에서 스케치 북을 펴 들고 주님께서 병자를 치료하셨던 지난 2000년 전의 사건을 담아봅니다. 예수께서 소경 된 사람을 보시고, 흙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반죽을 이겨서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라." 그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요 9:6-7). 이 대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정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소경 된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녹내장이나 백내장을 앓고 있는 환자도 아니었습니다. 망막의 신경세포 어디에선가 선천적 장애로 태어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였습니다. 그런 환자를 예수님은 소경 된 이의 눈에 침을 발라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이 사람을 보고 그 원인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자기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 된 이유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죄로 인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요 9:3-5).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표적 말고도, 문둥병을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런 능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후에 제자들에게도 똑 같이 임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주님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주님! 내게도 이런 치유의 능력을 주실 수 있나요?" 성경에 보면 제자들의 이런 능력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내려졌습니다. 물론 나도 기도하고 간구하면 제자들처럼 치유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살펴보면 병고치 신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소경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인가?
TV 화면에서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척수장애인 이야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 장애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인터넷 강의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13년째 가장이었습니다. 강의를 할 때는 휠체어에 묶어 놓은 태블릿 PC에 입에 물린 태블릿 펜을 이용해 태블릿을 조작해야 할 정도로 머리(뇌)와 얼굴의 입 외에는 몸을 전혀 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이분이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 이 분이 이렇게 된 것이 부모의 죄인가로, 아니면 본인의 죄인가요?” 예수님은 분명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중증 척수장애인이 되었다.”
나는 TV화면만을 통해 이분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이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한 없는 사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저 나는 오늘 내 속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와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이 내려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다시 성 이시돌 순례길에서 제자들의 발 씻기 신 예수를 만납니다. 성경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했다'(요 13 1-5)라고 적고 있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는 예수의 그림을 그리면서 주님께서 내 발을 씻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네 이웃의 발을 씻겨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내 지친 발을 씻기시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내 몸이 땅에 닿는 바로 그 부위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분은 무릎 꿇고 손으로 내 발을 들어 씻기십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빛을 맞주치며 말씀하십니다."내가 네 발을 씻어 주었으니, 이제 너도 지금부터 네 이웃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네가 모범을 보였으니, 너도 내가 한 그대로 하여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거든 너도 그대로 행하여라. 복된 삶을 살아라"(요 13:13-17). 크리스천으로 사는 겸손을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은 우리 앞에 무릎 꿇으신 주님을 보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 몸의 온전한 의미를 알게 된다. 내 몸은 쾌락과 고통의 시한부 도구 훨씬 이상의 것이다. 내 몸은 하나님께서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려 하시는 집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과 다른 이들의 몸에 베풀어진 사람의 돌봄은 진정 영적인 행위다. 그것을 통해 우리 몸이 몸의 영광스러운 체험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때가 저녁 식사 이후였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던 전날 밤,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존경하는 윗사람에게는 쉽게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인 베드로마저도 너무 놀랐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절대 예수께서 발을 씻을 수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늦게서야 예수님의 의중을 알아차렸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전폭적 자기희생으로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내 몫을 남겨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사랑도 그분의 사랑처럼 충만하고 철저하며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나에게도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 대신 네 이웃의 발을 씻을 준비가 되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명하십니다.
크리스천의 사랑
크리스천들이라 하면 기독교의 덕목을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덕목을 믿음과 소망보다 더 으뜸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양 오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비를 베푸는 마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감정이 지나치게 강조될 수 있어 우리 사회에서 늘 논란거리게 됩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닌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한 사랑은 배워서 익혀야 한다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여기서 잠깐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38)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그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그 척추장애인을 사랑하고 계시는 것처럼, 늘 내게도 그 사랑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4-8)에서 크리스천들에게 사랑의 실천 목록을 이렇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고,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지 않고, 뽐내지도 않고, 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며, '내가 먼저야'라고 말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꼬치꼬치 따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비굴하게 굴 때 즐거워하지 않으며, 진리가 꽃피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무슨 일이든지 참으며, 하나님을 늘 신뢰하며, 언제나 최선을 구하며, 뒷걸음질하지 않으며, 끝까지 견딘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늘 이 말들을 암기해서 실행해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 순례길에서 찬송을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쁄라의 땅을 걸어봅니다. 그리고 거룩한 황홀감으로 충만된 천국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갑니다.